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울었더니




계 5:4~5절 설교자 정기남목사

희랍 전설에 보면, 어떤 여자가 자기의 삶을 마치고 사후 세계로 가기 위해서 요단 강가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그 여자는 한 천사를 만나게 됩니다. 천사는 여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는 이 강을 건너기전에 리틀스라는 계곡의 샘물을 마시겠습니까?" 여인은 묻습니다. "내가 그 샘물을 마셔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러자 천사는 "만약 그대가 리틀스의 샘물을 마시면 세상에 모든 것을 잊고, 이 강을 건널 수 있습니다." 여인은 "나에게 그 샘물을 주십시오. 나는 이 세상에서의 모든 고통을 다 잊고 싶습니다." "허나 여인이여, 그대는 동시에 모든 기쁨도 잊을 것이요." "하지만 나는 이 세상 모든 실패를 망각하고 싶습니다." 천사가 다시 말하기를 시작합니다. "여인이여 하지만, 동시에 그대의 성공도 잊을 것이요." 여인이 말합니다. "하지만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상처를 잊고 싶습니다." "여인이여 하지만 그대는 동시에 기쁨도 사랑도 잊어버릴 것이요."

한참을 생각하던 여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그 샘물을 마시지 않겠습니다." 이 여인은 인생의 마지막 순례의 정점에서 기쁨은 고통을 동반하고, 성공은 실패를 수반하며, 사랑은 상처를 동반한다는 진리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역설인 것 같지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전도서7:3 " 웃는 것보다는 슬퍼하는 것이 좋다. 얼굴에 시름이 서리겠지만 마음은 바로잡힌다." (시 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도다. (시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고 했다. 우리 예수님은 (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진리를 깨닫는데 엄청난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또한 통회하는 마음, 애통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겸손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와 같은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1.겸손한 마음과 관심이 있어야 한다.
사도 요한은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하여 위에서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이 들려왔다. 이때 요한은 그 음성을 알아보기 위해서 몸을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고, 그 촛대 사이에 계신 계시의 주체 자 되신 예수님을 만났다. 그리고 그 분 앞에 엎드려 죽은 자같이 되었다(계 1:12,17). 우리는 이 말씀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자세히 알아보려고 하는 최대의 관심과 함께 진리 앞에 엎드리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땅 속 깊은 곳에 묻혀있는 보화는 자기의 소유 전부를 팔아서 그 밭을 사는 자의 것이다.(마 13:44) 아무리 귀한 보화가 숨겨진 밭을 발견하고 기뻐한다 할지라도 자기의 소유를 팔지 아니하는 자는 그 보화가 자기의 것이 될 수 없다. 진리에 대한 무관심은 죄이다. 예수님이 12살 때 그의 부모님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예수님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예수님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
말세에는 무지(無知=눅2:43) 무심(無心=눅 2:44) 무각(無覺=눅 2:50) 은 첫째 화에 이르는 첩경이 된다. (사 5:11~12)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독주를 따라가며 밤이 깊도록 머물러 포도주에 취하는 그들은 화있을진저 (사 5:12)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저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의 행하심을 관심치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생각지 아니하는 도다‘고 했다.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이 예수님의 부모들처럼 예루살렘 거리의 영화로움과(눅 2:43).거리의 군중 속에서 예수를 잃어버리고(눅 2:44), 빈 털털이의 허무의 내리막길을 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예루살렘 거리에 번쩍이는 하나의 허깨비 같은 환상같이 지나가고 말 것이다.

우리는 이제부터 이 말씀에 최대 관심을 가지고 좀더 자세히 알아보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말씀에 관심이 있는 자만이 주님을 만나 그 비밀을 알게 된다. 여러분 겸손은 최대의 축복입니다. 교만이 아직도 그 가슴에서 떨어지지 아니한 사람은 진리에 눈을 뜰 수 없다. 진리를 접하는 사람은 아집과 독선이 완전히 떨어져 나아가야 한다. 교만은 축복받는 데 최대의 원수요 적이다. 하늘의 계시는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한 자에게 나타난다(마 11:25)고 했다.

2. 사도 요한은 크게 울었다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계시의 비밀이 열리지 않았을 때 크게 울었다. 그때 계시가 열렸다.(계 5:4)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라고 했다. 킹=’그 책을 펴거나 읽거나 또는 그것을 볼만한 사람이 아무도 보이지 않기에 내가 심히 울었더니‘라고 했다. 그리고 5절 ’그 장로 가운데 하나가 나에게 말하기를 “울지 말라, 보라, 유다 지파의 사자인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책을 펴고, 또 그 책의 일곱 봉인을 떼리라.”고 했다.

구약을 보면 하갈은 그의 아들 이스마일과 함께 아브라함의 집에서 추방당하였다. 아침 일찍이 일어나 준비한 떡과 가죽부대의 물이 다 떨어지자 해 저문 브엘세바 광야에서 사경에 이르러 그 때 두 모자는 서로 마주 앉아 방성대곡 하였다.(창 21:16). 그때 하나님께서는 하갈의 눈을 열어 생수를 찾게 하였다.(창 21:19). 생수는 내 육신의 가죽부대 물이 다한 후에야 찾게 된다. 그리고 방성대곡하여 강같이 흐르는 눈물을 지금까지 더러운 곳에 오염되었던 눈을 깨끗하게 정화시켜 성스러운 세계를 보게 하는 정화수가 된다. 눈이 깨끗한 자에게 계시가 열린다.
다윗이 마신 눈물의 양식(시102:9)에서 사죄의 기쁨을 맛보았고, 밤마다 눈물로 적신 요에서(시 6:6) 다윗은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의 품을 알게 됐다. 어떤 분은 성경을 볼 때 영적인 눈이 열려지지 않아서 성경을 읽으면서도 답답했는데 금식하면서 말씀을 깨닫게 해달라고 크게 울었더니 그때 말씀이 깨달아지고 엄청난 은혜를 입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사도 요한을 밧모섬에 있게 했는지 그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스러운 하늘의 계시는 크게 우는 자들에게 나타나 보여주십니다.
3. 우리는 진리를 얻기까지 간구해야 한다.
이제부터는 울고만 있어서는 안된다. 진리에 대한 간구함이 있어야 한다. 시냇물을 찾는 사슴같이(시 42:1).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만족함을 얻었다(마5:6). 아무리 기름진 좋은 음식이라도 배가 부른 자에게는 호기심이 가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계시의 전달자인 힘있는 천사가 그의 손에 있는 책을 가지라‘고 할 때 요한은 즉시 천사에게 나아가 그 책을 달라고’고 하였다. (계 10:8)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책을 가지라 하기로 (계 10:9)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같이 달리라 하거늘‘ 그랬다. 우리는 ’달라‘고 해야합니다. 달라는 것은 큰 뜻이 있다. 하나님의 계시는 아무에게도 강요되지 않으며, 사람이 그것을 취해야 한다.

하나님께로부터 파송되어 롯에게 찾아온 천사도 롯의 간청이 있기 전에 천사가 그 집에 유하기를 더디 했다.(창19:3) 하나님께로부터 파송된 천사이니까 분명코 자기 집에 와서 유숙하리는 자기기만에 속지 말아야 한다. 간청이 있기 전에 천사가 그 집에 들어가기를 지체한다. 하나님의 허락한 천사의 손에 있는 계시의 말씀도 달라고 간청하는 사람만이 받는 것이다. 그래서 (약 4: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고 했다. 그래야 큰 은혜를 받는다고 (약 4:6)했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려고 예비하고 계시지만, 우리 인간의 손이 부정하거나 두 마음을 품고 있는 까닭에 그 예비하신 큰 은혜를 받지 못하는 원인을 자신이 만들게 됩니다. 천사의 손에 허락된 계시는‘달라’고 자신의 손을 내미는 자들만이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

4.우리는 갖다 먹어야 한다.
천사가 계시의 책을 달라고 한 요한에게 그 책을 주면서 가져다가 먹으라고 했습니다.
(계 10:9)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같이 달리라 하거늘‘그랬다. 이 뜻은 겔 3:1절의 반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고 말할뿐만 아니라 먹고 소화시켜 신앙자의 살과 피로 화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먹은 자는 단맛과 쓴맛을 다 경험해야 한다. 입에는 꿀같이 단데 배에서는 쓴맛이 났다.

그러므로 계시의 말씀은 달고도 쓴 이상한 책이다. 입에 단맛은 말씀의 감미로움을 뜻하고 배에서 쓴 맛이 나는 것은 예언자가 그것을 성취한 후 그대로 예언하려면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다는 뜻입니다. 또 예언의 내용 속에는 적그리스도 재앙도(계13:)포함되었으므로 성도의 수난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요한의 근심이 커져서 고통거리가 되고 말았다. 전부 먹으라는 뜻은 전체를 이해하라는 말이다. 도의 초보자인 젖 떨어진 자에게 하듯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 식으로 해서는 안된다. (사 28:10)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도다‘라고 엄히 책망하셨습니다. 계시록은 총 22장이며 404절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완전히 다 먹어버려야 합니다.

5. 우리는 독선과 아집을 버려야 한다.
진리를 대적하는 최대 원수는 독선과 아집이다. 자기의 해석은 옳고 다른 사람의 해석은 틀린다고 하는 바리새적인 태도는 진리탐구에서 절대 금물이다. 더구나 진리의 구실로 형제를 정죄하거나 보수의 전통을 구실로 형제 사랑을 해치는 일을 해서는 절대 안 된다.

6. 참된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수건을 벗어야 합니다.
(고후 3:14~18)‘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아멘. 이 말씀에서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수건이 등장합니다. 수건을 벗으라는 것이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계시를 깨닫는데 있어서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해 봅니다.

1) 수건을 벗어야 되겠고, 2) 자유함을 얻는 것입니다. 수건을 벗는 일과 자유함을 얻는 일은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수건은 진리의 실상을 보지 못하게 가려진 벽을 말하기도 하고 가려진 휘장을 가리키고 있다. 성막론에서 보았듯이 지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휘장으로 가리워져 있듯이 수건을 벗지 않고는 참된 계시를 알 수가 없다. 휘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 찢겨졌음으로 새롭게 산길이 우리 앞에 열려졌다. 성경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 (마 27:51)‘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히 10:19~20)‘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아멘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얼굴에 수건을 가리고 모세를 보았다. 왜? 모세의 얼굴이 눈이 부시도록 빛이 났기 때문이다.(출 34:35)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는 고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씀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고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도 마음이 완악해져서 구약을 읽을 때 그 수건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이다. 그 수건이 벗어지지 않고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깨닫지도 못하고 알 수가 없다. 율법적인 완고한 고집이나 자아의 고정관념의 수건을 벗기 전에는 계시의 비밀은 열려지지 않습니다. 수건을 벗고 우리 주님께로 돌아와 자유자의 심령이 될 때만이 계시가 열린다는 사실입니다.

7. 우리는 오직 성령님께 의존하며 살아야 합니다.
길선주 목사는 계시록을 생전에 3만 독이나 하셨다고 한다. 길선주 목사님의 계시록 강의 첫머리에 계시록은 특별 감동 중에 보여주는 글이니, 첫째는 성령충만을 가리킨다고 했다. 계시록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계2:7, 11,17, 29, 3:6, 13, 22,)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에 의하여 기록하였다. (딤후 3:16에‘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했다. 이 성경은 분명 사람의 손을 통하여 기록하게 하셨다. 그렇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서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저술자는 바로 성령님이시다. 밧모섬의 사도 요한도 주의 날에 하나님의 영감에 의하여 계시를 보았다.

(계 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성령의 영감이 없이는 계시록의 바른 해석이 불가능하다. (고전 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고 말씀합니다.‘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인간의 학문적 지식으로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자만이 알 수 있는 성역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마라나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