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사랑, 이 기쁨으로 사명을 다 하리라







성도들에겐 밥을 먹이고 자신은 물로 배를 채우는 날도 많았지만 지금 돌아보면 하나님의 은혜요 내게 큰 축복이었습니다.
내가 만난 이기쁨 목사 그는 충북 충주시에서 약 30분을 지나 가금면 가홍리 소재 사랑의 기도원 사랑의 교회를 담임하는 원장이다. 목사는 이름 그대로 기자를 반갑게 맞아 주었으며 후덕하고 따뜻함이 넘쳐났다. 그는 전국기도원총연합회 부흥사대표회장이기도 하다.
이 목사는 1986년 4월 24일! 생애 처음 예수님을 영접했기에 감회가 새로운 날이다. 게다가 가장 병들고 소외당한 영혼들을 치료하라는 주의 명령 따라 기쁨이란 이름으로 제2의 생명을 받은 날이기도 하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 불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자라 결혼 역시 불교 가정이었다. 모든 삶이 시부모님과 함께 불교의 관습에 따라 절에서 스님의 지시에 의해서 살았다. 불교를 믿는 정도는 이사에서부터 심지어 남편과의 관계도 다 스님이 시키는 데로 했었다. 또한 남편과 함께 살면 죽는다는 말에 이별 아닌 이별을 해야 했다. 남편은 지방으로 나는 서울에... 서로 너무 그리우면 시부모님 몰래 함께 생활하다가 시부모님이 오시면 또 짐을 챙겨 남편은 다시 떠나야 하는 삶이 수 없이 반복되었다.
이 기쁨 목사는 벌써 눈가에 눈물이 촉촉하게 젖어 들면서 이렇게 말한다.
1970년, 우리 부부는 슈퍼마켓을 경영하는데, 쥐가 많았다. 어느 날 남편은 번데기 통조림에 쥐약을 섞어 놓고 다음날 아침 예비군 훈련을 떠났다. 내겐 아들이 둘이 있는데 둘째 아들이 통조림을 들고 와서 달라고 해 열어보니 번데기 통조림이다. 누가 손을 댄 것 같지 않아 둘째 명종이와 함께 그 통조림을 다 먹었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미칠것만 같다. 엄마와 아들이 한 자리에 앉아 쥐약 한 봉지를 다 먹은 것이다. 먹은 지 10분쯤 되었을 때 아들은 울며 몸부림을 치고 있는 순간 남편이 들어와 아이가 왜 우느냐고 물었고, 나는 되어진 사실을 고하자 남편은 그곳에 쥐약을 타 놓았다고 한다 순간 나는 미친 듯이 아들을 안고 위생병원을 찾아, 병원 입구에 도착했을 때 나는 기절하고 말았다. 의식을 차렸을 때는 우리 아들 명종이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그것이 나와 명종이와의 마지막이었으며 나의 인생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몸은 완전히 만신창이가 되었고 생활은 풍지박살이나 빚더미에 앉게 되고, 병을 고치기 위해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했지만 병명조차 알 수가 없었다. 몸은 음식물을 받아들이지 못해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 갖고, 심지어는 절에 들어가 수양도 해보고 신기가 있다 해서 무당굿도 해보고... 하지만, 내 몸은 더욱 더 상태가 악화되고, 고통과 아픔 속에서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순복음교회 집사님을 통해 하나님을 영접했고 1986년 4월 24일 성령 체험을 받았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출 15:26) 그 날 이후 병에서 자유함을 얻었으며, 예수님을 영접한 나의 삶은 바뀌었고, 시간만 나면 청량리, 미아리, 버스 안, 지하철, 밤에는 공장 기숙사, 내 발길이 닿는 곳은 어느 곳이든 달려가 전도를 했다.
하나님은 신유 은사를 나에게 선물하셨고, 병든 가정을 찾아다니며 전도를 하며 전도를 통해 많은 역사를 체험하게 하셨다.
또한 어느 날 장안동에 있는 정미숙 집사님이 우리 집에 찾아 왔다. 나는 그 분을 전혀 몰랐지만, 집사님을 보자마자 내 입술에서 집사님, 하나님이 아들 주신데요... 1년 후 그 분은 아들을 낳게 되었고 바로 그 분이 복음의 입술이 되었다. 하루는 그 집사님이 자기 집에 방문을 요청, 갔었는데, 이게 웬일인가! 수십 명이 앉아 기다리는 게 아닌가! 도망치듯 달아나려 하는데 정 집사님 부부가 나를 붙잡고 놔주지를 않아 결국 그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나님, 나 어떻게 해요? 아는 것도 없고 예배 인도도 할 줄 모르는데.. 순간 성령의 영감이 들려 와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간암으로 죽음을 앞둔 한 아들이 있었는데, 예수님을 모르지만 살려만 주면 하나님을 영접하겠다고 살려만 달라고 나에게 기도를 요청했다. 나는 기도를 한 후, 할렐루야 기도원으로 인도했다. 하지만, 그는 3일 후에 나에게 전화를 해 집사님만 보고 싶다며 그곳에 갔다가 그 길로 내려 왔다고 한다. 그날부터 그를 위해 철야하며 새벽예배를 드리며 울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의 형님 집에 서 외양간을 방으로 만들어 사람과 격리되어 생활하고 있었다. 나는 그를 보는 순간 두렵고무서웠다, 그는 뼈와 가죽! 눈만 껌벅이는 그를 차마 눈뜨고는 볼 수가 없었다. 그 영혼이 하늘나라에 가기를 기도 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님의 음성이 들리기를 사랑하는 딸아 그 아들을 너희 집으로 데려오라 오! 나는 할 수 없어요! 몸부림치며 하나님께 사정을 구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데려오기를 원하셨다. 그 때 나에게 모든 사람들이 미쳤다고 등을 돌리고 있었고 남편은 날마다 문을 부수며, 욕설을 하며 폭력을 가했다.. 하나님을 영접하고 변화 받아 가는 나의 생활은 핍박과 서러움의 생활이 반복되고 있었다. 또 남편에게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증거로 나를 핍박할 때마다 건강을 치셔서 삶은 마비되었다. 모든 것이 다 막힌 나의 생활에 간암으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을 데리고 있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정말 말로는 표현 못할 아니, 따를 수 없는 음성이었다.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의 소중함을 모르고서 어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 수 있을까?라는 결론에 도달하자 남편과 한마디 의논도 없이 안방을 치우고 그들 가족을 불렀다. 일주일 뒤에 그 환자와 부인과 세 살 박이 아들이 왔고 내 남편의 핍박은 극치에 달했다. 내 아들은 무섭다며 집에 들어오지를 않았고, 또한 생활비가 없어서 밤이면 시장에 가서 야채를 주어다가 남편 몰래 진섭엄마 몰래 반찬을 만들어 주었으며, 눈물로 밥을 짓고 눈물로 반찬을 만들었다. 부인도 남편이 무서워 옆에 가려하지 않아서 내가 손수 목욕시키고 죽을 먹이고... 그 후 그 암 환자는 내 가슴에 안겨 하늘나라로 갔다. 나의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나의 남편은 하나님을 영접하게 되었고, 내가 가장 힘들어 지칠 때마다 나를 위로해주는 믿음의 동역자로 바뀌어 장로가 되었다. 이 얼마나 크신 하나님의 사랑인가!  할렐루야! 가 입에서 저절로 나온다.
그 후 신유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소문은 입과 입을 통해 전해졌고 전국의 환자들이 가정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병들고 찢긴 영혼들이 우리 가정을 찾으면 대접하고 싶고, 뭔가를 해주고 싶어서 하나님께 울며 기도하며 매달리기 시작했다. 하나님! 먹이고 싶고 입히고 싶고 들려주고 싶어요! 그러던 어느 날 먹이라는 성령의 영감이 들려오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줄 것이 없었다. 그때 우리 가정의 전 재산은 쌀 5되가 전부였다. 나는 믿음으로 그 쌀 5되를 씻는데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제부터는 네 남편의 손길이 아니고 너의 손길도 아닌 나의 손으로 부으리라 영원토록 마르지 않게 부으리라 그 날 이후부터 하나님은 그 약속을 지켜 주셨다. 처음 신학교 시절에 내 손으로 직접 밥을 짖게 하시고 예배시간마다 식사가 나가게 하셨다. 반찬이 없어 시장에 버려진 무 잎, 배추 잎, 파 등을 추수려 반찬을 만들게 하시고 성도들에게 먹이게 하시고 어떤 손길을 통하여서든 지 얼마씩의 돈을 들려주셔서 됫박 쌀을 사서 먹이게 하셨다. 그 시절 됫박 쌀을 사기가 부끄러워서 다른 동네들을 찾아다니며 쌀을 찾던 내 모습도 있었다. 성도들에게 조금 더 많이 먹이기 위해서 내가 굶는 날이 허다했다. 그들이 먹고 가면 배를 움켜쥐고 물로 배를 채울 때가 매일이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즉 은사가 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