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아들에 대한 야곱의 祝福 豫言 -7-

49: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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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의증언 정기남 목사(지저스타임즈 발행인/한국기독교언론부흥사협의회 상임대표)

. 요셉은 건강한 활과 힘 있는 팔을 가졌다(49:23~24).

요셉은 일생을 하나님을 섬겨오면서 신앙생활 하는 동안 대적들로부터 수많은 독화살과 학대와 군박을 받으며 살아왔다. 하지만 요셉은 단 한 번도 독화살에 맞아서 그의 영혼이 상한 일이 없다. 오히려 요셉은 건강한 화살과 그 화살을 쓸 수 있는 강한 팔이 있어서 대적이 쏘는 화살을 항상 이겨냈다. 성도 여러분! 요셉과 같이 건강한 영의 화살과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힘 있는 영의 팔을 소유할 수 있기를 축원함.

 

. 요셉에게서 이스라엘의 목자가 난다(49:24).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는 틀림없이 메시아다. 유다 지파에서 말한 실로도 메시이고, 요셉에게서 날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도 분명한 목자다. 그러면 메시아가 둘이 난다는 말인가? 아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영적인 의미로 봐야 한다. 즉 유다는 혈통적인 면에서 메시아를 배출할 것이고, 요셉은 靈的信仰 면에서 장자의 명분을 가지고 메시아를 배출할 것을 가리킨다.

 

대상 5:1~2 “이제 이스라엘의 맏아들인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그는 맏아들이었으나 자기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그의 장자권이 이스라엘의 아들인 요셉의 아들들에게 주어졌더라. 계보는 장자권에 따라 계수할 것이 아니니라. 2) 유다가 그의 형제들보다 우세하였고 우두머리 치리자가 그에게서 났으나 장자권은 요셉의 것이더라.)” 아멘.

 

요셉은 출생 순서로 볼 때, 야곱에게서 열한 번째로 태어난 지각생이면서도 기라성 같은 숱한 형들을(르우밴, 유다..등등) 모두 제치고 당연 신앙의 일인자가 되었다. 실로 이렇게 되기까지는 숱한 시련을 지불하고 얻어낼 것이다.

 

. 요셉은 조상들보다 나은 축복을 받는다.

49:25~26 “그것은 곧 네 아버지의 [하나님]으로 말미암나니 그분께서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분께서 네게 복을 주시되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 놓인 깊음의 복과 젖가슴의 복과 태의 복을 주시리로다. 26) 네 아버지의 복들이 내 조상들의 복들보다 나아서 영존하는 산들의 가장 먼 경계에까지 이르렀도다. 그것들이 요셉의 머리 위에 임하며 자기 형제들로부터 구별된 자의 머리에 있는 관 위에 임하리로다”. 아멘.

 

여기서 父臾相(부유상)보다 나은 祝福을 받은 야곱은 그 축복을 요셉의 머리 위에 임하였다고 했다. 야곱은 요셉의 축복을 네 가지로 묘사하고 있다. . 위로 하늘의 복을 받았다. 이것은 성스러운 靈的祝福을 가리킨다. 아래로 源泉(원천)을 받았다. 이것은 物質的祝福을 묘사한다. 젖가슴의 복이 임했다는 것은, 子女養育하는 을 가리킨다. 태의 복을 주리라고 했다. 이것은 후손을 생산하는 복을 가리킨다. 실로 놀라운 복을 받았다.

 

11. 물어뜯는 이리인 베냐민

27절을 보면 “¶ 베냐민은 이리같이 먹이를 강탈하리니 그가 아침에는 탈취한 것을 먹고 저녁에는 노략한 것을 나누리로다”. 라고 하였다. 여기서 . 베냐민은 이리같이 먹이를 강탈한다고 했다. 이것은 베냐민의 亂暴(난폭)한 성격을 두고 묘사한 말이다. 실로 오늘날 교회의 성도들 속에는 베냐민처럼 이리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어 강탈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처럼 강탈하는 이리 같은 성도가 많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 못된 성격 모가난 성격은 남의 허물을 보면 卽時(즉시) 이리가 먹이를 강탈하는 것처럼, 난폭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이리 같은 신자는 하나님의 종의 허물을 놓치지 아니하고 강탈하는 이리처럼 亂暴한 짓들을 하며 주의 종을 난폭하게 괴롭힌다. 이와 같이 이리처럼 난폭한 신자들은 모두가 이리들이다.

 

. 다시 27절을 보면 그가 아침에는 탈취한 것을 먹고 저녁에는 노략한 것을 나누리로다”. 고 했다. 이리처럼 난폭한 베냐민은 아침에는 탈취한 것을 먹고, 저녁에는 노략한 것을 나눈다는 것이다. 베냐민이 왜 이렇게 남의 것을 탈취하는 난폭한 자가 되었을까? 이에 대해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부모와 형들의 過剩保護(과잉보호) 때문이고, 과잉(過剩)사랑 때문이라고 본다(42:38, 44:30~31, 43:34). 다시 말해 야곱은 自己生命과 같이 베냐민을 사랑했고, 형들도 자기의 자식들과 자기의 몸을 擔保(담보)할 만큼 베냐민의 생명을 아꼈으며, 요셉도 다른 형들보다도 베냐민을 다섯 배는 더 사랑했다. 확실(確實)히 과잉보호(過剩保護)는 자식을 망치기 쉽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로 생각할 것은 베냐민은 부모 형제들의 엄청난 잘 간직하지 못했다. 실로 사랑이란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받은 것을 지키는 것이 문제이다.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받은 것을 看守(간수)하지 못하면 오히려 사랑받은 것이 베냐민처럼 재앙이 된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의 주의할 것은 위에서 말씀을 들었듯이 항상 주의해야 한다. 할렐루야!

 

. 28“¶ 이들이 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니라. 이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을 축복하되 각 사람의 복에 따라 그가 그들을 각각 축복하였더라”. 아멘. 이는 아버지 야곱이 열두 아들들의 분량대로 축복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실로 야곱의 아들들은 각자가 자기의 믿음대로 준비된 그릇대로 축복을 받은 것이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각각 성도들은 자기의 신앙분량대로 축복을 받는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 29~33또 그가 그들에게 명령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내 백성에게로 거두어지리니 헷 족속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내 조상들과 함께 나를 묻으라. 30) 이 굴은 가나안 땅에 있는 마므레 앞의 막벨라 밭에 있노라. 아브라함이 이 밭을 헷 족속 에브론의 밭과 함께 사서 소유 매장지로 삼았으므로 31)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묻혔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묻혔으며 나도 레아를 그곳에 묻었노라. 32) 그 밭과 그 안에 있는 굴은 헷의 자손들에게서 산 것이니라, 하니라. 33) 야곱이 자기 아들들에게 명령하기를 마친 뒤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어 자기 백성에게로 거두어지니라”. 아멘.

 

29~33절의 핵심은 매장지에 대한 야곱의 유언이며 부탁이다. 야곱은 매장지를 말하면서 자식들에게 최후의 부탁으로 기록되어 있다. . 야곱은 매장지에 대해서 유언하면서 아들들에게 다시 한번 약속의 땅에 대한 신앙과 사상을 심어주고 있다(29~32). 우리는 여기서 야곱의 위대한 신앙 정신 두 가지를 명심해야 할 것이다.

 

. 야곱은 一生 동안 어느 곳에 살든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잊지 않고 그 약속의 말씀을 가슴 깊이 간직하면서 살아왔다. 이것은 우리의 信仰根本이요 표본(標本)이다. 실로 오늘의 성도들은 主日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얼마나 마음에 간직하며 살되 내 가족들 자식들에게 가르치며 사는 지요? 오늘 말씀을 명심하시길 바란다. 또한 우리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三代繼續(계속)해서 불리워진 것은 결코 偶然(우연)히 된 일이 아니다. 오직 信仰(신앙)傳授(전수)徹底(철저)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살롬!

 

2. 모세는 여기서 야곱의 최후를 두 가지로 의미 있게 다루었다.

. 33절에서 야곱이 자기 아들들에게 명령하기를 마친 뒤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어 자기 백성에게로 거두어지니라”. 고 했다. 여기서 야곱이 아들들에게 명령하기를 마친 뒤라고 했는데, 이는 야곱이 일생동안 자기 한 일을 모두 끝내놓고 유언하고 있음을 묘사한 말이다. 이것이 곧 마친 뒤이다(딤후 4:7~8). 실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기의 일생이 끝나기 전에 자기가 해야 할 일은 모두 끝내야 한다. 실로 자기의 할 일을 다 마치지도 않은 자는 죽을 권리도 없다. 자기가 맡은 사명을 끝내지도 않은 자가 어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는가?

 

성도 여러분! 자기 사명을 마치기 전에는 죽을 생각도 하지 마라. 오직 자기의 일을 다 해놓고 갈 생각하라! 예수님을 보라! 예수님은 생애 동안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치신 뒤 친히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셨다고 했다. (19:30, 23:46 參考).

 

. “야곱이 자기 아들들에게 명령하기를 마친 뒤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어 자기 백성에게로 거두어지니라”(33).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기운을 하나님을 위해서 모두 다 쓰고 죽는 것을 묘사한 말이다. 실로 야곱은 하나님을 위해서 또한 신앙을 위해서 자기의 기운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다 쓰고 잠들었다.

 

22:37~3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 [하나님]을 사랑하라. 38 이것이 첫째가는 큰 명령이요”, 라고 했다. 애청자 여러분! 우리는 모든 것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마음 판에 새겨야 한다. 주 하나님을 야곱처럼 사랑할 수 있기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할렐루야!

 

3. 兄弟讚頌이 될 유다(49:8~12).

야곱은 유다의 형제들의 찬송이 될 것이라는 豫言祝福을 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유다는 원수를 이겼기 때문에 형제들의 찬송이 되었다(8). “네 손이 네 원수들의 목을 잡을 것이요라고 했듯이 유다가 대적하는 원수를 이기고 제압하는 것을 묘사한 말이다. 실제로 사사기 1장을 보면 유다 지파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가나안 족장과 싸웠고, 가장 큰 승리를 거두었고, 가장 좋은 땅을 차지했다. 게다가 가장 많은 땅을 차지했다(26:22). 그런가 하면 유다 지파가 인구도 가장 많았다). 이처럼 성도된 우리가 악한 영들인 원수 마귀를 이기고 승리하는 성도는 모든 자들의 찬송이 될 것이란 점을 명심하시길 바란다.

 

. 유다는 형제들을 다스리는 탁월한 통치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형제의 찬송이 되었다(8). “네 아버지의 자식들이 네 앞에서 절하리로다”. 고 했듯이 聖經歷史를 보면, 유다 지파는 타 지파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항상 선두에 나섰던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유다 자신도 형제들의 대표로 활약했다. 부친 야곱을 설득시킬 때도 유다가 앞에 나갔고(43:3~10). 요셉을 설득시킬 때도 유다가 앞에 나가서 해결했다(44:18~34). 유다는 말하는 것만 탁월한 것이 아니라 자기 생명을 담보(擔保) 잡히는 희생정신 면에서도 탁월했다(43:9, 44:32~33).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 역시 형제를 통치하는 탁월성과 형제를 위해서 희생하는 탁월성을 지니고 있다면 능히 형제들에게 칭찬과 찬송의 소리를 들을 것이다.

 

. 유다는 사자와 같이 강했기 때문에 형제들의 찬송이 되었다(9). 유다는 형제들을 다스리는 탁월한 통치력 위에 사자같이 강한 威容(위용)을 지녔다. 그야말로 금상첨화(錦上添花). 독수리가 공중의 왕이라면, 사자는 지상에서 百獸(백수)의 왕이다. 유다 지파는 지상에서 사자와 같이 가장 강한 위용을 지니고 있어서 늘 형제들에게 칭송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도 유다와 같이 강한 위용을 가져야 함을 말씀하고 있다.

 

. 유다는 항상 홀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형제의 찬송이 되었다(10). “()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법을 주는 자가 그의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니라고 했는데, 이 말씀의 의미는 유다 지파가 계속(繼續)해서 왕을 배출(輩出)할 것을 묘사하고 있다’. 홀과 지팡이는 왕의 권위(權威)와 권능(權能)을 상징(象徵)하는 물품들이다. 실제로 유다 지파는 다윗을 왕의 첫 주자(走者)로 배출한 뒤에 계속해서 역대 왕들을 배출하였고, 남조 유다가 멸망하기까지 홀과 지팡이는 유다 지파를 떠나지 아니하였다. 이처럼 오늘 왕 같은 제사장들이여!’ 성도의 홀과 지팡이인 권세와 권능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아멘.

 

. 유다는 메시아를 배출시킬 자이기 때문에 형제의 찬송이 되었다(10). “실로가 오실 때까지라고 했는데 여기서 실로는 메시아를 가리키고 있다. 3:15에서부터 시작된 메시아에 대한 계시(啓示)의 노선은 한층 좁혀져서 계시(啓示)되고 있다. 즉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다는 계시의 廣威性(광위성)은 택함을 받은 유대인 전체에 미쳤지만, 이제 야곱의 예언으로 인해서 메시아에 대한 계시(啓示)는 유다 지파로 훨씬 더 좁혀져서 계시되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이제부터 유다 자손들은 메시아의 가문(문중)으로 등장해서 그 명분에 맞게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게 될 것이다. 특히 유다 자손 중에서 다윗 같은 분은 메시아의 문중을 크게 빛낸 성군이다. 여기서 유다가 메시아의 조상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원인은 어떻게 봐야 할까? 그것은 아무래도 그의 빼어난 희생 신앙에서 찾아볼 수 있다(43:3~10). 한가지 감탄할 만한 것은 야곱의 깊은 영력이다. 2,000년 후에 실현될 메시아의 성육신을 내다보고 있는 야곱의 영적 깊이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 유다는 풍성(豊盛)한 영화(榮華)를 누리기 때문에 兄弟讚頌이 되었다. 49:11~12 “그가 자기의 어린 수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자기의 나귀 새끼를 좋은 포도나무에 매리니 그가 자기 옷을 포도즙에 빨며 자기 의복을 포도의 피에 빨았도다. 12) 그의 눈은 포도즙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리로다”. 라고 했다.

 

위에서도 說明한 다섯 가지의 條件(조건)과 더불어서 하나님께 받아 누린 풍성(豊盛)한 영화(榮華)兄弟들에게 讚頌이 된 것이다. 오늘 우리 성도들도 유다와 같은 信仰路線을 붙잡아서 많은 성도들에게 간증(干證)과 칭송(稱頌)讚頌의 대상(大賞)이 되기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원함. 할렐루야!

 

結論 : 이처럼 살아가야 할 것을 알았다. 명심할 것은 야곱처럼 열두 아들을 잘 살펴서 좋은 점은 본받고, 나쁜 점은 고쳐서 하나님 앞에서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값진 신앙생활의 功績(공적)備蓄(비축)하라! 는 말씀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