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신학대학원(고려신학교)초창기와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 
 1. 고려신학교의 과도기적 초창기

 고려신학교는 일제 하 신사참배반대로 투옥되어 6-7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8.15 해방이 되자 1945. 8. 17일자 곧 출옥한 지도자 중심으로 1946. 6. 5일자 옛 평양신학교의 전통을 계승하려는 사명을 갖고 옥중에서 특별기도 제목이었던 고려신학교의 설립을 위한 기성회를 조직하고 이어서 1946. 6. 23일부터 2개월 간 하기신학강좌 개최 등 신학교 설립준비를 하였다.
 그 준비과정에서(초창기 약사 참조) 당시 고려신학교 설립을 방해하는 친일파 집단의 교권주의자들과 타협(세속화)하지 않고 고려신학교 설립목적대로 고신총회 소속 목사후보생의 위탁 교육하는 기관으로 1946. 9. 20일자 고려신학교를 개교하였다.

그 후 1964년 제 14회 총회에서 복음병원과 함께 본 총회가 직영하기로 결의함에 따라 부산 송도 소재 토지 중 한상동 목사 명의로 보존등기가 되어 있는 대지와 지상 교사건물 3(594)을 증여받아 1965. 9. 6일자 재단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고려파) 총회유지재단의 설립허가 취득시 무인가 사설 고려신학교를 고신총회가 직영하기 위해 재단에 편입하여 1965. 9. 17일자 설립등기하였다.

즉 고려신학교가 1946. 9. 20일자 개교한 날부터 아래 초창기의 약사 기록대로 경과하여 1965. 9. 6일자 재단법인 설립 허가를 받은 날까지를 고려신학대학원의 과도기적 초창기로 구분하여 기록하였다.

2. 고려신학교의 과도기적 초창기 약사(略史)는 다음과 같다.

(1) 1946. 6. 5 - 고려신학교의 설립기성회 조직(진해 주상주 장로댁에서 주남선 목사, 한상동 목사, 손양원 전도사 주동 )

(2) 1946. 6. 23 - 하기신학강좌 개최(진해에서 6. 23 ~ 8. 20까지 강사 박윤선 박사-수강생 63) (3) 1946. 7. 9 - 경남노회에서 고려신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의하다. (4) 1946. 9. 20 - 고려신학교를 개교하다.(부산진 금성중학교 내-초대 이사장 주남선 목사, 교장서리 박윤선 목사 취임) (5) 1947. 4. 19 - 고려신학교를 부산시 광복동 17번지로 이전하다. (6) 1947. 10. 16 - 고려신학교 1대 교장 박형룡 박사 취임(부산중앙교회당에서, 학생 120)

박형룡 박사 1948. 5. 27일자 고신을 떠나다. ? 그 때 한상동 목사가 충격 받아 1주간 입원하다. (7) 1947. 10. 16 - 교수에 박윤선 박사, 한부선 선교사 부임하다.(한부선 선교사 1945. 11월 내한) (8) 1947. 12. 9 ~ 13 - 경남노회(49)에서 고려신학교의 학생추천서는 1948. 2. 27일자 노회 신학부의 시취합격자에게 교부하기로 하다. (9) 1948. 4. 20 - 고려신학교 입학지원자에게 입학추천서를 교부하지 않기로 결정하다.(합동 34회 총회에서) (10) 1948. 4 - 고려신학교 제2대 교장 박윤선 박사 취임하다.(1960. 9. 13일자 교수회의 마지막 사회, 10월 사임) (11) 1948. 5. 27 - 고려신학교 교장 박형룡 박사 ? 신학교육 문제로 이사회와 대립함으로 교장 사임 결정(1948. 8. 15 사임)

(12) 1948. 9. 21 - 경남노회에서 고려신학교 인허를 다시 취소하기로 하다.(49회 임시노회시) (13) 1948. 12. 1 - 고려신학교 총무에 손양원 목사 취임하다.(1950. 9. 28 순교) (14) 1948. 12. 7 ~ 11 - 경남노회 제 50회에서 지난 9월 제 49회 임시노회에서 결의한 고려신학교의 인허 취소한 건은 위법임으로 다시 인정하기로 번복 결의하다.

(15) 1951. 3. 23 - 고려신학교 초대이사장 주남선 목사 서거하다. (16) 1952. 2. 3 - 고려신학교 제2대 이사장 한상동 목사 취임하다. (17) 1954 - 미국기독개혁파교회 알스베리 선교사 소속회의 30,000불 지원받아 부산 송도부지 등 매입, 건축하다. (18) 1954. 4. 1 - 고려신학교 교수 박손혁 박사 취임하다.(1962. 10월까지) (19) 1955. 9. 1 - 칼빈대학에 신학과, 종교학과, 영문학과, 철학과 4과 개설(부산 서구 감천1523번지에서 개교)

(20) 1955. 9. 10 - 고려신학교 예과4년을 칼빈대학으로 개편하다.(학장 한명동 목사 취임) (21) 1956. 4 - 고려신학교 별과 입학자격규정을 제정하다. (22) 1956. 4. 1 - 고려신학교 교사 3594평을 신축 이전하다.(1953. 3. 8 착공, 1955. 3. 8 완공. 부산 광복동에서 부산 서구 암남동 34번지 신축교사로 이전)

(23) 1956. 9. 20 - 고려신학교 개교 10주년 회고 - 과거를 회개, 개혁운동, 새도약 선포하다.(박윤선 교장 주동) (24) 1957. 4. 1 - 고려신학교 교장제도를 교수회장제로 변경하다.(초대회장에 한부선 선교사 취임) (25) 1958. 9. 24 - 고려신학교 입학조례 - 1956년 이전으로 환원하다.(8회 총회록 164페이지)

(26) 1959. 9. 25 - 고려신학교 별과 예과 2- 별예과의 입학자격을 설정하다.(9회총회록 219페이지) (27) 1960. 9. 23 - 고려신학교 총회직영 건 - 한상동 이사장의 보류청원은 받기로 하다.(10) (28) 1960. 12. 13 ~ 15 - 합동총회 개최 - 합동취지문 및 선언문 중 고려신학교 문제 포함하다.(10회 총회록 294페이지) (29) 1960. 12. 13 - 합동총회 회집결정시 앞서 박형룡, 박윤선 박사 사임의 공간을 보완하기 위해 합동추진하기로 하다.

(30) 1961. 9 - 고려신학교 교수에 홍반식 박사, 오병세 박사 취임하다. (31) 1961. 12. 18 - 서울 소재 신학교를 본교로 하고 사립 고려신학교는 분교로 하되 교수회장제는 윤번제로 하기로 하다. (32) 1961. 12. 18 - 고려신학교 3대 교장에 박손혁 박사 취임하다. (33) 1962. 6. 29 - 총회야간신학교를 칼빈신학교로 개칭하다.

(34) 1962. 10. 17 - 고려신학교 복교선언(한상동 목사와 이사회와의 합의 하에) - 합동시 분교가 된 것을 합동 이전 고려신학교로 복교(환원총회에서) (35) 1962. 11 - 고려신학교 3대 이사장에 이성옥 목사 취임하다. (36) 1962. 11. 5 - 고려신학교 교사건물 3동 등기하다.(암남동 34번지 198, 35-1번지 198, 37번지 198- 3594)

(37) 1963. 3. 2 - 칼빈학원 제 2대 원장 이근삼 박사 취임하다. (38) 1963. 6 - 고려신학교 제 17회 졸업생들이 총회의 강도사 고시에 응했으나 응시자격 불허하다. (39) 1963. 6. 26 - 사립학교법 제정 공포하다.(시행령 1차 개정 1965. 11. 10일자 공고) (40) 1963. 9. 17 ? 고신 제 13(환원총회) 개최하다. (41) 1963. 12. 2 - 고려신학교장 제 4대 홍반식 박사 취임하다. (42) 1963. 12. 12 - 고려신학교(고신대학)후원회 조직하다.(회장 양진환 장로)

(43) 1964. 1 - 고려신학교 제 4대 이사장 한상동 목사 취임하다. (44) 1964. 2. 28 - 칼빈학원을 고려신학교에서 인수하고 고신대학부로 개편 운영하기로 하다.(고신대학으로 개칭, 학장에 홍반식 박사 취임하다.) (45) 1964. 9 - 강도사 고시 때 정치과목 고시하고 목사 고시는 강도사 인허 1년 후 고시하기로 하다.

(46) 1964. 9 ? 14회 총회에서 고려신학교를 복음병원, 고려고등성경학교와 같이 총회가 직영하되 목사후보생의 위탁교육기관으로 그 설립목적 정신을 승계하여 고려학원 이사회를 새로 조직 운영하기로 하다.(학교부지 및 신축건물 3? 소관 재산을 관계자의 기부채납 수속각서 받아 처리, 총회록 64페이지) (47) 1964. 12. 7 - 고려신학교 제 5대 교장에 오병세 박사가 취임하다.

(48) 1965. 9 ? 15회 총회에서 재단법인 총회유지재단의 정관제정 승인 - 고려신학교 재산인수분과위원회 구성하여 위임하다.(수습 인계위원 5? 총회록 124페이지) (49) 1965. 9 ? 15회 총회에서 고려신학교를 총회직영 후 첫번째 현황 보고한 것 다음과 같다. 교직원 23, 재정결산 3,440,364. 학생수 - 대학부 91,신학부 68, 연구과 9, 청강1, 합계 159

(50) 1965. 9 - 고려신학교 정교수는 총회 정회원으로 받기로 하다.(규칙부로, 15회 총회록 107페이지)(51) 1965. 9 - 성서공회 자문위원으로 오병세 박사 추대되다.(52) 1965. 9. 6 - 고려신학교를 재단법인 총회유지재단에 편입하여 법인설립허가를 받다.

법인인가 이후 참고자료

? 1965. 12. 16 - 고려신학교 제 6대 교장에 이근삼 박사 취임하다. ? 1966. 5. 20 ? 고려신학교 설립 20주년 기념행사 거행하다. ? 1966. 9 - 고려신학교 졸업장에 총회장 명의 - 서명날인하기로 하다. ? 1966. 9 ? 학교법인설립 조직변경 건 - 실행이사회에 일임키로 하다.(실행이사 : 송상석 목사, 한상동 목사, 박손혁 목사, 지득용 장로, 총무처 이재술 장로 - 5)

? 1966. 10 - 고려신학교 제 5대 이사장에 송상석 목사가 취임하다. ? 1966. 12. 16 - 고려신학교 제 7대 교장에 홍반식 박사가 취임하다. ? 1967. 5. 17 - 사립학교법 시행령에 의거 재단법인 총회유지재단에 편입되어 있는 고려신학교 재산을 학교법인 고려학원으로 이관하여 조직변경 허가 받다. ? 1967. 5. 31 ? 학교법인 고려학원 초대 이사장에 한상동 목사로 등기하다. ? 1967. 9 ? 17회 총회에서 학교법인 고려학원의 조직변경 건 위임받은 실행이사회 허락없이 불법 조직 등기한 이사진(사조직 이사)은 총사퇴하고 사과 받아 처리하되 이사회를 새로 조직하여 교체 등기하기로 가결하다. ? 1967. 9. 5 ? 학교법인 고려학원 제 2대 이사장에 윤봉기 목사가 취임하다.(고려신학교 제 6대 이사장, 1968. 9. 20 사임) ? 1967. 9 - 고려신학교 전수과를 다시 존속키로 하다.(17) ? 1967. 9 ? 17회 총회에서 고려신학교 1968년도 예산 5,625,000원 승인하다. ? 1968. 11. 12 ? 학교법인 고려학원 제 3대 이사장에 송상석 목사 취임하다.

(이하 생략)

3. 고려신학대학원(고려신학교)의 법적 초창기

고려신학교는 과도기적 초창기를 거쳐 위 1965. 9. 6일자 재단법인 총회유지재단의 설립인가를 받아 경영하다가 1965. 11. 10일자 사립학교법의 시행에 따라 다시 1967. 5. 17일자 학교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고려학원으로 조직 변경 허가를 받고 이어서 1968. 12. 18일자 설립등기하였다. 즉 무인가 사설 고려신학교를 고신총회 직영 학교법인 고려학원 소속기관으로 법적인가를 받음으로 비로소 정규대학으로 경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허가를 받은 후 곧 고려신학교에 군종장교후보생 지정학교로, 대학동등학력인정학교로, 고려신학대학으로, 고려신학대학원 등의 설치인가를 받아 경영하다가 1980. 10. 2일자 고려신학대학을 일반 사회 대학과 같은 고신대학(의학과 신설)으로 개편하여 인가를 받았다.

이것은 고려신학교(고려신학대학)의 설립목적 이탈로서 코람데오 고신교단의 역사적, 정책적, 행정적으로 결정적인 오류이다. 고로 제 30회 총회 석상에서 당시 책임총장이 사과하고 이를 사후승인한 바 있지만 그 후유증은 계속되고 있는 듯 하나님의 교단적인 채찍은 계속 내리고 있다고 본다.

이제 법적 초창기라 함은 1965. 9. 6일자 재단법인 고신 총회유지재단에 편입 설립인가를 받은 날부터 학교법인 고려학원 설립등기를 거쳐 1980. 10. 2일자 고신대학으로 개편한 그날까지를 고려신학대학원의 법적 초창기로 간주하여 기록하였다.

4. 법적 초창기 이후의 약사는 아래와 같다.

? 1968. 2. 28 - 고려신학교를 대학에 준한 각종 학교로 지정받다.
? 1969. 3. 27 - 고려신학교 제 8대 교장에 한상동 목사 취임하다.
? 1969. 7. 10 - 고려신학교를 군종장교후보생 지정학교로 인가받다.
? 1969. 9. 6 - 고려신학교를 대학동등학력인정 지정학교로 인가받다.
? 1970. 12. 30 - 고려신학교를 고려신학대학으로 인가받다.(신학과 40) - 신학대학원 연구과정
? 1972. 3 - 고려신학대학원 부설 교회문제연구소장 이근삼 목사 취임하다.(1982)
? 1974. 4. 3 - 고려신학대학 제 9대 학장 홍반식 목사 취임하다.
? 1974. 8 - 고려신학교 건물 1,700평 건축(1975. 8. 15 준공)
? 1975. 4. 3 - 고려신학대학 제 10대 학장 오병세 목사 취임하다.
? 1976. 12 - 고려신학대학에 기독교교육학과 신설 인가
? 1978. 1 - 고려신학대학에 종교교육학과 신설 인가
? 1978. 2. 15 - 고려신학대학대학원 인가받다.(신학석사 20, 문학석사 16)
? 1978. 9. 25 ? 28회 총회에 준군목제도 두기로 하다.
? 1979. 4. 1 - 고려신학대학 학장 4(고려신학교 11) 이근삼 박사 취임하다.
? 1979. 4. 1 - 고려신학대학원장 오병세 박사 취임하다.
? 1979. 9. 25 ? 29회 총회에서 의과대학을 현 고려신학대학을 개편하지 않는 조건으로 추진키로 하다.
? 1980. 9. 25 ? 30회 총회, 고려신학대학을 일반 대학인 고신대학으로 개편하다.(명칭변경 건 학장이 사과하다)

목회신학대학원 인가 추진키로

? 1980. 10. 2 - 고신대학에 의학과 신설인가 받음
? 1980. 11. 3 - 고신대학에 신학대학원 설립인가 받음(80)

연구과정은 존속키로 하다.

? 1981. 2 - 고신대학원 제 12대 원장에 오병세 박사 취임하다.
? 1981. 11. 20 - 고신대학원 제 13대 원장에 홍반식 박사 취임하다.
? 1981. 11. 25 - 신학대학원에 신학과 80명 증원(160)
? 1988. 9 ? 38회 총회에서 고신대학과 고려신학대학원을 분리 운영하기로 하다.(학사, 재정, 행정, 교수, 기타 ? 1988. 8. 24일자 이사회 결의)
? 1993. 3. 1 ? 일반 고신대학을 고신대학교로 교명 변경인가 받다.
? 1996. 4. 26 ? 고려신학대학원 천안캠퍼스 건축 기공식 ? 건축하여 1998. 9. 4일자 천안으로 이전, 인가받다.

5. 드러나지 않은 일화

첫번째, 사설 무인가 총회직영 고려신학교로 경영하자는 안과 정부의 인허가를 받아 신학대학으로 경영하자는 안의 대립 문제이다.

1946. 9. 20일자 고려신학교 개교일로보터 1967. 5. 17일자까지 약 21년간 고신총회가 직영하는 그대로 계속 경영하자는 측(한상동 목사 중심파 ? 법인 허가 반대)과 사립학교법 시행 및 시대의 조류에 따라 신학대학의 설립 허가를 받아 경영하자는 측(송상석 목사 중심파 ? 법인 허가 찬성)으로 갈라져 특히 1964년 제 14회 총회시 고려신학교를 총회가 직영하기로 결정한 날부터 1967. 5. 17일자 학교법인 고려학원의 설립 허가일까지 약 3년간 내분이 있었다.

그 경영안의 대립은 찬반 양측의 대표뿐만 아니라 총회 산하 각 노회 간, 재단 이사회 간, 고려신학교 교수 간까지 양분 - 의견대립이 매우 심했다.

그간 제 14회 총회시 고려신학교 재산을 편입하여(한상동 목사 명의로 등기된 재산을 증여 각서 처리) 재단법인 총회유지재단의 설립 허가를 받아 총회가 직영하다가 이어 1967. 5. 17일자 학교법인 고려학원으로 조직 변경할 때 고려신학교 재산 그대로 이관 편입하여 당국의 허가 받아 총회가 직영하였다.

그 후 1965년에 제 15회 총회에서 고려신학교, 복음병원 재산인수분과위원회 구성 ? 수습 인계위원 3명과 분과위원 5명을 선임 위임하여 당시 원만히 수습하고 학교법인의 설립 허가를 받음으로 인허가 분쟁문제가 해결되었다.( 총회록 제 15123 ~ 124페이지)

ø 위 내분 해결시 당시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 위 허가문제 찬반 양파가 갑자기 정반대로 입장이 변경되었다. 그 사유는 소위 1967. 5. 17일자 학교법인 초대이사장 한상동 목사 외 4명이(허가반대파) 불법으로 허가 받아 등기하고 이를 반대, 항의한 송상석 목사가(허가 찬성파 대표) 1967. 9. 5일자 송상석 목사 외 4명의 새 이사로 갱신하므로 찬반 정반대로 변경된 셈이다. 이는 당시 두 분이 양 파 대표 및 분파 대표의 책임자임을 보여준 사건이다.

ø 허가 반대측 주장은 만약 설립 허가 받아 경영하는 경우 90% 이상 정부의 간섭(학사, 인사, 지도, 감독, 감사 등)을 받음으로 자연 자영권이 없고 신학교 설립 목적대로 경영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정부 보조 약간 받으면 그 이상의 부담과 피해가 있다는 것이다.(“” : 외국의 신학교를 총회 직영 ? 사립대학의 관선 이사 파견)

허가 찬성측은 - 무인가 사설 신학교로서는 장래 발전이 없고 - 시대의 조류에 따라 사립학교법대로 인허가를 받아 경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관계 절차를 거쳐 당국의 인허가를 받아 경영하므로 분쟁사건을 해결하였다.

두번째, 법인에 고려신학교 재산의 증여 문제다.

당시 고려신학교 재산(토지, 건물)은 거의 한상동 목사 개인 명의로 보존등기가 되어있었다.

? 1차적으로 1946. 9. 20일자 고려신학교 개교 이후 사설 무인가 고려신학교로 유지 경영하다가 195919회 총회시 총회 직영문제가 제안되어 추진 중 제 101960. 9. 23일자 총회시 고려신학교 운영이사회 이사장 한상동 목사의 총회직영 보류 요청의 의거 ? 총회에서 허락한 바 있다.

? 2차적으로 1차의 애로와 난관을 거쳐 4년 후인 1964년 제 14회 총회에서 복음병원과 함께 고려신학교를 본 총회에서 직영하기로 결의함에 따라 위에서 언급한대로 당시 고려신학교 재산인수분과 사건수습인계위원에게 위임하여 고려신학교 재산증여 각서 ? 증여등기하고 이어 총회가 직영하므로 해결되었다.

세번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법인설립 인허가를 받는 과정에서 말할 수 없는 애로와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인허가 당국의 담당 적임자를 신자 또는 권위자를 만나게 해주시고 또 내부, 주변관계, 사건 사고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관계협력자와 지인을 붙여 주셔서, 말할 수 없는 애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 수습 해결 성사시켜 주신 실례를 몇 가지만 아래와 같이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1) 각종 인허가 받는 데의 애로와 난관이란?

당시 인허가를 받으려면 사회 통례로서 당국의 빽이나 관계부정, 뇌물로 성사되는 애로가 있었지만 필자는 그 수단을 회피하고 오로지 하나님 빽만 믿고 끝까지 무릎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 소기의 목적달성이란? 필자가 거창고등학교 재직 시 경험한 것으로서 당국 담당자와의 법적 기() 싸움으로 법적 유권해석자료 제공, 질의응답, 담당자의 지도 코치 아래 조복, 공문서 처리로서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2) 교단의 법적 초창기를 경과하는 과정에서 필자가 교단적, 기관적으로 잊을 수 없는 인물 네 분을 아래와 같이 소개, 기록한다.

? 고신 법적 초창기에 고려신학교 건물 3, 복음병원 구 건물, 간호학교 교사신축에 이종호 장로(이종철 선교사 친형)의 공로가 크다. 이종호 장로는 신실한 건축업자로서 정당한 청부로 시공할 수 있지만 교단 직영을 위해 공사현장감독의 최저노임만 받아 희생적으로 시공함으로 준공 끝에는 그 노임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공로가 크다.

그 후에도 공로위로금을 지불하지 못했다. 또한 필자가 잊을 수 없는 것은 필자가 복음병원에 취임할 때 거창 소재의 가옥 처분한 재산을 병원 뒷 논으로 대토(代土)한 것에 대해 담보 보증한 것을 날리고 필자가 퇴직 시 전세 얻을 보증금이 없어 이사하지 못하고 고민하는 것을 이장로님이 이를 탐지하고 그 일부 빚을 체당(替當)하여 주신 것이 있었는데 그 이후 이장로님이 미국 거주 중에 별세하므로 100불 밖에 갚지 못한 것을 죄송하게 생각한다.

? 고신 교단 위해, 특히 고려신학교, 복음병원의 초창기에 재정난 시 총회, 이사회 운영회의 때마다 물심양면으로 희생 봉사한 당시 부산남교회 박봉화 장로의 공로는 두고두고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박장로님의 은퇴 후 생활이 어려웠으나 교단적, 기관적으로 그 공로를 위로한 적이 별로 없다 한다.

? 앞에서 언급한 송도의 총 부지(54필지 15,000여 평)2/3부지가 농지개혁법에 저촉되어 부지 회수확보가 불가할 때 뜻밖에 복음병원 이웃 거주 박성춘이란 자(불신자, 해병대 출신, 자칭 정의파)를 붙여 주셔서 기적적으로 단시일 내에 부담 없이 목적 달성하였다. , 총 부지 2/3 회수, 병원 입구 도로변 약 15평 주막건물주(박원조 점유) 명도 철거, 농지소송 취하, 부지 경작자 10여 명의 인우 증명 명도처리, 농지위원회 조직처리에 절대적 공로가 있었다. 그러나 농지회수 보상금, 농지경작자 보상비, 건물명도철거 보상비, 박성춘의 공로배상금은 지불하지 않고 단지 활동비, 회의경비만 부담한 것뿐이라 당시 필자가 관계 피해자로부터 배은망덕이란 욕을 먹었다. 이는 필자가 사임 후 그 보상금을 지급하지 않은 죄책감에 지금도 시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병원 주변 관계자로부터 당시 필자가 비자금을 조성하여 많은 보상금을 지불한 것으로 오해, 의심하고 있다는 말을 최근에 들었는데 당시 그 보상금 미불과 필자의 공로금까지 받지 않은 것을 후회하면서 그 억울함을 밝히고 싶은 심정에서 본의 아닌 것을 기록하게 되었다.

? 장 박사를 존경하는 부산비닐회사 양재원 회장(불신자, 필자의 고향 친구, 해운대중고등학교 재단이사장)의 소개로 병원장 장박사 사택 1동을 신축 제공(럭키금성 구회장 동업)한 것과 필자가 병원 재직 8년간 물심양면으로 장박사를 도와주신 것은 잊을 수 없다. 또 그는 필자가 병원 사퇴 후 쉬고 있을 때, 필자가 고신교단과 복음병원을 위해 희생한 공로자를 천대한다고 목격 분개하면서 해운대중고재단과 서울 중석상사 상무로 불러 5년간 근무하게 도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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