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자유’라는 말과‘민주주의’라는 말은 사실상 긴장관계 속에 있다. 자유란 자신이 바라는 가치를 다른 이의 구속을 받지 않고서 추구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시민이 주권을 갖는 정치제도를 말하며, 이 제도를 향유하기 위해 시민은 적절한 자세를 갖는 것이 요구된다. 따라서 개인적 가치를 핵심으로 하는 자유의 이념과, 시민의 정치적 덕성을 중심으로 정치를 생각할 것을 요구하는 민주주의의 이념 사이에는 거의 대립적이라고 할 긴장이 존재한다.

자유주의는 정치를 절차적으로 이해해 왔다. 공정한 절차를 수립하고 그에 따라 엄정하게 경쟁을 한다면 그 결과는 정당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적 정의를 이처럼 절차적 정당성의 확보 과정으로 이해하는 자유주의에는 여러 문제점들이 있다. 예컨대, 공정한 경쟁을 하자면 모두가 같은 출발점에서 시작되어야 하는데, 우리가 알다시피 가난한 자와 부자가 서 있는 지점이 다르므로 그들에게 공정한 경쟁의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주의자들이 추구하는 자유라는 가치 또한 모두에게 진정한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의 근본적인 문제 때문에 그 대안으로 공화주의가 수십 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논의되어, 지금은 서구 학계 내에서 토론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국가가 제대로 기능을 하려면 시민들은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보다 양심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 공화주의의 핵심적 입장이다. 즉 시민은 정치에 대해 보다 깊은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 하며, 공적 공간에서 자신의 의사를 명백히 표명해야 하고, 나아가 자신이 선출직 공무원으로서 봉사하겠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이러한 시민적 덕성의 형성에는, 애국심으로 표현될 수 있는 공적 사안에 대한 애정, 용기, 정의로운 삶 등이 필요하다. 개인적인 사사로운 이익만을 추구하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에 갑자기 국회의원, 시장, 시의원 등이 되겠다고 나선다면 정말 곤란한 일이다. 국가로부터 장관이나 검찰총장으로 봉사하라는 부름을 받고 국회 청문회 자리에 섰을 때 들추어진 과거의 삶이 개인적 욕망과 가족의 이익 추구로만 점철되어 있다면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그런데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정치적 자유란 제멋대로의 자유로는 가능하지 않다. 오히려 시민으로서의 덕성을 갖출 때 정치적 자유는 실현된다. 예수님의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 말씀에서 주어는 ‘진리’이고 ‘자유’는 술어 속에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자유’를 주어로 놓고 이 말씀을 말해보면, “자유란 진리를 앎으로써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자유가 그리스도인들만이 추구할 것이 아니라 바람직한 국가의 시민들도 추구해야 할 바다.

(<월간 기독교>에 최근 개제한 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