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
참외는 중복(中伏)까지 맛있고 수박은 말복(末伏)까지 맛있다. 처서(處署)
복숭아, 백로(白露) 포도 하듯이 철따라 과실의 시식(時食)이 정해져 있어
과실맛으로 절기를 느끼곤 했던 것이다.
옛 편지 첫머리에 `포도순절(葡萄旬節)에 기체만강하시고...' 하는 구절을
잘 썼는데, 바로 백로에서 추석까지 시절을 포도순절이라 했다. 지금이 바
로 그 포도의 계절이다.
경주(慶州)의 신라 유적지에서 포도알과 포도잎, 그리고 포도덩굴이 그려진
옛기와가 출토되고 있는데, 그로써 신라 때부터 포도를 길렀다고 단정할 수
는 없다. 중국에 포도가 들어온 것은 기원전 128년 한무제(漢武帝) 때였다
면 삼국시대 이전에 들어왔을 가능성도 없지 않으나 문헌상 확인할 길이 없
다. 포도의 국내 재배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고려 중엽께다.
당시 학자인 안축(安軸 : 1282 ~ 1348)의 문집에 보면 영흥(永興)의 한 은
자(隱者)로부터 포도주로 대접받는 시(詩)가 있다. 포도를 길러 술까지 빚
어마셨음을 알 수가 있다. 고려 말엽에는 포도를 주제로 한 시가 자주 나온
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은 `포도송이 시렁에 가득하니 마치 푸른 빛이
흘러내린 것 같네' 하고 읊고 있고,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도 `포도 한
알 입 속에 터뜨리니 지병(持病)이 나은 듯하네. 굳이 봉래산까지 약초 캐
러 갈손가' 했다.
그해 첫 포도를 따면 사당에 먼저 고한 다음 그 집 맏며느리가 한 송이를
통째로 먹어야 하는 민속이 있었다. 주렁주렁 포도알로서 다산(多産)을 유
감(類感)시키기 위한 기자주술(祈子呪術)이었을 것이다. 조선 백자(朝鮮 白
磁)에 포도 문양의 백자가 많은데 이 역시 다산을 유감시키고자 내방에 둬
두는 주술 단지였다. 지금도 연만한 분들은 처녀가 공개적으로 포도를 먹고
있으면 망측하다고 호통을 치는데 포도에는 다산을 상징하는 전통적 이미지
가 도사려 있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배은망덕한 행위를 했을 때 포도지정(葡萄之情)을 잊었다고 개탄
을 했는데, 포도의 정이란 어릴 때 어머니가 포도 한 알 입에 넣어 껍데기
와 씨를 가려낸 다음 입물림으로 먹여주던 그 정이 일컫는다. 기방(妓房)에
서는 이 포도지정이 입물림하는 정, 곧 키스하는 정으로 변질이 되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