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 정근두 총회장 부활절 메시지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2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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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의 첫 새벽
, 무덤을 향해 가고 있는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안식 후 첫 날 새벽인데도 무덤을 찾아가, 열린 무덤 그 빈 무덤 속에서 주 예수의 시체를 찾고 있는 이 안타까운 여인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조국교회와 너무나도 흡사한 모습입니다. 부활절 예배의 포스터는 곳곳에 붙어있는데 성도들의 발걸음은 계속 무덤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주 예수의 시체에 바를 향품 준비에 몰두해있는 모습입니다.

첫 부활 새벽의 그 여인들처럼 그 열심 그 애정 그 정성을 가지고 말하면, 조국의 성도들을 능가할만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상식을 초월한 정성과 열심이 문제입니다. 살아있는 이웃들은 추운 겨울에 자기 몸 뉘일 자리가 없는데도, 죽어서 자기 누울 자리를 준비해서 부활의 동산이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살아있는 이웃의 아픔과 가난에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강제로 북송되는 동족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여야 합니다.

부활의 새벽은 밝았습니다. 정성껏 준비한 향품을 바를 시체는 이미 없습니다. 주님은 다시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산 종교를 죽은 종교 섬기듯 섬겨서는 안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는 살아계신 주님을 섬기는 공동체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에 의해 이룩된 신앙의 공동체인 형제자매를 위해 예비한 향품을 사용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요한에게여기 네 어머니라고 마리아를 맡기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우리가 섬기도록 남겨두셨습니다. 이제야말로 삼백 데나리온이 넘는 향유를 가난한 자들을 위해 마음껏 사용할 때입니다. 더 이상 열린 무덤 속에서 주 예수의 시체를 찾지 마십시오. 부활절 연합행사로 들뜬 조국교회가 들어야 할 메시지는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입니다.

이미 안식 후 첫 날이 되었습니다. 이 시대는 더 이상 계율로 섬기는 시대가 아닙니다. 오직 진리와 영으로 예배할 때가 도래했습니다. 돌이 무덤 문에서 굴러간 지 이미 2천 년이 지나갔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계명,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과 나누십시오. 모든 성도를 사역자로 삼아 그 나라를 이루시려고 성령을 물 붓듯이 부어주신 새 시대가 시작된 지 2천 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조국교회가 해야 할 것은 더 비싼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는 일도, 주 예수의 무덤을 아름답게 단장하는 일도 아닙니다. 민족 교회가 살 수 있는 길은 주 예수의 시체를 발굴해 내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갈릴리에 계실 때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더 이상 텅 빈 무덤에서 정성어린 향유를 들고 바쁘게 찾는 대신에 그가 해주신 말씀이 무엇인지 기억해야 할 때입니다.

부활의 새벽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주님의 말씀을 천사가 되풀이해주고 있습니다.“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부활의 핵심 메시지는 여기에 다 담겨 있습니다.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이, 죽음이, 그리고 부활이 있습니다.

고신교회 성도 여러분, 신자답게 살기 위해 고통을 당한다면, 신자답게 살기 위해 어려움을 당한다면, 신자답게 살기 위해 직장을 제대로 갖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복 받은 자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이것이 은혜의 양면입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것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서 당하는 고난에 참여하는 것도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부활의 새벽에 새롭게 증거되어야 합니다. 예수 믿고 출세하는 것이 은혜가 아닙니다. 예수를 위해 당하는 환난이 은혜입니다. 세상과 타협함으로서 고생을 회피하는 것이 신자가 누리는 축복이 아니라 그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이 신자의 축복입니다.

더 나아가 천사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수난 뿐 아니라 죽음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의 아들이 되신 분은 섬김을 받으려 세상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섬기기 위해 세상을 사셨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삶을 위해 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참 사람의 아들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람의 삶의 목적은 많은 것을 움켜쥠으로서 달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누어줌으로 남을 부요하게 만드는 것이 인생이 걸어야 할 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가진 이는 가진 대로, 없는 이는 빈손으로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가진 것이 있을 때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로 사람답게 살도록 자기의 삶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는 부활의 새벽에 기억해야 합니다. 그의 죽음 외에는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길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죽음을 믿는다는 고백은 우리 자신의 삶을 타인을 위해 내어주는 것으로 생활 현장에서 확인되어야 합니다. 그가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사람들을 위해 내어주었다는 것을 전하는 우리의 전도가 우리의 가진 것을 내어주는 삶으로 확증되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내세를 소망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삶이 여기서 끝난다고 하면, 제 삼일에 다시 살리심이 없다고 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집 평수 늘리고 더 많이 움켜쥐는 사람이, 더 많이 돈을 모으는 사람이 똑똑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비록 부활의 새벽 빈 무덤 속에서 주 예수의 시체를 찾아 향품을 준비하던 여인들이지만, 천사의 증거를 들었을 때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기억했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한다는 것은 지적인 기억이 아닙니다. 그것은 환희와 감격에 벅찬 순간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의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부활은 머리로 시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시인하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주의 이름 때문에 고난을 당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제 삼일에 살리셨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와 함께 수난 당하고 죽더라도 하나님의 정한 시기에 다시 살리심을 믿는 믿음의 삶을 살므로 우리는 응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다시 살리심을 매일 시인하는 삶의 현장은 수난과 죽음에로의 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길만이 부활에로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인정받는 삶의 길은 그 길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없이 면류관을 쓰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그는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의 길은 비록 오늘 고난당하지만, 내일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의 길을 걷는 사람은 고백합니다.“내가 원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며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분의 죽음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 나도 부활하는 것입니다” (3:10-11, 새번역). 이 고백이 부활의 주님을 기억하는 우리 모두의 소원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