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서 5장 강해(12)
하나님의 사람은 주의 말씀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4-1 장한국 목사.jpg<=[강해 장한국 목사 주사랑교회 담임]‘일곱 해의 느부갓네살왕의 징벌은 바벨론과 왕 자신에게 해당되면서 또한 종말에 있을 큰 바벨론을 계시한다. 7년 환란가운데서 배도하여 바벨론으로 멸망할 수도 있고, 깨닫는 자는 음녀인 큰 바벨론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7년 환란 중에 순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영광을 입혀주시는 그런 사랑의 7년 환란이 되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환란을 하나님의 로 알아서 받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다니엘 5장에서느부갓네살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권면 역사 속에서도 깨닫지 못할 때는 징벌로써 돌이키게 하신다. 그렇게 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고 계속 대적하고 망령되게 행동할 때는 거부한 자에게는 사랑의 역사는 끊어지는 것이다. 그에게는 공의의 심판만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6장에 나온다. 우리가 초보에서 벗어나서 완전한데 나아가야 된다. 하늘의 신령한 역사를 맞보고 성령을 받고 능력과 은사를 다 맛보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에 타락을 하면 다시 회개 할 수 없는 것이다. 9절에 하늘에서 자주 내리는 비를 받아서 합당한 채소를 내면 복을 받고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불사름이 된다.

자주 내리는 비는 하나님의 징벌의 비다. 세상으로 타락한 자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체험했는데 신령한 은혜를 맛본 자가 타락하면 타락한 그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채찍과 징벌의 비 같은 역사로 때려서 그것에 대해서 올바로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면 합당한 채소 같아서 복을 받는다. 그러나 오히려 원망하고 불평 하는 것으로 나아가면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것이 되어 불사름으로 끝나고 만다. 공의의 심판으로 끝나고 만다.

1. 4장에서 5장으로 계시 연속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느부갓네살왕을 징벌을 통해 낮추시고 깨우쳐서 돌이키게 하셨다. 그리하여 느부갓네살은 모든 천지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왕위를 세우기도, 폐하기도 하심을 깨닫고 그의 입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었다. 그리고 느부갓네살왕이 돌이키게 된 이후에 종전보다 더 많은 영화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의 아들 벨사살왕은 언제 왕위에 등극했는지 기록도 되지 않았고 교만한 느부갓네살을 돌이키게 하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망각하여 하나님을 버리고 망령된 행위를 함으로 인하여 결국 바벨론은 멸망되어 메대 파사로 갈라지고 만다.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 바벨론의 종말이요, 또 마지막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끝까지 저버리면 결국 공의의 심판을 받는 악인의 종말에 대한 계시임을 깨달아야 한다.

4장은 하나님의 사랑의 징벌을 통해서 돌이키는 역사이고, 5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하게 되는 벨사살은 공의의 심판을 받아 멸망되어지는 것이다. 벨사살이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쓰여 지는 예루살렘 성전의 금, 은 기명(2, 3)을 가져다가 자기의 잔치자리에서 함께한 자들과 같이 술을 담아 마신다. 참으로 가증한 행실이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어떠한 교훈을 주시고 있는가를 잘 깨달아야 한다. 성전은 교회를 의미하며 교회 안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그릇들임을 계시한다.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딤후 2:20,21).

우리는 우리자신이 예루살렘 성전, 즉 주님의 교회에서 그릇임을 알고 거기에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 같은 합당한 것이 담겨져야 한다. 요한계시록 17, 18장에서 음녀가 마시는 술잔에는 가증한 것으로 가득 차있다고 했다. 이것은 오늘날도 동일한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종말의 마지막 때에도 동일하다. 요한계시록에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나온다.

일곱 대접 공의의 심판이 나온다.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을 받지 않고, 계속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시는 것을 끝가지 거부하고 자기 속에, 즉 그릇에 악이 가득한 자들에 대해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공의로써 진노의 대접을 쏟는 것이다.

2. 손가락 출현하여 글을 씀
벽에 나타난 글이 아람어인데도 바벨 박사들은 읽지 못한다. 오늘날 성경 진리, 예언 말씀 왜 못 깨닫는가? 에베소서 26절에 그리스도의 것으로 하늘에 앉힌바 된 자가 천상문화(天上文化), 천상법도(天上法道), 천상환경(天上環境), 천상(天上)의 하나님의 뜻과 이를 이루시는 역사를 알 수 있다. 출애굽기 3118절을 보면 하나님의 친수(親手)로 돌 판에 하나님의 십계명을 썼다. 애굽에서 구원해 냈지만 돌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 강퍅하고 완악한 그들, 즉 돌 같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주어서 하나님을 섬기게 한다는 것이 돌에 글을 쓴 것이다.

86~8절에 예수님이 친수로 글을 쓰신다. 예수님의 손가락으로 글을 쓴 것이다. 땅에다 글을 쓰신 것은은 우리 마음 이고 우리 마음 판에 성령을 통해서 기록하신다. 새 언약이다. 새 언약으로 하나님의 법을 우리 마음, 생각에 성령으로 새긴 것이다. 이것이 새 언약이다.

회벽에 글을 쓰신 것은 벨사살 왕이 하나님 앞에 망령되이 하나님을 우롱하고 가증하게 악이 꽉 찬, 악으로 관영한 그에 대해서 하나님이 심판한다는 것을 쓰는 것이다.‘너의 죄가 가득차서 이제 하나님의 심판이 이르렀다는 것을 알려준다. 먼저는 십계명,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하다가 그것으로는 죄를 없이 할 수도 온전히 섬길 수도 없으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자신이 죄를 없이하는 대속제물이 되신 후에 예수 믿는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어 성령으로 하나님의 법을 우리 마음 판에 새기는 것이다.

주의 말씀을 믿는 자에게 주의 말씀을 그 마음에 새기는 것이다. 이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주의 말씀의 편지가 되는 것이다. 주의 말씀에 일치된 심령이 되어 질수록 말씀에 일치된 속이 계속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꽉 차게 되면 그리스도의 형상이 되어 지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와 같은 공동 상속자로 하나님의 아버지의 모든 것을 받아 누리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렇게 사랑하지만 이것을 끝까지 거부하면 벨사살 왕같이 멸망, 심판으로 나타난다. 벨사살이 안색이 바뀌고 허벅지가 떨리고 골절이 풀리고 글자를 아는 사람을 찾으나 아무도 없다. 그때 태후가 들어와 다니엘을 천거한다.

3. 이제 다니엘을 부르소서(10)
태후는 느브갓네살 왕 때 다니엘이 왕의 꿈을 해석해준 것을 알고 있기에 다니엘을 추천한다. 벨사살이 벽의 글을 해독하면 다니엘을 셋째 치리 자로 삼겠다고 하고 예물과 상급 주겠다고 했지만 다니엘은 상급과 예물을 거절한다. ? 다니엘은 벨사살왕이 불러서 온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 부르심으로 회벽의 글을 풀어 벨사살에게 알리러 온 것이다.

하나님이 쓰신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종만 알 수 있으니 그것을 해석해서 알려주고자 온 것이다. 18절부터 22절가지 4장에서 일어난 선왕에게 있었던 일을 다 고한다. 느부갓네살이 일곱 때의 짐승같이 징벌로 바로 세워 그를 더 영화롭게 했다. 왜 이렇게 설명하나? 하나님이 느부갓네살에게 한 일은 벨사살 왕에게도 해당되는 것으로 동일한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알려준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어느 특정된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모두에게 교훈으로 주는 것이다.

4. 메네 메네 데겔 우파르신
5:24 이러므로 그의 앞에서 이 손가락이 나와서 이 글을 기록하였나이다. 하나님께서는 벨사살에게 끊임없는 은총과 긍휼을 베풀어 주셨으나 벨사살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도리어 원수로 여기며 망령되이 행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신다.

천국과 지옥으로 보내는 심판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율법대로 깨닫고 감사하며 살았는지, 아니면 한없는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그 모든 것을 가지고 패역 하는 데에 사용하고 하나님을 원수로 여기며 살았는지를 심판하시는 것이다. 이 공의의 심판에 의해 벨사살에게 심판의 글이 쓰여 진 것이다.

5:25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란 글자는 히브리어는 아니다. 사실 아람어에 근거하고 있으나 아람어라면 바벨론의 박사들이 당연히 읽었을 텐데 아무도 읽지 못한 것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말로는 깨달을 수 없는 글들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하나님은 왜 아무도 알아 볼 수 없는 글로 써 놓으셨을까요? 이와 같은 예가 성경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다. 마가복음 541절에 예수님께서 소녀에게 바로일어나라는 말씀을 하실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아니하고달리다굼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뜻이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라고 별도로 기록하셨다. 그러면 이 달리다굼이라는 말을 어떤 사람이 알아듣겠는가? 이 달리다굼은 하늘나라에 속한 언어, 예수님이 사용하시는 하늘나라의 통일 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