한복협 9월 월례회 손인웅 목사 발제문

 한국복음주의협의회(회장 김명혁 목사)는 11일 금요일 오전7시 화평교회에서 "한국교회와 십자가의 길"이란 주제로 한복협 월례회를 가졌다. 다음은 손인웅 목사(덕수교회)의 발제문 전문.

십자가 상징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를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기독교 신앙 내용의 핵심이 달려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십자가는 예수의 죽음을 완성하는 정점(頂點)으로서 십자가를 통해 예수의 전 생애가 해석되고 하나님의 본성이 우주적으로 표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장로교 목사로서 필자가 이해하는 십자가의 의미를 논의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걸어야 할 십자가의 길이 가리키는 방향을 정리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십자가와 십자가 상(像이)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로 사용되어 왔는지를 살펴보면서 십자가와 십자가 상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점검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나서 십자가가 상징하는 의미를 정리하면서 오늘날 우리를 향해 열려 있는 십자가의 길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

십자가는 초대 교회가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표현하는 상징으로 사용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초대교회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주’라는 말을 뜻하는 희랍어에서 첫 글자들을 딴 ‘물고기(ΙΧΘΥΣ)’라는 글자를 사용하여, 박해가 심한 시기에 ‘물고기’ 표를 붙이면서 신자라는 것을 알리곤 하였다.

그러다가 2세기에 접어들면서 십자가에 대한 존경하는 마음이 넓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호신용으로 지니고 다니는가 하면 장례 시에 무덤 속에 넣어 주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335년에 이르면 십자가 주일(9월 14일)까지 정해 십자가를 높이는 풍토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 후에 십자군은 예수께서 달리신 십자가 조각을 성지(聖地)에서 구입하여 가져가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하였다.

중세기 후반에는‘십자가’를 신앙의 대상이자 기도의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주님의 상이 조각된 십자가 앞에서는 주님께 드리는 예배와 같은 예배를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 후 악마를 물리치거나, 전염병이나 재앙을 물리치는 데 십자가가 능력이 있는 것으로 사용하곤 하였다. 이러한 태도가 점점 가속화되어 중세기 말까지 십자가는 예배의 대상으로 제단에 비치되었다. 다른 기물들이나 형상들에 비해 십자가가 왜소하게 보이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의 크기를 크게 만들었으며, 중앙의 위치에 눈높이 보다 높은 곳에 매달아 그 위엄을 분명히 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십자가에 대한 태도를 보면서 종교개혁자들은 ‘십자가’와 ‘십자가 상’이 우상화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교회 내 성물에 대한 철거를 단행하였다. 쯔빙글리, 칼빈, 루터 등은 이신칭의를 내세우며 그동안 성물로서의 십자가와 십자가 상이 지나치게 우상화되어 왔던 점을 지적하면서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아예 그 모습을 치워버리는 일에 앞장섰던 것이다.

이처럼 십자가와 십자가 상에 대한 신자들의 태도는 그 성물 자체를 경배의 대상으로 삼는 우상화하는 데 까지 이르렀고, 이러한 폐단을 바라보며 종교개혁자들은 아예 교회 예배실에서 십자가 상을 철거하는 데 까지 나아가며 믿음의 본질을 사수하려고 하였다. 그러면, 십자가와 십자가 상을 대하는 역사적인 흐름을 대하면서 오늘날 우리는 어떤 태도로 십자가와 십자가 상을 대하는 것이 바람한 지를 살펴보도록 한다.

십자가나 십자가 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의 의미를 함축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다. 성경과 교회의 전통은 예수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것이며, 우리 죄를 위한 것이고, 많은 사람을 위한 것이며, 세상을 위한 것이라고 말해 주고 있다. 고린도 전서 15장 3절에서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증언하고 있다. 요컨대 십자가는 십자가 정상에 있는 예수를 바라보게 인도하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인류를 향한 속죄와 대속을 위한 것이었음을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서를 통해 이 사실을 잘 요약해 주고 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대속적 메시지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의 메시지를 동시에 전달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값비싼 사랑의 선물이며 이 세상에 하나님의 용서와 우정을 전달해 주고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 가운데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이 땅의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인간과 인간 사이에 화목하게 하셨다. 십자가 사건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은 하나님의 외아들을 죽기까지 내어주실 정도로 크고 위대한 것이었다.

또한, 하나님의 대속과 사랑을 드러낸 십자가는 철저한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십자가는 정복자인 로마인들이 들여온 극형제도였고, 누구나 이것을 피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을 정도로 끔찍하고 치욕스러운 형벌이었다. 그런데, 우리에게 속죄와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 예수께서는 골고다 언덕에서 묵묵히 고통스럽고 처참한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길을 걸으셨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라는 의미를 생각할 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죽으심을 보여주는 이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죽음을 동시에 떠올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바울은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 앞에서 선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증언해 주고 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요컨대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 상의 주님의 죽음 앞에서 우리 자신이 죄의 과거에 대하여 죽고 주님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십자가의 죽음에 뒤이어 부활 사건이 이어진 사실을 생각하며 “고난의 십자가는 영광의 십자가로 승화”되었다고 말한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과 죽음을 지나 영광과 승리의 부활에 이르게 되었음을 함께 전해주는 것이다. 기독교인에게 고통과 십자가는 최종적인 운명이 아닌 것이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라면 비극적인 한 인간의 형틀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거나 죄의 굴레에 빠져 있는 모든 죄인들을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시겠다는 종말론적인 약속이며 선취적인 사건이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할 때에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걷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를 발견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지나 우리를 향한 구원의 길을 내셨다. 이 십자가 사건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구체적인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는 부활이라는 승리와 영광을 가져다 주었다. 이처럼 십자가가 보여주는 메시지들은 그리스도인들인 걸어가야 할 십자가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따르는 십자가의 길 외에는 승리와 부활의 하나님께로 이르는 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십자가의 길은 주님이 걸으셨던 것처럼 깊은 고난과 고통이 존재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었던 주님의 십자가가 그러했던 것처럼 죄와 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사랑의 삶을 산다는 것은 고통과 희생을 감수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의 미움과 악에 의해 고통과 핍박을 당하지만 그 길을 감수하는 사랑이 결국에는 미움과 죄와 악의 권세를 정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리이며 능력인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십자가의 의미와 원리를 늘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품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하는 원리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눈앞에 십자가를 걸어 두느냐, 철거하느냐의 문제에서 벗어나 우리를 위한 구원을 이루신 주님의 십자가를 마음속에 든든히 자리잡게 하며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이다.

< 참고 문헌 >

박종환 외 6인 공저. 『거룩한 상징』.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9.

이종성. 『십자가의 끄는 힘』. 서울: 한국기독교학술원, 2001.

윤철호. 『현대 신학과 현대 개혁신학』.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03.

다니엘 밀리오리. 장경철 역. 『기독교조직신학개론』.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2.

이재은 편저. 『기독교문장대백과사전』. 제13권. “십자가.” 서울: 성서연구사,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