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1일 불교계의 유명한 스님이 열반(별세)하였다. 언론에서는 그 사실을 대서특필로 다루었다. 법정 스님에 대한 신문 기사는 ‘위중하다’는 내용과 함께, 3월 6일부터 등장하였다. 지난 해 김수환 추기경 선종(별세)과 함께 개인 인물로서는 대단히 많은 양의 보도가 이루어졌다.

3월 6일 병상에서의 보도부터 다비식을 마친 13일 이후에도 언론의 보도는 계속되었다. 3월 6일부터 3월 26일 사이에 보도된 분량은 신문의 대형 판으로 치면 37개 면을 차지하는 정도가 된다.

이 기간에 국민일보, 경향신문, 동아일보, 문화일보, 서울신문, 조선일보, 중앙일보, 한겨레, 한국일보, 한국경제 등 10개 중앙일간지가 보도한 횟수는 137회이며, 전체 면적은 70,003㎠를 차지하고 있다. 보도형태를 보면, 사설이 6회, 칼럼이 14회, 일반보도가 117회를 기록하고 있다.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한 곳은 조선일보로 12,611㎠를 보도하고 있고, 두 번째는 서울신문으로 8,705㎠를 보도하고 있으며, 세 번째는 중앙일보로 8,309㎠를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중앙일보의 경우 베를리너 판으로 타 신문들이 대형판인 것과 비교하면, 약 30%가 줄어든 비율로 볼 때, 서울신문보다 많이 보도한 셈이 된다.

그 외에도 한국일보가 8,255㎠를 할애하고 있고, 한겨레가 8,145㎠를 보도했으며, 경향신문이 7,979㎠를 보도하였고, 동아일보가 7,502㎠를 보도하였다. 그밖에도 비교적 적게 보도한 신문으로는 문화일보가 4,206㎠를 보도하였고, 한국경제가 3,260㎠를 할애하였고, 국민일보는 1,031㎠를 보도하고 있다.

사설로도 보도한 신문은 동아, 문화, 조선, 중앙, 한겨레, 한국일보 등이다. 외부와 내부의 칼럼을 게재한 경우로는 한국일보가 4회로 가장 많고, 서울, 조선이 각각 3회씩, 경향이 2회, 동아와 중앙이 각각 1회씩이다.

한 종교 지도자가 우리 사회에 던진 화두는 ‘무소유’였다. 이 말에 언론은 깊이 매료되었고, 어느 종교 지도자의 죽음보다도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보도에 열중하였다. 언론은 무소유를 증폭시켰고, 그 보도는 우리 사회에 무소유 신드롬을 만들어 내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보도는 뭔가 과유불급(過猶不及)과 같은 묘한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고인은 당신의 마지막 가는 길에도 모든 것을 남기지 말라고 하여, 의례를 간소화하고, 절차를 생략하고, 심지어 당신이 출판한 책에 대해서도 절판을 당부하는 등 ‘빚’을 남기지 말라고 부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들의 보도는 고인의 뜻을 생각했다기보다 호들갑을 연상시키니 웬일인가?

‘무소유’는 한 사람이 남긴 삶의 행적으로는 아름다운 덕목임에 틀림없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무소유의 삶을 살기는 어려운 것이다. 오히려 소유가 있음으로 나눔도 가능한 것이고, 베품의 순환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론의 경쟁적 보도의 의미는 어디에 두고 있는 것인가?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한 종교인이 자신에게 주어진 종교적 가르침에 충실하려 한 것을 인정하기 위함으로 본다. 둘째는 그럼으로 이를 개인과 종교인들이 닮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본다. 셋째는 우리 사회의 ‘과소유’에 대한 경종을 울리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

언론으로서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37개 면에 달할 정도의 내용들을 분석해 보면, 이와 같은 의미를 충족시키기에는 불필요한 내용들이 많다. 이를테면, 고인의 젊었을 때 모습이라든지, 출판사들의 동태라든지, 암에 왜 걸렸느냐, 신문을 넣어 준 40년 전의 소년을 찾는다든지 하는 내용들은 사족(蛇足)에 지나지 않는다.

적어도 고인의 고매한 뜻에 동의하여 보도한다는 원칙이 있다면, 사소한 주변 이야기를 보도거리로 삼아, 억지로 지면을 채우는 일은 없어야 한다. 독자와 국민들이 알고자 하는 것은 훌륭한 지도자들의 삶의 내용이지, 시시콜콜한 주변 이야기를 모두 알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또 한 가지는 종교인에 대한 보도의 균형이 늘 기울어져 있다. 예를 들어 지난 해 종교계에서는 제법 이름난 지도자들이 별세하였다. 천주교의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별세)하였고, 기독교계에서는 정진경 목사, 김준곤 목사가 소천(별세)하였다. 그 때의 보도를 비교해 보아도, 한쪽에 너무 일방적임을 알 수 있다.

물론, 모든 종교 지도자를 천편일률적으로 다루기에는 여러 차이가 있겠지만, 그래도 기독교계 지도자들의 한국교회 발전과 사회적 영향력은 어느 종교 지도자 못지않은 것을 감안하면, 너무 불공정한 것이다. 당시의 두 분 목사의 보도를 보면 각 신문마다 단신 기사 정도로 다루고 있는데서 그 실증을 찾아볼 수 있다.

이 분들은 ‘무소유’나 ‘바보의 삶’ 못지않은 정직과 성결한 삶을 살았고, 사회 각계에 수많은 지도자를 배출시킨 분들이다. 그런데 언론의 보도를 보면 너무 제한적이고, 지극히 지면을 아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각 종교에 대한 균형 잡힌 보도가 필요하다.

언론의 보도에도 일종의 원칙과 철학이 있어야 한다. 법정 스님에 대한 보도를 보면서, 그 분이 개인으로 혹은 종교인으로서 훌륭한 덕목을 보여 준 것에 대한 예찬도 중요하지만, 언론들이 신드롬을 만들어 내고, 그것에 스스로 도취되어 헤어나지 못하는 듯한 태도는, 오히려 ‘본받음’에 대한 식상함이 들고, 언론에 대해서는 신뢰감이 떨어진다.

무조건 경쟁적으로 언론에서 많이 보도한다고 하여, 언론 수용자들이 모두 좋은 의미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언론 수용자들에게도 뭔가 여백과 같은 것을 남겨 주어야 한다. 그저 보도의 홍수를 통해 ‘보았으니 됐지’라는 식보다는, 공감의 여지를 통해 음미의 기회를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