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7:13-27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대표이사 정기남 목사.jpg  애청자 여러분 지난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 자 한다. 우리는 좁은 이 길을 택해야 한다. 좁은 길! 좁은 문은 오직 예수님을 뜻한다. 예수님 만이 길이요, 예수님 만이 문이시다. -7:13-14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그 문은 넓고 그 길이 넓어 거기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그 문은 좁고 그 길이 좁아 그것을 찾는 자가 적으니라’. 했다. 협착하다는 것은 결국 그 길이 좁다는 것이다. 좁은 문! 좁은 길! 진리의 길을 가려면 환난이 따른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협착하고 그 길이 그만큼 좁다는 것은 환난을 각오해야 된다는 것이며, 우리의 가는 길은 길어 없다. 그래서 길이요 진리신 예수님 만이 영생의 길이요 영원한 길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떠한 고난과 환난을 통과해야 한다. 반드시 광야는 통과해야 한다. 광야(이 세상)에는 불 뱀들이 있고, 무서운 더위와 밤에는 한파(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곳이다. 천로역정에서 보았듯이 천국 문턱에까지 따라오면서 방해를 놓고, 힘들게 하는 게 바로 사탄이다.

 

그리고 불기둥 구름 기둥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어야 한다 그런 얘기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진리를 확실히 알고 작아지고 순교했다. 작아지기 전에는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었다. 속없는 벼처럼! 속없는 벼는 바로 쭉정이다. 바울은 엡 3:8 ‘그분께서 모든 성도들 중에서 가장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해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부요함을 내가 이방인들 가운데 선포하게 하고’. 라고 했다. 선포했다는 것은 이방인들 가운데 말씀을 전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년 수가 길어질수록 자꾸 낮아지는 게 정상이다. 3:9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세상이 시작된 이후로 감추어져 온 이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든 사람들이 보게 하려 하심이라’. 고 했다. 사도 바울의 작은 운동 세가지를 보면 1. 나는 날마다 싸우노라 했다. 누구와 자기와의 싸움이다. 2.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다. 3. 나는 날마다 승리하노라고 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바로 죽어야 한다. 날마다 죽어야 한다. 하지만 많은 성도들의 고민 중 하나가 자신이 죽어야 하는데 안 죽어서 문제라고 한다. 예수 믿으면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하는데 그래야 죽는데 안 죽으니까 시끄러운 일만 생긴다. 육을 죽여야지 영원히 사는 길이 보장된다.

 

고전 15:31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로 인한 기쁨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 했다. 애청자 여러분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 유업을 받지 못한다. 애청자 여러분! 오늘 이 시기를 성경으로 보나! 사회적으로 보나! 세상인심으로 보나! , 음악, 과학으로나! 우주 만물을 보나! 올만큼 왔다고 생각한다. 이 시대가 문제가 많다. 그래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누구나 다 환난을 통과해야 한다. 환난이 있다는 것은 성경 전체에서 말씀하고 있다.

 

세 가지 공식은 1) 진리, 2) 환난! 3) 승리 등이다. 한국교회와 애청자 여러분도 반드시 새벽바람을 제치며 교회로 나가셔서 철저히 기도하는 삶이 하나님 보실 때 기뻐하시도록 자신의 몸에 익숙해져야 한다. 우린 신앙생활 잘해야 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야 한다. 말씀에 갈증을 느껴야 한다.

 

13:7-9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오 칼, 깨어서 내 목자 곧 내 동료인 그 남자를 치라. 목자를 치라. 그리하면 양들이 흩어지리니 내가 내 손을 돌이켜 작은 자들 위에 두리라. 8. 주가 말하노라. 그 온 땅에서 그 안의 삼분의 이는 끊어져 죽을 것이요, 오직 삼분의 일만 그 안에 남으리라. 9.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고 은을 정제하듯 그들을 정제하며 금을 단련하듯 단련하리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그들의 말을 들으며 또 말하기를, 그것은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니이다. 하리라’. 아멘.

 

위에서 말씀을 들었듯이 저는 슥 13장을 3종류로 보아서 삼분의 일은 불신자! 삼분의 일은 염소들! 삼분의 일은 양! 이는 운동을 가리킨다. 여기 세 번째 중에 있던 자가 예비처에 들어갔다가 휴거를 한 후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말세에는 작은 자! 작은 운동! 작은 빵 작은 책! 좁은 문! 등을 기억하자! 우리는 오직 예수 승리! 자신의 육은 틀렸지만, 자신의 행위로는 틀렸지만, 오직 예수님께 자신을 맡겨야 한다. 새벽 기고! 저녁 예배! 철저히 삭개오가 되어야 한다.

 

오늘 네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

19:4 ‘앞으로 달려가 그분을 보려고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그분께서 그 길을 지나가시게 되었기 때문이더라’. 아멘. 우린 삭개오처럼 앞으로 달려가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앞으로 달려갔다. 앞으로 달려갔다는 것은? 신앙에 변화와 발전을 뜻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글자 한자 한자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고, 어떠한 사건과 배경에도 반드시 큰 의미가 있기에 우리는 이것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앞으로 달려갔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좀 더 알아본다면 앞으로 달려갔다는 참뜻은 사자나 표범이 먹이감인 사슴이나 토끼를 발견하면 이를 잡기 위해서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듯이 그러한 자세를 말한다. 옆에 있는 것들을 보지 않고 그 먹이를 위하여 질주하듯이 달려가는 자세를 가리킨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한번 만나보기 위한 결심이 섰기 때문에 맹수가 먹이감을 사냥할 때처럼 질주했다는 그런 의미이다. 이와 같은 믿음이라면 비로소 의인이란 칭호를 받게 된다는 그런 얘기이다. 할렐루야!

 

애청자 여러분! 달려가는 신앙의 반대는 무엇일까요?

뒤돌아보는 것, 뒤를 돌아보는 신앙! 신앙생활의 중단을 의미한다.

5:7-8 ‘너희가 잘 달렸는데 누가 너희를 막아 너희가 진리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이렇게 설득하는 것은 너희를 부르시는 분에게서 나지 아니하느니라’. 라며 바울은 질타성 발언을 하고 있다.

 

20:24? ‘이 일들 중 어떤 것도 결코 나를 움직이지 못하며 또한 내가 나의 생명도 내게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딤후 4:7-8?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은즉 8.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관()이 예비되어 있나니 주 곧 의로우신 심판자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내게 주실 것이요, 내게만 아니라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도 주시니라’. 아멘

 

19:22~26? ‘너는 속히 거기로 도피하라. 네가 거기에 이를 때까지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노라, 하였더라. 그러므로 그 도시의 이름을 소알이라 하였더라. 23. 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땅 위에 솟았더라. 24. 그때에 주께서 하늘에서 주로부터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25. 그 도시들과 온 광야와 그 도시들의 모든 거주민과 땅 위에서 자란 것을 엎어 멸하였더라. 26. 그러나 롯의 아내는 그의 뒤에서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그랬다.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되는데 하나님께서 분명 타일러 주었건만, 롯의 처는 소돔성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그만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었던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까지 산 역사로 깨우쳐 주고 있다. 또한 사해 바다를 우리에게 거울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들의 믿음을 깨우쳐 주고 있는 다니엘과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생각해 보았는가?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택한 백성들을 위하여 말씀하고 있다. 3:16~18 보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오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해 왕께 대답하기를 염려하지 아니하나이다. 17. 오 왕이여, 그리될지라도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께서 맹렬히 불타는 용광로에서 능히 우리를 건져내시겠고 또한 그분께서 왕의 손에서 우리를 건져 내시리이다. 18. 그러나 그리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오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고 왕께서 세우신 금 형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할 줄을 왕은 아옵소서, 하니라’. 아멘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오늘 우리들의 믿음도 신앙도 이렇게 되어야 한다. 그런 강한 결단이 없이는 어떻게 요단강을 건널 수 있겠어요. 마지막 때는 엄청난 환난과 고난의 함정과 험난한 강이 출렁대고 있는데 이를 해치고 앞으로 앞으로 전진하기 위해서는 소망을 가져야 한다. 힘든 것들도 극복할 수 있는 소망과 기쁨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닥쳐올 666도 적 그리스도의 험난한 늪지대와 같은 터널을 헤쳐나가야 한다. 이기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 애청자 여러분! 우리는 믿음으로 범람한 요단강으로 뛰어 들어가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 할렐루야!

 

다같이 수 3:14-17 ‘백성이 요르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에서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백성 앞에서 언약 궤를 매니라. 15. (요르단이 수확할 때에 항상 그것의 모든 둑에서 흘러넘치므로) 궤를 맨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서 잠기니라. 16. 위에서부터 내려오던 물들이 일어서고 솟아올라 사르단 옆의 도시 아담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한 무더니 위에 쌓이며 평야의 바다 곧 염해로 내려가던 물들은 모자라서 끊어지매 백성이 똑바로 여리고를 마주 보며 건넜더라. 17. 주의 언약 궤를 맨 제사장들은 요르단 한가운데서 마른 땅에 굳게 섰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은 마른 땅을 건너더니 마침내 온 백성이 깨끗하게 요르단을 건너니라’. 아멘

 

1. 이 말씀을 보면 요르단(요단강)에 발을 딛는 순간 물이 넘실거리던 강물이 끊어졌다고 했다. 첫 번째 요르단(요단강) 물이 넘쳤지만 수확 철을 맞아 주의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요르단 한가운데서 마른 땅에 굳게 섰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은 마음 놓고 찬송을 부르며 마른 땅을 건넜다. 넘실거리던 요르단 물이 마르자 식은 죽 먹기로 건넌 것이다. 8:32절 말씀처럼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이다.

 

두 번째는 홍해를 건넜을 때 흐르는 바닷물이 양쪽으로 넘친다. 그러므로 자유함이 없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구원은 얻었지만, 아직 자유가 없다. 진리와 성령으로 충만할 때 자유가 있다. 찬송가(384) 가사처럼 나의 갈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 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아멘

 

다음으로 두 종류의 기념 돌을 알아야 한다.

1. 수장 돌을 알아야 한다. 4:9 ‘여호수아가 또 요르단 한가운데 곧 언약 궤를 맨 제사장들의 발이 선 곳에 열두 개의 돌을 세웠는데 그 돌들이 이 날까지 거기 있느니라’. 고 했다. 요르단 한가운데, 즉 언약 궤를 맨 제사장들의 발이 멈춘 곳에 열두 돌을 세웠다고 했다. 물 가운데 세운 돌, 수장된 돌은? 예수님을 가리킨다. 예수님께서 나를 기념하라하셨다. 이는 또 인성으로 오신 예수님을 뜻한다.

 

또한 우리 예수님은 벧전 2:5-6너희도 살이 있는 돌들로서 영적 집으로 건축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도다. 그런즉 성경 기록에도, 보라, 내가 선택한 보배로운 으뜸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당황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는 말씀이 들어 있느니라’. 하셨다. 10:45처럼 죽으러 오신 예수님은 수장되어야 한다.

 

그리고 열두 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2지파! 12 제자를 상징하며, 또는 교회 조직 수를 가리킨다. 4:20? ‘여호수아가 그들이 요르단에서 취한 그 열두 개의 돌을 길갈에 세우고’. 했다. 여기 길갈에 열두 돌을 세웠다고 했다. 돌은 신성 예수님을 의미하고, 길갈에 돌을 세우고,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뜻하고 있다. 야곱이 베고 잔, 돌 베게 역시 깊은 의미가 있다.

 

28:10-19절을 보시면 이 의미를 깨닫게 되고 은혜가 충만하다. 우리는 말씀을 많이 읽고 듣고 말씀을 달게 꿀 같이 먹고 소화를 잘 시키고 실천하는 신앙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의 은혜는 강수처럼 넘치게 되는 것이다. 10절부터 보면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을 향하여 가다가 11. 어떤 곳에 이르러 해가 지매 거기서 온밤을 지내려고 그곳의 돌들을 취해 베개로 삼고 그곳에서 자려고 누우니라.

 

12. 그가 꿈을 꾸었는데, 보라, 사다리가 땅 위에 세워졌고 그것의 꼭대기는 하늘에 닿았더라. 또 보니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것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더라. 13. , 보라, 주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주니 곧 네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니라. 네가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씨에게 주리니 14. 네 씨가 땅의 티끌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널리 퍼지며 너와 네 씨 안에서 땅의 모든 가족들이 복을 받으리라.

 

15. , 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너를 지키며 너를 이 땅으로 다시 데려오리라. 내가 네게 말한 것을 행할 때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16. 야곱이 잠에서 깨어 이르되, 주께서 분명히 이곳에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하고는 17.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곳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곳은 하나님의 문이로다, 하고 18. 야곱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 그곳에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그러나 그 도시의 이름은 처음에 루스라 하였더라’. 아멘.

 

세운 돌은 예수님의 부활을 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의 신앙을 가져야 한다. 그런가 하면 재림 신앙을 가져야 한다. 분명코 부활이 있어야 재림이 있다. 아멘. 다음으로 우리는 길르앗의 돌무더기를 알아야 한다.

 

31:43~49절 이는 야곱과 라반과의 언약인데 43. ‘라반이 야곱에게 응답하여 이르되, 이 딸들은 내 딸들이요, 이 아이들은 내 아이들이요, 이 가축들은 내 가축들이요, 네가 보는 모든 것은 내 것이니라. 이 날 내가 이 내 딸들이나 그들이 낳은 아이들에게 무슨 일을 할 수 있으랴? 44. 그러므로 너는 이제 오라, 우리 곧 나와 네가 언약을 맺어 그것이 나와 너 사이에 증거가 되게 하리라, 하매 45. 야곱이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46. 또 자기 형제들에게 말하여, 돌을 모으라, 하니 그들이 돌을 취하여 무더기를 만들매 그들이 거기서 무더기 위에서 먹으니라. 47. 라반은 그 무더기를 여갈사하두다라 불렀으나 야곱은 그것을 길르엣이라 불렀더라. 48. 라반이 말하기를, 이 날 이 무더기가 나와 너 사이에 증거가 되느니라, 하였으므로 그것의 이름을 길르엣이라 하였으며 49. 또 미스바라 하였더라. 이는 그가 이르기를, 우리가 서로 떠나 있을 때에 주께서 나와 너 사이에 살펴보시기를 원하노니’. 아멘

 

길르엣에 세운 돌무더기는? 화목제가 되시는 예수님을 가리킨다.

2:14-17절을 보면 원수 되었던 담을 십자가에서 허무셨다. 14. ‘그분은 우리의 화평이시니라. 그분께서 둘을 하나로 만드사 우리 사이의 중간 분리 벽을 허무시고 15. 원수 되게 하는 것 즉 규례들에 수록된 명령들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없애셨으니 이것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듦으로써 화평을 이루려 하심이요, 16. 또 십자가로 그 원수 되게 하는 것을 죽이사 친히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려 하심이라. 17. 또 그분께서 오셔서 멀리 떨어져 있던 너희에게와 가까이 있던 그들에게 화평을 선포하셨느니라’. 아멘.

 

길르엣에 세운 돌무더기는 화평을 주시며 화목케 하시는 예수님을 의미하며 중간 벽을 허무시고 즉 원수 되었던 벽, 담을 허무시고 친히 십자가로 둘을 하나로 한 몸으로 만드시고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셨다는 의미이다.


오늘은 여기서 말씀을 마치고 다음 시간 다시 뵙기를 기원한다. 마라나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