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인 신앙

 사람들은 이 세상에 여러 가지 다양한 종교가 있다고 믿고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세상에는 두 가지 종교만 있을 뿐이고 두 가지 신앙만 존재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처럼 실제 존재하는 다양한 종교들은 무엇들인가? 이 모두는 두 종교들의 외피들일 뿐 실체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이런 종교들에서 예배의 대상이 되는 서로 다른 신들도 역사 속에서 제한적으로 불완전하게 경험된 신일 뿐이다. 신학자들이나 종교학자들은 이를 계시라고 한다. 계시란 언제나 시공간적으로 제약된 경험이어서 우리는 계시를 넘어서는 신의 실재를 직관하고 통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구약 성경에는 모세와 다윗 왕 그리고 여러 예언자들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다. 말씀에 기록된 하나님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하나님은 유대인들과 이스라엘만을 배타적으로 사랑하는 민족 이기주의적인 신으로 비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전쟁의 신이요, 만일 이스라엘의 선전 포고에 순순히 항복하지 않으면 남자들은 모두 살해하고 여자들은 종으로 삼으며 전리품들은 마음대로 약탈하도록 허락하는 이스라엘 민족들만 위한 신이다. 심지어 여호와 하나님과 대대로 원수진 아말렉 족속은 노약자나 어린아이들까지 모조리 대량 학살을 하도록 명령한 잔인한 신이다. 지금도 보수적인 유대교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이런 신이라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수천 년 동안 그곳에서 대대로 살아오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몰아내고 어린아이들까지 무참하게 살상하는 전쟁을 정당하다고 믿으며 이 불의한 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이것은 비단 구약 성경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신약 성경에 기록된 가장 중요한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침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되었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다. 만일 이 계시의 외피를 벗겨 안에 담긴 진실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신약 성경을 통해서도 구약 성경의 역사적인 한계와 똑같은 유대 중심주의와 가부장적인 남자 우월주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럼 이런 유대 중심주의는 단지 옛날이야기일 뿐인가? 내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지금도 한국의 대다수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처럼 20세기 들어와 펼쳐지는 이스라엘의 건국 운동을 경이롭게 바라보며 이스라엘 귀환 운동이 예언된 구약 성경 말씀의 성취요 다가올 종말의 징조라고 믿고 있다. 더 나아가서 온누리교회와 한동대학교같이 한국 복음주의적 기독교의 대표적인 교회와 단체들이 앞다투어 돈과 인력을 들여 이 귀환 운동을 돕고 있다. 그러나 귀환하는 유대인들은 당연히 자신들이 정착할 곳이 필요하고 이스라엘 정부는 이 새 이주민 들을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주거와 경작 지역으로 유인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
 
 이들의 정착촌들이 확장되는 것 때문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고향에서 쫓겨나고 조상 대대로 경작해 온 올리브 나무들이 뽑히며 조상들이 물려준 땅이 높은 장벽과 몇 겹의 철조망으로 나뉘어 눈앞에 두고도 들어갈 수 없다. 이런 억울하고 부당하고 불의한 현실에 대해 유대 시오니스트처럼 한국의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도 성경에 예언되었기에 어쩔 수 없다고 남의 일처럼 방관한다. 더욱이 이스라엘의 무자비함과 비열함에 대한 분노와 억울하게 고통당하는 팔레스타인의 이슬람교도들에 대한 동정과 연민을 악령의 미혹이라고 설득하려 든다.

  우리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믿고 아바 아버지라고 불러왔던 그분이 그렇게도 냉혈한 분이셨던가? 입장을 바꾸어서 만일 우리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라면 자신들을 조상 대대로 살던 곳에서 쫓아내고 우리 자녀들까지도 죽이기를 서슴지 않는 무자비한 신에 대해 무어라고 생각할 것인가? 모든 인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편애하는 하나님이란 말인가? 어떤 특정 집단에게 이기적인 신앙이나 종교는 그것이 유대교든 기독교든 이슬람이든 불교든 그것은 오직 종교의 외피들일 뿐이다.

  이기적인 신앙이 바로 그것이다. 이 신자들은 종교의 형태와 종류를 불문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이요 이기적인 집단들이다. 이들은 신이 자신들만 사랑하고 보호하고 축복하고 있다고 믿고 행복해 한다. 남들은 다 불타는 지옥으로 갈 테지만 자신들만은 천국으로 갈 것이라고 믿으니 기쁘고 즐겁지 않겠는가? 심지어 하나님이 불신자들은 지옥의 불쏘시개로 사용할 것이라고 믿을 수 있었기 때문에 중세 교회는 수백만의 소위 마녀와 이단자들을 산 채로 불태워 죽이는 만용을 부릴 수 있었다.

  역설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사악한 행복감에 도취되고 악독한 만용으로 무장했던 파괴적인 그리스도인들과 다른 종교로 개종하면 사형에 처하는 엄격한 이슬람 율법을 고수하며 이 법을 모든 이들에게 강제로 적용하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이나 교권주의자들이 모두 이기주의의 뿌리에서 자라난 동일한 종교의 신자들이라고 여기고 있다. 이 둘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이기주의의 신을 섬기는 자들이다. 이기주의자들은 모두 하나다. 물론 이들이 하나가 되어 평화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서로 싸우고 다투지만 자신과 함께 싸우는 적들이 왜 자신과 싸울 수밖에 없는지도 잘 이해한다. 이들은 모두 힘과 권력을 숭상하고 경쟁과 다툼을 피할 수 없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이런 이기적인 사람들 때문에 세상에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지극히 당연하고 현실적인 문제 해결 방식으로 간주되고 서로 다른 종교들은 대립하고 갈등하며 힘겨루기를 한다. 인간의 끝없는 탐욕과 이기심에 바탕을 두고 있는 자본주의가 전혀 이질적인 것처럼 보이는 공산주의 나라 중국이나 이슬람의 본산지인 아라비아 여러 나라의 시장과 국가 경제를 쥐고 흔들 수 있는 이유도 이기주의의 코드가 그 모든 곳에서 잘 통하기 때문이다.

  이타적인 신앙
 이기적인 신앙의 반대편에 이타적인 신앙이 있다. 이 신앙은 우리 인간의 자기 보존과 이기적 본능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서 타인에게 관심을 갖게 하고 사랑하게 하며 존중하고 배려하게 하는 힘을 주는 신앙이다. 어떤 사물도 중력의 법칙을 벗어날 도리가 없듯이 어떤 인간도 스스로 이기적 본능을 벗어날 수가 없다. 나는 본래 인간에게는 자신의 이기적 본능을 극복하고 타인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사랑이 없다고 믿고 있다. 이 불가항력적인 이기적 본성이 인간의 원죄이고 절망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구원이 있다. 바로 이 이기적 본성을 거스르고 반역하는 사랑이다. 이타적인 사랑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베푸시는 삶의 기적이다. 누구든지 그가 기독교를 믿든 불교를 믿든 이슬람을 믿든 의식적인 무신론자이든 아무런 조건도 보상도 없이 자기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타인을 위해 희생적인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것은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스스로를 속이지 말자. 하나님은 매 주일마다 경건한 모습으로 예배를 드렸을지언정 자신의 피부 빛깔이 희다는 이유로 유색 인종들을 업신여기고 약탈과 착취를 정당하다고 믿었던 영국의 그리스도인들을 자신의 도구로 사용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분은 힌두교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의와 평화를 위해 개인적인 이익과 안일을 다 버리고 전 생애를 바쳐 고난과 희생의 길을 자청했던 간디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셨다. 하나님은 이교도인 간디의 비폭력 평화 운동을 통해 기독교로 포장된 탐욕스럽고 폭력적인 이기주의 신앙의 질곡에서 영국인들을 구원하신 것이 아니었던가? 마틴 루터 킹은 간디의 비폭력 저항 운동 안에서 하나님나라의 의를 발견했고 마침내 불의하고 오만한 인종 차별주의적인 백인 그리스도인들을 그들의 죄와 불의에서 구원한다. 간디의 비폭력 평화 사상은 또한 톨스토이의 평화적인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며 또한 톨스토이가 귀족이라는 자신의 특권과 재산을 포기하고 평범한 서민으로 낮아질 수 있었던 것은 산상수훈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결국 하나님의 영은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교회와 예배의 틀과 형식, 그리스도인과 기독교라는 종교에 구애됨이 없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기독교와 타 종교의 울타리를 넘나들며 정의에 목마르고 평화에 배고픈 모든 이들의 신앙과 양심을 투과하고 채우시며 자유롭게 흐르고 있던 것이다. 매주마다 예배를 드리며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고백했던 영국과 미국의 인종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는 입술의 고백일 뿐이었지만 톨스토이나 간디, 마틴 루터 킹 목사는 그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희생이 체현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너무 개인주의적인 사고에 젖어 있는 나머지 믿는 사람, 안 믿는 사람, 기독교, 비기독교, 타 종교들로 분절되고 추상화한 개념들의 파편들 속에 쪼개지고 찢겨져서 도도히 흐르는 하나님의 역사의 강줄기를 보지도 경험하지도 못하고 있다. 서로 다른 종교의 모습과 틀과 울타리들은 중요한 것도 본질적인 것도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진정한 신앙은 오직 타자를 사랑하는 신앙이며 이 이타적인 신앙은 서로 다른 종교와 제의 형식을 넘나들면서 서로 다른 종교적 배경과 뿌리를 갖고 자라난 사람들을 통해 그 맥을 이어 갔던 것이다. 신앙이란 본래 공동체적이고 역사적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일을 하시는 것이고 우리를 그분의 역사에 동참시키시는 것이다. 그 영의 산맥에 바위로 붙박이는 것이며 그 도도한 강물에 작은 물줄기로 뒤섞이는 것이다. 개인들이 들어가는 천국이란 없다.

  예수를 개인의 구주로 믿었다는 이유만으로 성 프란시스코와 마녀 사냥꾼들이 천국에서 함께 거할 수 없고 흑인 노예들과 백인 노예 상인들이 함께 천국의 식탁에 둘러앉을 수 없으며 본 회퍼와 히틀러가 함께 먹고 마실 수는 없다. 천국은 양들의 나라다. 하나님이 양은 천국으로 염소들은 지옥으로 나누어 보내시듯이 하나님은 마지막 날 이기적인 사람들은 지옥으로 보내실 것이고 이타적인 사람들은 천국에서 만날 것이다. 구원의 확신도 천국 입장의 증표도 모두 타인에 대한 사랑과 배려다. 이것은 가장 확실하고도 분명한 표시다. 그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체현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천국에 들어와 영생 복락을 누리기 위해 예수를 믿는 자들이 함께 만날 곳은 바로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다. 이기적이고 쾌락적인 동기나 비겁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아니라 악마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나도 이기주의자들과 같이 천국에 들어가느니 차라리 나를 사랑하고 나도 사랑하는 이들과 더불어 지옥의 고통을 함께 나누기를 원한다. 천국이 아닌 지옥을 선택한 한 인디언 추장의 이야기는 천국의 비밀을 계시하는 듯하다.

  1500년대 초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이끄는 에스파냐의 원정군이 '신대륙'에 진출할 때의 일이었다. 조상 때부터 평화롭게 살아왔던 자신들의 땅을 침략하고 재물들을 약탈하는 백인들에 맞서 싸웠던 타이노 인디언들은 결국 붙잡혀 처형당하게 된다. 사형을 앞두고 에스파냐 신부들은 인디언들에게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죄를 회개하고 개종하라고 권했다. 그러자 하투에이라는 한 인디언 추장이 "당신들도 그 천국에 가게 되느냐"고 물었다. 그에 대해 신부들은 "그렇다. 너도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기만 한다면 우리들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가는 천국에 나는 절대로 가지 않겠다"는 마지막 말을 남긴 후 화형당했다고 한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천국은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그를 만나고 그와 고통조차 함께 나누기 위해서 지옥이라도 따라가겠다는 사랑과 의리를 지닌 자들의 마음과 마음속에서 경험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명멸했던 숱한 예언자들이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천년 왕국이 임했다고 선포하였고 수다한 무리들이 그 카리스마 넘치는 예언자들을 목숨까지 바치며 따랐지만 이 땅에 건설되었던 빛바랜 천년 왕국들은 모두 모래성처럼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천국은 장소가 아니라 관계다. 우리는 이 세상 어디서도 천국을 차지할 수는 없다. 정의롭고 평화로운 관계는 우리가 이 땅에서 느끼는 천국 경험이다. 이런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천국의 시민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으로 우리의 주님이신가? 이 질문은 많은 보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두려워하는 종교 다원주의자들의 질문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바로 스스로를 복음주의자라고 자처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물음을 던진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의 주님이신가? 당신이 입술로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처럼 그분의 말씀을 실천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당신의 이웃을 당신 몸처럼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거나 그런 삶의 징조들, 싹들, 향기들, 크고 작은 열매들이 나타나야만 한다. 이것은 생명의 법칙이다. 죽은 나무도 나무의 형체를 갖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생명의 조짐이 안 보인다. 우리는 그 미세한 생명의 기운을 통해 죽은 나무와 살아 있는 나무를 구분할 수 있다.

  하나님의 정원은 이미 죽은 나무들의 숲이 되어 버렸지만 우리는 너무나도 오랫동안 죽은 나무를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한 양 스스로를 속이며 살아왔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접붙인 포도나무 가지가 된다면 우리에게는 자연스럽게 이타적인 삶의 열매가 맺히게 되어 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탐욕과 이기심에 종노릇하고 있다면 우리는 필경 포도나무 숲에 던져져 있을지는 모르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생명의 진액을 공급받을 수 없는 죽은 가지임이 거의 확실하다. 하나님은 마지막 날 모든 이들을 심판하실 때에 이기적인 염소들과 이타적인 양들을 나누실 것이다.

  그때에 하나님은 양같이 순하고 착한 사람들에게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 할 것이다. 그때에 착한 사람들은 그에게 대답하여 말하기를 "주님, 우리가 언제,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할 것이다. 그때에 주님이 그들에게 말할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천국은 남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착한 사람들의 것이다. 타인에 대한 사랑과 배려는 이기적인 본능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그분 안에 예수의 영이 그 본능의 힘을 마비시키고 신앙과 양심의 기적을 일으키시기 때문이다. 오직 입술로 예수를 고백하는 사람만을 그리스도인으로 보는 사람은 교리에 눈먼 사람이다. 눈을 뜨고 보라. 수다한 사람들을 통해서 스스로를 나타내시는 예수의 모습을. 누가 진정 참된 그리스도인인가? 마음도 삶도 행동도 모두 이기주의의 노예가 된 채 입술로만 고백하는 거짓된 신자가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자신의 손해와 희생을 무릅쓰고 남을 돕는 그 사람인가? 자기도취적이고 자기 암시적인 구원의 확신은 더 이상 필요 없다. 당신의 영원한 미래는 당신 마음 안에 이미 주어져 있다.

  당신은 어느 무리에 속해 있는가? 양인가 염소인가? 당신이 양의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당신이 알든 모르든 당신이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이미 예수는 당신 안에 살아 계시는 것이다. 구원은 사랑의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천국에 못 들어올 자들도 많고 예수를 안 믿는다고 하는 자들 가운데서도 천국에 들어올 자들이 많으리라. 결국 서로를 사랑하는 자들은 천국으로 모일 것이고 서로를 미워하는 자들은 지옥에서 함께 만나리라. 이미 천국과 지옥은 이 땅에 불붙기 시작했다. 당신은 어디에 속해 있는가?

 

송강호 / 개척자들 부설 코메니우스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