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궤를 싣고 가는 두 암소

(삼상 6:7~15) 

장한국 목사 명예이사장.jpg

필리스타인이 승전하고 주의 궤를 뺏었습니다. 이 주의 궤로 인해 하나님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사 독종으로 수많이 죽어 나갔고 남은 자들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닿았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할 수 없이 이 주의 궤를 이스라엘에 돌려주기로 합니다. 젖 나고, 한 번도 멍에 메어보지 않은 두 암소를 택하여 주의 궤를 보냅니다. 갖 낳은 새끼 송아지들을 생이별시켜 가뒀습니다. 젖 달라고 울부짖고 이를 듣는 두 암소들은 젖이 줄줄 흐르고 있고 당장 새끼에게 달려가 젖을 물리고 싶은 지경이지요. 또 한번도 멍에를 메본 적이 없이 최초로 주의 궤를 실은 이 수레를 메었으니 불편하고 답답하기 짝이 없지요. 당장 멍에를 훌렁 벗고 싶은 지경입니다.

 

그러나 그 암소들이 벧세메스의 곧은 길을 택하여 곧장 대로로 나아갔다고 했습니다. 도저히 암소들이 이런 견딜 수 없는 상황하에, 또 어찌 벧세메스와 그 곧은 길을 알아서 그걸 택해서 간단 말인가? 이는 하나님의 궤에 해답이 있습니다. 그 주의 궤는 하나님의 임재요, 주님의 임재입니다. 주님이 두 암소 앞에서 그 곧은 길을 택하여 암소들을 이끌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를 영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 벧세메스는 아론 자손, 고핫인들이 사는 곳이요, 이들만이 주의 궤를 다룰 수 있게 하셨지요. 그들에게로 주의 궤를 가져가게 하는 주님이시요, 두 암소들은 이 주님이 쓰시는 도구인 것입니다. 두 암소들이 그 곧은 길을 가며 울면서 좌우로 치우치지 않습니다.

 

새끼들이 어미 암소에게 젖 달라고 울부짖음을 듣고도 갈 수 없는 어미 소의 심정이 곧 우는 것입니다. 인정, 사정, 어떤 정()도 다 끊고 오직 주님 도구로서 주의 궤를 맡아 옮겨 가듯, 이런 사명을 감당하는 것을 두 암소로서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이는 두 증인들이 환란 날에 굵은 베옷을 입고 1260일 예언하는 것과 같습니다. 환란날 주님을 부인하고 우상숭배하는 배도 신자들의 가증함을 인하여 애통하는 두 증인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또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곧장 갑니다. 이는 오직 주의 말씀만을 믿고 의지하며 나아가는 모습입니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한 두 암소는? 즉각 번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집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사명 감당 후 순교 제물로 바쳐질 것이라!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