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진우 목사, 주님과 함께하는 가정예배(27,28)


예복교회 주일예배 광고 pc시안.jpg제목: 겨자씨 하나님 나라

성경: 마태 1331~32절 찬송 210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셨습니다. 가장 흔한 풀, 게다가 작고 작은 씨입니다. 나무라면, 비록 이스라엘에 백향목은 없지만, 그래도 무화과나무도 있고, 포도나무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하필 겨자 나무일까요? 그것도 풀도 되지 못한 씨앗일까요? 겨자는 작은 풀이지만 정말 끝없이 큽니다. 다만, 겨자는 위로만 많이 크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 큽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저 홀로 우뚝 서서 그 아래에 풀 한 포기조차 용납하지 않지만, 그 큰 키 때문에 금방 잘려나가고 맙니다. 그러나 겨자는 함께 어우러지고 펼쳐져서 마침내 들판을 온통 겨자꽃으로 물들입니다. 짓밟히고 쓰러져도 어느새 다시 일어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아 생명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제목: 밭에 감추인 보화

성경: 1344절 찬송 283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 놓은 보물과 같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진정한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찹니다. 그래서 그 보물을 갖기 위해, 하나님 나라를 누리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내다 팝니다. 하나님 나라를 발견한 사람의 기쁨을 다른 사람은 이해하지도 못하고, 알 수 없습니다. 그 하나님 나라가 어디에 숨겨 있다고 말씀합니까? 밭이라고 합니다. 밭은 어디를 말씀합니까? 우리 마음이요, 생활이요, 일상인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말하고,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속에, 우리 속에, 내 안에 하나님 나라를 숨겨 두셨습니다. 날마다 이 감춰진 하늘 보화를 발견해 가며 하나님 나라의 행복을 누리시는 복된 삶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제목: 하나님 앞에 홀로 있는 시간

성경: 1422~23절 찬송 264

본문 바로 앞에는 오병이어의 기적 나옵니다. 작은 음식으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먹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았을 때 얼마나 놀라웠겠습니까? 그러나 그 환호하고 열광하는 사람들을 떠나, 예수님은 조용히 홀로 산에 오르셨습니다. 거기서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거기서 홀로 하나님 아버지 앞에 아버지와 함께 계셨습니다. 홀로 있는 시간은 자신을 보는 시간이며, 또한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 전에도 홀로 시험을 치루시고, 마지막 십자가를 앞두고도 홀로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홀로 계시는 그 시간은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세상 분주함 내려놓고, 하나님 영광에 동참하는 은혜있기를 축복합니다.

 

제목: 반석 위에 세운 믿음

성경: 1615~18절 찬송 204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교회는 이 믿음의 고백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베드로보다, 오히려 예수님의 믿음에 더 주목해야 합니다. 사실, 교회는 시몬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시몬을 베드로, 반석이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리 믿을 만한 인물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반석이라고 믿어 주시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믿음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인간, 죄인인 우리를 향한 믿음으로, 얼마나 믿어 주시기에 생명까지 내어 주셨겠습니까?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믿어 주십니다. "너희는 반석이다" "너희는 빛과 소금이다" 이 믿음 의지해 승리하길 바랍니다.

 

제목: 어린아이를 막지 말라

성경: 1913~15절 찬송 298

유대인들의 생각에 따르면 율법을 지킨 공로가 있는 사람들의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이방인들이나 죄인들은 물론이거니와 어린이와도 상관없는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이런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런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하나님 나라가 아무 공로도 세울 능력이 없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는 말씀은, 하나님 나라는 은총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이처럼 순진한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거기에 들어갑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의 약함을 깊이 아는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나는 어린이입니다.' 이 고백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하는 지점입니다.

 

제목: 은총의 선물

성경: 1923~24절 찬송 292

재물과 인간, 소유와 존재의 관계는 참 묘한 관계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인간이 재물을 소유하지만, 재물에 집착하면서 소유를 떠나지 못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재물이 인간을 지배하고 조종합니다. 예수님도 본문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물질은 악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물질이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나의 재물은 하나님이 주신 은총의 선물입니까? 아니면 나를 지배하는 마약과 같은 것이겠습니까? 잘 살펴 물질에서 자유하고 은혜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제목: 은혜로 다스림 받는 삶

성경: 201~16절 찬송 301

일찍 온 사람들이 부당하다고 주인에게 항의를 했습니다. 하루 종일 뙤약 볕에서 땀 흘리며 많은 시간을 수고했는데,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과 임금을 똑같이 주다니 너무나 부당해 보입니다. 주인이 말합니다. "당신들에게 주는 것과 꼭 같이 이 사람에게 주는 것이 내 뜻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일한 사람의 공적에 눈길을 주시지 않습니다. 주님이 강조하시는 것은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 은혜를 베푸는 삶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인이 모두에게 약속한 한 데나리온의 몫은 어찌 보면 하루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일용할 양식'이라는 은혜라는 것을 이 사람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늦게 부름받은 사람들에게 더 절실히 필요한 것들입니다.

 

제목: 겸손의 길

성경: 2020~28절 찬송 212

예수님의 길은 섬기는 길이고, 낮아지는 길입니다. 제자들은 십자가의 길 주님의 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교만함 때문이었습니다. 교만이 인간의 자기 한계를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무지의 모습이라면, 겸손은 인간의 한계를 알고 인정하는 깨달음과 지식에 있습니다. 우리 육체가 흙으로부터 왔고, 하나님이 부르시면 언제든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겸손함을 가지고 인생을 살게 됩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길 안에 있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 진실로 겸손한 삶을 살게 됩니다. 겸손함을 아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주님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감사한 마음으로 걷게 됩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될 줄 믿습니다.

 

제목: 진정한 리더(섬김)

성경: 214~9절 찬송 315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실 때 어린 새끼 나귀를 타고 들어가셨습니다. 새끼 나귀를 탄 왕은 멋진 갈기를 휘날리는 높은 군말를 타고, 군악대의 나팔 소리 속에 자신의 용맹을 과시하며 군림했던, 수많은 제국의 왕들과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무력으로 폭력적 지배를 하는 그런 왕권을 부러워하는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밑바닥부터 다른 왕의 통치방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온 생명으로 하나님만을 섬기고, 사람을 섬기는 분으로 이 땅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환호해야 할 왕은 겸손하셔서 낮은 곳에서 섬기는 왕인 것입니다. 그 왕이 모든 죄인들을 잘 섬기려고 죽어주셨습니다이번 한 주간도 내가 섬겨야 할 자리를 잘 찾아 보시길 바랍니다. 내가 그런 리더 되어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제목: 바르게 실천합시다

성경: 2128~32절 찬송 204

하루는 아버지가 맏아들을 불러 포도원에 가서 일 좀 하라고 했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 앞에서 대답하기를 예 가겠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다시 둘째 아들에게 똑같이 포도원에 가서 일 좀 하라 했습니다. 둘째는 처음부터 일하러 가지 않겠다고 반항하듯 말했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니 아버지께 잘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뉘우치고 포도원에 가서 일했습니다. 두 아들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 것입니까? 말할 필요도 없이 둘째 아들입니다. 대답하고 말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깨닫고 바른 방향의 일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께 늘 기도로 구합시다. 말씀을 바르게 깨닫게 하시고, 깨달은 것을 행할 수 있는 바른 믿음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제목: 잘못된 열정

성경: 2315절 찬송 540

열성이 하나님의 자녀를 모으는 것이 아니라, '지옥의 자식'을 만드는 일이 된다면, 얼마나 참담한 일입니까? 일찌기 예레미야는 가장 잘못된 신앙의 표본을 '벤힌놈 골짜기' 사건에서 보았습니다. 아하스 왕은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를 확대하려고 제단을 더 크게 만들고, 끊임없이 많은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힌놈 골짜기에서 아들을 제물 삼아 바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아하스의 이 제사가 사악한 살인행위일 뿐이라고 고발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뜻은 없고, 왜곡된 탐욕만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욕망과 세속적 욕망이 섞여질 때, 거기서 위선자의 자식, 지옥의 자식이 태어나게 됩니다. 잘못된 신앙은 뜨거울수록 더욱 위험합니다.

 

제목: 최고의 소명

성경: 2524~25절 찬송 461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맡겨준 달란트를 돌보지 않았고, 책임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그것이 문제입니다. 한 달란트는 작은 게 아닙니다. 한 달란트는 일만 데나리온, 하루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치면, 한 달란트는 장정이 25년 꼬박 일해야 받는 거금입니다. 무엇보다 주인이 맡긴 것이라면,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라면, 얼마나 소중하고 또 얼마나 감사한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소명은 크고 작은 것이 없습니다. 모든 소명은 다만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1밀리미터도 움직이지 못하시면서, 온 세상을 모두 돌보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오늘 주님의 십자가에 1밀리미터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제목: 나그네를 영접하는 자

성경: 2535~36절 찬송 220

예수님도 나그네 인생을 사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자신을 나그네와 동일시하셨습니다. 최후의 심판 비유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내가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여 주었다" 그때 양의 무리에 선 사람들이, 우리가 언제 주님이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해 드렸느냐고 말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우리가 나그네를 지키고 사랑하는 것은, 공동체를 지키는 기초요, 나를 지키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나그네 길에 동행하시며 지켜 주신다는 것이 우리의 찬양의 제목이어야 할 것입니다.

 

 

제목: 가르쳐 지키게 하라

성경: 2818~20절 찬송 505

땅끝까지 가서 도대체 무엇을 하라는 말인가요? '복음'을 들고 땅끝까지 달려간 교회는 또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정말 복음이 땅끝까지 들리면, 그것으로 선교가 완성되는 것이겠습니까? 그게 아닙니다. 교회가 땅끝까지 가는 거기에는 소명이 있습니다. 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마태는 이 소명을 주목합니다. 이 소명이 없이 땅끝까지 달려가는 것은 허망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소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 뜻을 깨닫고, 거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실천을 살아내게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생활로, 역사로 살아나게 해야 합니다. 가르쳐 지키게 하라, 부활하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 하나님 나라 확장하는 우리가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