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韓民國 未來를 위한 敎育의 改革을 위한 硏究 (10)

(韓國近代敎育의 始作과 發達의 歷史的 考察)(1884-1945)

칼럼리스트 金 昌 龍 牧師(하나님이디자인하신교회)

 

2 칼럼리스트 김창룡 목사(하나님이디자인하신교회).jpg

7. 일제치하의 교육상황

1)일제 전반기 교육상황

1910,8.29일 우리나라가 일본의 속국 이 되었다. 지구상에서 대한제국이 사라졌지만 우리민족의 가슴속에 한국 사람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라의 국력이 미약하여 속국이 되었지만 우리민족의 가슴에 심어진 복음의 진리와 사람을 사랑하는 교육의 열매는 자라고 있었다. 일제는 본격적으로 우리의 정신과 뿌리를 뽑기 위하여 식민화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우리를 도우며 헌신했던 선교사들도 국가적 정치적 마찰로 본국과 갈등을 일으키는 일 을 할 수 없게 되자 한 발짝 되로 물러나게 된다. 그러나 많은 선교사들은 국제적으로 그들이 몸소 섬기고 가르쳤던 우리민족을 위해 만반에 우리의 독립운동을 지지했다.

 

일제는 한일합방 이전부터 한국의 교회에서 경영하는 학교가 민족주의의 온상이라 여겨왔고 그 숫자가 공립학교보다 많으므로 사립학교를 통제할 방법을 모색한다. 그것이 바로105인 사건이다. 이 사건은 일제가 기독교인을 탄압학교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 운영주체들을 분쇄하기 위한 조작된 음모였다. 그들이 발표한 사건내용인 즉 조선의 총독이었던 데라우찌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사전 발견하여 이에 연류 된 105인을 척결하는 내용이다. 이사건의 공식명칭은 “데라우치총독 모살미수사건“이다. 일심에서 유죄판결 받은 자 가 105인이었다.

 

이사건 연루자 기소자가 123명중 82명이 기독교인 이었다. 일제가 한국기독교인들을 본격적으로 탄압하며 엄청난 과오를 저지른 것이다. 우리는 이 사건을 단순히 지나가서는 안 된다. 한국의 교육을 탄압하며 신앙의 자유를 탄압했던 인권을 유린한 사건이다. 최근 일제의 정신대로 끌려가서 모진고통을 당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우리의 할머니며 어머니들의 보상 문제가 어정쩡하게 넘어가려한다.

 

분명한 역사의식 이 없기에 어정쩡한 타협이 이루어져선 안 된다. 우리가 백년을 내다보면서 진정한 개혁을 하려면 정직한마음을 가지고 역사바라보고 인식해야한다. 우리기독교가 이제 미국의 선교의 바톤을 받아 전 세계를 향하여 달려 나가야하는 지금 우리기독교는 올바른 역사교육과 의식을 가지고 회개하며 부르짖어야한다.

 

당당하게 105인 사건이 조작된 음모이며 한국의 교회와 기독교인들 그리고 학교를 탄압 하여 민족의 정신을 일제의 식민화 하려했던 과오를 준엄하게 물러야한다. 그리고 분명이 역사에 기록하여 우리후손들에게 물려줘야한다. 한국기독교가 100주년행사를 치루면서 이 역사의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궁금하다. 이때 고문 과 폭행으로 피해를 입은 본인들과 가족들에게 일본은 어떻게 사과하고 위로했는지 궁금하다.

 

2)일제하의 교육정책

첫째 독립사상 억제와 우민화 정책 1919년의 통계를 보면 일제는 우리민족에게 우민화정책을 펼친 것을 발견 한다 .사상과 인성과 인문학의 교육보다 너희는 가난 하니 일찍 기술교육을 배워서 먹고 살아라. 지도자를 양성하지 말고 부려먹는 하부계층을 양성 하는 것이다. 1912년에서 8년만인 1919의통계이다. 국공립학교 경우 보통학교는 6개면에 1개소 정도 고등보통학교는 남자3개교 여자1개교 밖에 늘리지 않았고, 점문학교는 이름만 바꾸어 3년제가34년제가1곳 밖에 되지 않았다. 이는 한국인들은 자기들이 부려먹기 좋은 초등수준 까지만 교육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조선총독부의 정책이었다.

 

둘째 기독교 사립학교의 통제정책이다 당시 교회들이 운영하던 사립 초등학교들을 탄압하고 보통학교를 늘려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인 식민화 정책을 펼치기 위한 것 이었다. 셋째 교원의 자격을 강화하여 일제에 순종하며 일제의 정책에 따르는 교원을 양성하고 교장은 일본 사람들로 교체 감독 하게함.

 

넷째 교육과정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예배를 드리지 못 하게함. 성경, 지리, 역사를 가르치지 못함.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고 지리를 통해 전 세계 각 나라의 영역을 가르치면 이웃나라를 침략한 일본의 만행을 가르치면서 우리가 나라를 지켜야한다는 애국 애족의 정신을 가르쳐 왔다.

 

역사를 가르치면서 우리민족은 단일 민족으로서 과거 찬란한 문화와 강하고 힘 있는 지혜로운 민족이었음을 알려주며 중국, 일본의 속국이 아니고 동방의 빛을 비추는 찬란한 민족임을 가르쳐왔다. 세계관과 역사관을 닫아버리므로 민족의 미래를 닫아버림. 결국 우리민족은 자기들의 영원한 속국으로 만들려는 식민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사립학교 규칙을 정하여 조선총독부 가 만든 교과서와 커리큘럼으로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아야 학교를 운영 하게함. 그러나 기독교학교들은 계속해서 학교의 이념과 정신을 고수하며 일제에게 10년이란 유예기간을 요청한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과 유혹에 학교들이 생존해야하기에 무력에 따르게 된다. 지금은 어쩔 수 없으나 학교마저 문을 닫으면 앞으로 의 기회마저 없어지기에 기독학교들이 자진 폐쇄 하거나 일제의 통제아래에 들어가 새로운 인가를 받게 된다. 기독학교의 말살을 위한 까다로운 조건과 총독의 인가를 받도록 했다. 설립자, 이사, 교장, 교사들 까지도 인가를 받게 함으로 완전히 학교를 총독부가 장악하고 제5항의 교육과정 에서도 총독부의 지시대로 만 가르치게 되었다.

 

3) 일제의 인가를 받기 시작한 기독학교들

일제의 “개정사립학교규정”이 발표된 후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던 헨켄스(Miss ida Hankins)라는 남감리교 선교사의 보고서는 당시의 상황을 잘 대변하고 있다. “선교부에 의해 이만큼 자란 매일학교 제도는 지역을 순회하는 선교사들이 관리해 왔으며 매우 큰일을 감당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제도를 조정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일제 통치중에도 학생수가 2배로 늘었습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