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설교 모음

10년 전 이맘때는 'Y2K'라는 문제로 시끄러웠습니다.‘2000년’의 숫자를 컴퓨터가 인식하지 못해 대혼란이 일어난다는 주장 때문이었습니다. 일반사회는 물론이고 기독교계도 파장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때를 틈타 시한부종말론이 또다시 고개를 들기도 했지요. 성도들을 미혹시켜 재산을 바치게 하는 사이비단체들도 나타났습니다. 그곳은 지금도 버젓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다시 조용히 아기 예수의 탄생으로 돌아가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그분의 오심, 그 기쁨으로 충만해져서 진정한 소망을 이 사회에 던져 주어야 할 때입니다. 금년 성탄 설교도 그런 맘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편집자 주>

① 제목: 아들로 아들 되게

성구: 갈라디아서 4:4~7
A. 본문의 상황과 내용
1. 본문의 역사적 배경

갈라디아서는 사도바울의 전투적인 말투(1:2)로 시작하고 있다. 바울은 자기가 복음을 전하여 세운 갈라디아 지역 여러 교회들에게 “기독교를 유대교화하려는 어떤 자들”이 와서 다른 교훈을 가르친다는 소식을 듣고 이 편지를 썼다. 그들은 바울의 사도로서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들은 또한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도 믿어야 하지만, 할례도 받고 유대인들의 율법과 규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갈 4:10).

바울은, 사실은 전혀 복음이 아닌 이 ‘다른 복음’(1:6)에 강력히 열정적으로 맞선다. 그는 자신의 사도로서의 권위를 재확증하고, 은혜의 복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갈라디아의 교인들에게 율법주의(종)의 멍에를 다시 메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본연의 자유에 굳게 서라고 호소한다.

2. 본문 해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4절): 이 구절은 일정한 기간 동안 율법에 매여 있었던 암담한 상태가 끝났음을 암시한다. “보내다”는 헬라어 ‘에사포스텔로’는 아들이 하나님에게 귀속되어 있다는 것과 그를 보낸 실존적 공간, 즉 하늘나라를 염두에 두고 쓰여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묘사한 것이고,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음을 의미한다. 또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이라는 구절로 예수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의무를 가진 유대인임을 강조한다.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5절): ‘아들의 명분’에 해당하는 ‘위오테시안’은 ‘양자 됨’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아들 됨이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에 의한 것임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 -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제도와 율법을 순종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6절): ‘아들의 영’은 하나님의 영 또는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성령을 가리킨다. 바로 이 성령이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양자됨을 증거한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감히 입 밖에도 말하지 못할 ‘아빠’라는 말로 하나님을 친근하게 부르게 되었고 예전의 소원했던 관계에서 아주 가까운 관계로 전환되었다.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7절): ‘유업을 이을 자’는 ‘종’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누리는 모든 복을 소유한 자를 의미한다(롬 8:14-17).

특별히 바울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을 강조함으로써 우리가 양자됨이 자신의 행위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 은혜의 결과라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다.

3. 본문 메시지

사도 바울은 기독교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유업을 이를 자’라고 당정하고 ‘모든 것의 주인’이라고 확언하였다(4:1). 기독교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다 두 가지 정체성을 확고히 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의식이고 또 하나는 ‘주님의 제자’라는 자각이다. 첫째 것은 성령을 체험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식하여 자녀가 되며, 둘째 것은 주님의 말씀을 깨달으면서 주님을 따라 살아서 제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우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까닭은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장과 더불어 그러한 삶을 사셨기 때문이며, 나아가서 우리는 ‘그 아들의 영’ 곧 그리스도의 영, 부활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곧 우리의 영혼에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고, 그 결과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유업, 곧 구속의 사업을 이어받게 되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이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속사업을 주시기 위해 그는 오늘 오셨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B. 오늘의 상황과 본문 적용

1. 오늘의 상황
1) 아들의 모습이 아닌 종의 모습이 많은 세상

우리는 날로 증가해 가는 흉악한 범죄 때문에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끔찍한 사건들의 원인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 못할 부분이 있다. 그 중요한 사실 중 하나가 지금 함께 살고 있는 사회와 이웃에 강한 거부감과 반발심으로 불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어떤 일에도 즐거움이 없고 삶의 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마지못해서, 죽지 못해서 일을 한다면 거기에는 보람과 기쁨이 있을 수 없다. 종은 억지로 일한다. 그러나 아들은 어떤 일도 기꺼이 받아들이며 즐거운 마음으로 일한다. 종은 어떻게 하면 일 안 하고 농땡이를 부릴까 기회를 엿보지만 아들은 일할 것이 또 없는가 살핀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아들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고 봉사하는 이가 적고 자신의 이익과 욕심만을 챙기고, 적당히 때우면서도 왕창 한 몫을 잡으려는 종된 근성이 사람들의 저변에 깔려 있다.

2) 예수의 탄생을 단순히 역사적 사건으로만 보려한다.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예수 탄생의 의미를 “우리 죄를 사하시려고 오셨다” 정도로 이해하려 한다. 물론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함도 사실이지만, 좀 더 적극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구속 사업에 주인의식을 가지는 시발임을 자각해야 한다.

우리에게 약 2천 년 전 아기 예수로 오신 그분은 부활하시어 그리스도의 현재적 임재와 더불어 오늘날 하나님의 사업에 주인의식을 가지고 힘차게 일해 가야함을 가르쳐 주고 계신다. 우리의 초라하고 빈 마음이 아기 예수를 모신 마구간이 되는 것이 예수 탄생의 재현이요, 하나님의 구속사업의 시동이다.

이런 뜻에서 오늘날의 교회가 ‘모이는 교회’뿐 아니라 ‘흩어지는 교회’로 예수의 오심을 그곳에 알리고, 예수의 삶을 그 현장에서 만나게 하는 ‘흩어지는 교회’로 선회해야 우리 사회를 치유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

2. 본문 적용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심(4,5절) - 하나님의 시기 판단은 언제나 완전하다(4절). 로마 제국의 잘 뚫린 도로들, 헬라어의 광범위한 통용,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한 갈망(행 17:22~23) 등은 모든 것이 때가 충분히 찼다(4절)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본문 4, 5절은 설교 전반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신 사실과 보낸 목적으로 간단하게 선언하고 6, 7절은 본문의 후반부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알 수 있는 아들의 영을 보내셨을 뿐 아니라 우리로 당신의 유업을 가질 수 있는 특권을 주심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아기 예수 가 아들로 오신 목적은 우리에게 자유(요 8:31~36)와 심판(요 5:19~29)을 주신 것임을 상기시키고 더 진정한 뜻은 아들이 되게 하는 것(엡1:5)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적용하면 좋겠다. 보조 성구는 요한복음 8:31~36, 5:19~29, 에베소서 1:15절이다.

3. 설교 작성을 위한 제언

12월 첫 주, 교회는 성탄 트리와 장식으로 마음이 한껏 부드럽고 저마다 선물을 준비하기에 바쁘다. 그리고 성탄절 메시지는 너무나 오래 듣고 또 들어서 교인들도 아기 예수 탄생 이야기는 훤히 다 알고 있다. 그래서 성탄 메시지는 될 수 있는 대로 짧고 간결하게 아기 예수가 오셔야 하는 이유와 목적을 우리의 삶과 결부시켜 요점화하여 하는 것이 좋을 성싶다.

1) 제목: ‘아들인가 종인가?’, ‘종의 자유와 아들의 자유’, ‘아들의 자유를 주시려고’, ‘하나님의 유업을 주시려고’ 등

2) 찬송: 126장, 121장, 116장, 115장 순으로 부르되 중간에 독창이나 목관 5중주 등을 삽입하면 더 좋다.

3) 성탄 환영사
사회: 오늘은 아기 예수 나신 날, 진심으로 생신을 축하합니다.
남자: 기쁜 노래와 즐거운 춤으로 당신의 나심을 축하합니다.
여자: 가슴에 넘치는 환희로 당신의 오심을 환영합니다.
사회: 손뼉치며 장단 맞추며 당신의 오심을 환영합니다.
남자: 인류 구원을 위해 오신 예수를 뜨겁게 환영합니다.
여자: 주여, 환영하오니 떠나지 마시고 우리와 함께하소서.
사회: 당신의 영광을 만방에 드러내소서.
다함께: 권능을 펼치시어 우리를 구원하소서. 할렐루야!

4) 신앙시: “누가 능히 할 수 있느냐?”
사회: 사람들아!
북은 싸맬 수 있지,
거문고는 줄을 풀어놓을 수 있지,
그러나 누가 종달새를 명하여
노래를 그치게 할 수 있느냐?
회중: 사람들아!
인간의 입은 강제로 봉할 수 있지,
예리한 붓도 꺾을 수 있지,
그러나 누가 능히 그 영혼을 명하여
하나님 찬양을 그치게 할 수 있느냐?
사회: 사람들아!
공책에 쓴 글씨는 지울 수 있지,
돌비에 새긴 업적은 지울 수 있지,
그러나 누가 능히 내일에 사는 자를 명하여
그 가슴 속의 희망을 지울 수 있느냐?
회중: 사람들아!
넘치는 강물은 막을 수 있지,
정의도 나쁜 것으로 선전할 수 있지,
그러나 누가 능히 헤롯을 시켜
아기 예수의 탄생을 막을 수 있느냐?

이 날만은 주보를 크고 예쁘게 만들어 주보 자체가 아름다운 카드처럼 보이면 훨씬 축제의 분위기를 손끝에서 느껴질 것이다. (예닮교회, 김호식 목사)

** 김종렬 외, <1995년 교회력에 따른 예배와 강단>, 대한기독교서회, 1994, pp.533~539

 

② 제목: 여하간 재림

성구: 마가복음 13:33~37

제가 버지니아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때입니다. 더운 여름의 저녁이면 우리 꼬마들은 함께 숨박꼭질 놀이를 합니다. 이 놀이에는 한 가지 규정이 있습니다. 술래는 눈을 감고 1부터 100까지 세어야 합니다. 그 동안에 꼬마들은 각각 숨습니다. 100까지 세고 나면 술래는 눈을 뜨고 소리칩니다. “숨었든 안 숨었든 여하간 찾으러 간다”

오늘 우리는 대강절을 맞았습니다. 이 숨박꼭질의 이야기처럼 말씀의 제목을, 준비야 되었든 안 되었든 ‘여하간 재림’이라고 정했습니다.

1. 우선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을 돌이켜 생각해 봅시다. 그 거룩하고 조용한 밤에 천사들은 노래하고 마리아는 강보로 아이를 싸서 구유에 뉘었습니다. 그 특이한 장소에서 그 아기예수를 통해 하나님은 친히 이 세상에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1) 이 날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할 준비를 갖추고 있지 못했습니다. 여관에는 예수님을 위한 방이 없었습니다. 헤롯왕도 예수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부자와 권세 있는 사람들 모두가 준비하고 있지 못했습니다.

(2) 그러나 매우 적은 수의 사람들이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음과 영혼들을 예수님께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세리들과 죄인들과 창기들은 예수님의 자비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저는 자들과 소경과 문둥병자들과 중풍병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워했습니다.

(3) 그러므로 오늘, 성탄절을 며칠 앞두고 우리는 과거를 기억합니다. 예수님이 첫 번째 오셨을 때 심히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준비하고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혀 준비를 갖추고 있지 못했음을 기억합니다.

(4) 우리가 현재의 입장을 말하기 전에 한 가지만 더 말해야 하겠습니다. 첫 번째 성탄절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아 만난 이야기가 아닙니다. 미처 생각도 못했을 때 사람들에게 홀연히 나타나 주신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준비하고 있었든지, 준비하지 못하고 있었든지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찾아오신 하나님 앞에서 그들은 얼버무릴 수가 없었습니다. “예” 아니면 “아니오”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2. 이 사실을 바탕으로 현재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1) 대강절에 우리는 주님을 향하여 우리의 눈을 뜹니다. 지금도 이 세상의 일을 간섭하시며 바로 이 순간에도 이 지구 위의 역사에 적극적이신 주님을 향하여 우리는 그러합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주님을 믿습니다. 바로 이 시간에도 우리가 준비를 했든지 못했든지 우리의 생명과 생활 속으로 들어오시고자 하시며 이 세상일을 간섭하시고자 하시는 주님을 믿습니다.

(2) 우리에게로 오시고자 하시는 이 주님은 믿음의 눈으로만 보여집니다. 우리는 이디에서라도 주님을 봅니다. 이런 경험은 없습니다. 쓸쓸함을 느끼고,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신의 옛날에 마음이 사로잡혀서 죄의식, 수치, 자신의 약함과 고통스러웠던 일에 스스로 괴로워 한 경험 말입니다. 그러한 때 어느 순간에 주님의 용서를 깨닫게 되고 쓸쓸한 마음속에 사랑이 밀어닥치는 것을 느껴본 경험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쓸쓸하지 않고 사랑을 받고 있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주님이 찾아 들어오시는 경험을 하신 것입니다.

(3) 주님이 찾아오셔도 배척을 당하시는 순간들도 있습니다. 실상을 말해 봅시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든지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 때 우리는 귀를 막고 이 주님의 임하심으로부터 숨으려고 합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으나”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조직적으로 주님을 배척해 오는 세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천천히 그러니 분명하게 우리들의 세대는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확신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들이 갖고 있는 이 오만과 교만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값을 치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3. 제가 드릴 말씀은 이것으로 마지막이 아닙니다. 다시 드릴 말씀이 있으므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1) 모든 일의 장래는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마지막의 승리는 죽음이나 마귀에게로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슬픔과 눈물, 부정과 억압이 마지막의 승리를 거두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즐거운 기대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승리하실 것입니다.

(2) 우리는 지금 경기의 중간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경기가 어떻게 끝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던 그분, 지금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계시는 그 분은 이 땅 위에 하늘나라를 세우시기 위하여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는 안전할 것입니다. 우리는 숨은 곳에서 나와서 마침내 자유롭게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Thom W. Blair)

 

③ 제목: 이치에 안 맞는 성탄절

성구: 누가복음 2:10~11

1. (1) “이치에 안 맞는” - 성탄절에 관하여 쓰는 말로는 참으로 이상한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탄절을 진진하게 본다면 성탄절은 이 세상의 이치에는 맞지 않습니다. 성탄절이 아름답거나 아름다운 이야기라면 아무도 성탄절을 그토록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2) 그러나 성탄절의 기적이 처음 있었을 때 그 기적은 참으로 신비한 것이었습니다. 자기들의 양떼를 보살피고 있었던 그 몇 명의 목자들은 실제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사업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3)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밤에 빛이 밝게 비쳤습니다. 천사의 음성이 있었습니다(눅 2:10-11). 여러 세기 동안 유대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이 말씀을 듣고자 기다려 왔습니다. 만일 우리가 라디오나 텔레비전에서 세계가 갖고 있는 온갖 문제가 마침내 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이 소식에 감격하여 흥분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4) 우리들보다 지혜로운 사람들이 이 평화의 자사를 만나겠다고 기대한 곳으로 갔었습니다. 헤롯의 궁전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목자들은 언덕 위에 세워진 한 작은 마을로 인도되었습니다. 베들레헴이라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대상들의 숙소인 산 허리에 위치한 한 굴로 안내되었습니다. 그곳에 이르러 보니 한 시골 여인의아기가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사건을 오랜 세대 만에 생겨난 기적으로 믿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다시 돌이켜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성탄절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입시다.

2. 이 아기는 세상이 참으로 필요로 하고 있었던 세 가지 중요한 것들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1) 베들레헴의 이 아기는 세상에 새생활을 갖다 주셨습니다. 당시의 종교는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도덕적 부패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어두움에 싫증을 느끼고 지쳐 있었습니다. 밝은 빛을 몹시도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생애는 밝은 빛을 온 세상에 비추었습니다. 마침내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이 아기의 태어나신 날을 축일로 지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웃을 향하여 불붙는 듯한 착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더욱 가치 있는 시민이 되고, 더 나은 이웃이 되겠다는 의욕들이 모아졌습니다. 더욱 성실하고 사랑을 베푸는 남편과 아내와 부모가 되고 싶어했습니다. 이 모든 일은 결과적으로 이 아기의 나심으로써 생겨난 일들이었습니다. 하나님에 의한 이 여러 가지 선물은 온 인류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리고 새롭고 사랑이 가득한 마음으로 주시는 선물입니다.

(2) 마리아가 잉태하여 낳은 이 아기는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셨습니다. 이 아기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뒤로 세상은 전과 같지 않게 되었습니다. 역사는 이 예수님이 남겨두고 가진 교훈에 따라 진행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교훈은 진리이며 효력이 있고 높은 수준의 것임이 증명되어 왔습니다. 이 교훈에 의한 역사는 앞으로도 더욱 힘차게 움직여 나아갈 것입니다.

(3) 이 아기는 세상에 소망을 갖다 주셨습니다.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신 예수님은, 미움의 세상에 사랑을 주셨습니다.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의롭다하시는 인정을 받게 하셨습니다. 질병, 불구, 귀신의 세력을 꺾어 이기게 하셨습니다. 더러워지고 쓸모없이 되어가는 세상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소망이 성탄절에 시작되었습니다.

성탄절은 이 세상의 이치에는 안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너무 높고 너무 귀하고 너무도 바라던 것을 너무도 큰 신비 속에서 주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George M. Docherty)

 

④ 제목: 바치고 주는 절기

성구: 마태복음 2:1~11

성탄절은 하나님께 바치고 이웃에게 무엇인가를 주는 절기입니다. 일년 가운데 다른 어느 때보다 친절을 베풀고 동정해 주며 인심을 후하게 갖는 때입니다. 하나님께 바치고 이웃에게 줌으로써 우리는 다른 어느 때에 경험하지 못하는 특별한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1. 이 성탄절에 예수님께 예물을 바친 훌륭한 한 사례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동방으로부터 찾아온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바친 사실입니다. 아기예수께 예물을 드린 사건은 이 첫 번째 성탄절을 경축하는데 한 몫을 했습니다. 아기예수께 드린 이 예물들은 값지고 적합했습니다. 황금은 주님으로 왕에게 드리는 예물이었습니다. 유향은 지체 높은 분들이 사용하는 기름으로 된 향이었습니다. 몰약은 아득한 옛날 고귀한 분이 세상을 떠날 적에 그 몸이 썩지 않도록 시신에 바르는 값진 약품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 예물들은 예수님을 고귀한 분, 즉 왕으로 받들어서 드린 것들이었습니다.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께 경배하려고 먼 길을 왔었기 때문입니다(2절).

2. 이 첫 성탄절에 하나님은 세상에 참으로 귀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세상의 구원을 위한 독생자 예수님을 주셨던 것입니다.

(1) 가장 적절한 시기에 주셨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2) 가장 적절한 선물이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3) 가장 고귀한 선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4) 사람을 귀하게 여겨서 주신 선물이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2)

 

3. 그러면 오늘 우리가 취할 태도는 무엇이겠습니까?

(1) 동방에서 찾아온 박사들처럼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구유에서, 목수의 가정에서, 식민지 나라에서 나셨으나 예수님은 왕이셨습니다(요 18:37).

(2) 하나님께서 죄인된 우리를 고귀하게 여겨서 고위한 선물인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고전 6:20).

(3) 우리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행위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 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

성탄절은 하나님께 받은 것을 생각하면서 감사를 드리고 우리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을 왕처럼 고귀하게 영접하며 받은 사랑에 응답으로 우리 서로 사랑하는 절기입니다. (Chevis F. Horne)

 

<예화 자료>

1. 조용한 탄생

보어럼(F. W. Boreham)은 영감을 주는 많은 이름난 책들을 썼습니다. 그는 80세가 넘어서 또 한 권의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의 제목은 <내가 잊었던 말들>이었습니다. 이 책의 서문에서 그는 전에 썼던 책들에게 말하지 않았던 것들을 생각나는 대로 썼다고 말했습니다. 출판되자 가장 은혜스럽고 자극을 주는 그의 책들 가운데 한 권이 되었습니다. 이 책은 그의 생애를 돌이켜 보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게 되었는지를 말해 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이 언제 그처럼 아름답게 그의 영혼 속에 자리를 잡으셨는지에 대해서는 말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단지 생애의 늦은 때에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면서 그 일생이 줄곧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어 왔음을 말했습니다. 일생 동안, 특히 늙어가면서 점점 지혜로워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순간엔가 조용히 자신도 모르게 자신 속에 탄생하셔서 자기의 영혼 속에 자리를 잡으셨다고 그는 회고 했습니다. 그 사실은 훌륭하며 이에 대하여 자신은 감사한다고 말했습니다.

2. 최대의 욕망

몇 년 전입니다. <최대의 욕망>이라는 소설이 출판되었습니다. 이 소설에는 한 젊은 작가가 뉴 잉글랜드로부터 뉴욕으로 옵니다. <최대의 욕망>이라는 제목으로 쓴 소설의 자료를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따라다니면서 묻습니다. “당신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애매한 대답을 하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기술자가 되고 싶어요”라고 대답하면 “왜 기술자가 되고 싶습니까?”라고 다시 묻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사람들이 가진 ‘최대의 욕망’을 알아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려웠습니다.

아마키플링(Rubyard Kipling)은 그의 물음에 대답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심한 병에 걸렸습니다. 안절부절이었습니다. 간호원이 물었습니다. “원하시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그는 소곤거리는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을 원합니다” (George A. Buttrick)

** (②~④까지)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교육부, <1984 목회자료>,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교육부, 1983, pp.52~59

 

⑤ 제목: 예수님의 탄생

성구: 누가복음 2:8~20

오늘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과 같이 은혜 받기를 원하는 말씀의 제목은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사람마다 생일이 있고 그 날을 기억하며 기뻐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내 생일을 몰라주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또 나라마다 명절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8.15광복절은 분명히 큰 명절입니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에게는 그날이 통곡의 날입니다. 이것처럼 개인의 생일이 많은 사람에게 기쁨이 되기도 어렵고, 한 나라의 명절이 다른 나라의 명절이 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사실을 기념하는 성탄절은 개인에게나 나라에게만 명절이 아니고 온 세상의 명절입니다. 또 일시적인 명절이 아니라 세월이 감에 따라 성탄절은 점점 커지는 명절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탄절은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땅 위에서만 아니고 천국에까지 영원한 명절입니다.

1. 예수님이 어떤 분이기에 성탄절이 큰 명절이 되었습니까?

(1) 예수님은 가장 높으신 분입니다.

몇 해 전에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그 때에 한국의 온 백성이 그를 환영했습니다. 그 이유는 미국 대통령이 이 나라를 방문한 것이 우리를 도와주겠다는 약속이고 김일성에게는 ‘가만있어’라고 견제해 주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미국의 대통령만큼 높으신 분입니까? 예수님은 우주에서 가장 높으신 분입니다. 한 나라를 다스리시는 분이 아니시고 하늘나라까지 다스리시는 대왕이십니다. 그분이 낮고 천한 인생들을 찾아와 주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가장 고마우신 분입니다.

사람들은 땅 위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네 가지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됩니다. 이 네 가지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개인도 단체도 나라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문제들을 해결해 주십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근심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근심을 만나면 ‘아이구’하고 한숨을 지으며 ‘아무개 때문에’라며 남을 원망하고, ‘이 놈의 세상 되대로 되라’ 저주하고 타락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어 주님이 전해 주신 복음을 믿는 자마다 근심이 생기면 하나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겸손한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힘으로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돌보아 주옵소서”

그러면 성령님께서 마음에 응답을 주십니다. 마음에 응답이 오면 기쁨이 샘솟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밝아져 영의 눈이 뜨이게 되고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라는 지혜가 생깁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문제는 해결되고 생각도 못한 복이 뒤를 따라옵니다. 그래서 근심이 변하여 찬송이 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질병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무서운 병이 들었습니다. 의사가 머리를 갸우뚱하며 “조직검사를 해야겠는데요”하면 ‘암이구나. 아이구, 난 죽었다’하고 육신이 죽기도 전에 마음이 죽습니다. ‘아무개 때문에 이 병이 났어’그러면서 남까지 저주하며 신경질을 부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찾아와 그 마음에 은혜를 주시면 무릎 꿇고 “하나님 내가 병이 들었나이다” 기도를 합니다. 그러면 ‘이 병이 났나? 내 욕심이 지나쳐 교만하고 남을 시기하고 벌을 받았구나’ 범한 죄가 생각납니다.

“하나님 이 죄를 용서해 주세요.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지옥가지 않아야 하겠사오니 용서해 주세요”

병을 고쳐달라는 것보다 죄를 용서해 달라는 말이 먼저 나옵니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시고 권능으로 낫게 하여 주시면 ‘이제부터는 바로 살겠습니다’ 마음에 결심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마음에 응답을 주십니다. “네 병을 고쳐주마” 이렇게 마음에 응답이 오면 기쁨이 생깁니다. 기쁨이 생기면 입에서 찬송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의사가 주는 약이 효과를 내고 모든 것이 효과를 내어 건강이 빨리 회복됩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죄악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죄악문제를 해결해 주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내가 의사요, 가장 똑똑한 줄만 알았습니다. 예수 믿고 나니 내가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진리의 교훈을 듣고 사랑의 빛이 비칠 때에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아 회개를 시작합니다. 과거에 사람 노릇하지 못한 것이 분하여 “하나님, 이 죄인을 용서해 주시고 바로 사는 복을 주옵소서” 울며 기도할 때에 하나님은 “네 죄를 용서하여 주노라” 사죄의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넷째로 예수님은 죽음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죽음은 세 가지고 어려운 문제입니다. 첫째 무섭습니다.

“말 안 들으면 죽여버려”

“아이구, 살려만 주시면 무엇이든지 할게요”

‘죽인다면 벌벌 떠는 것이 인생입니다. 죽음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둘째는 죽음은 슬픕니다. 죽으면 예쁘던 얼굴과 몸이 땅 속에서 묻혀 썩어버리니 죽음은 슬픕니다. 셋째 죽음은 외롭습니다. 이렇게 죽음은 무섭고 슬프고 외로우니 세상 사람들은 겁을 내고 이 죽음 문제를 해결할 자도 없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믿지 않는 사람들은 육신이 죽어서 무덤문이 열리기 전에 그 영혼이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을 모릅니다. 이것이 가장 무서운 죽음입니다. 누가 이 죽음 문제를 해결해 주겠습니까? 예수님만이 해결해 주십니다.

(3) 예수님은 가장 무서운 분입니다.

예수님은 고마운 분만 아니라 가장 무서운 분입니다. 가롯유다는 예수님을 3년 반을 모시면서 기사를 행하신 것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러고도 가롯유다는 은 30냥에 예수님을 죽음에 팔아넘겼습니다. 그러나 가롯유다는 잘 살아보지도 못하고 양심의 가책을 견디지 못하여 나무에 목을 매었습니다. 그리고 땅에 떨어져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나와 죽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믿다가 돈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의 이름에 욕을 돌리고 남에게 손해를 끼치고 교회에 괴로움을 주면 예수님의 심판이 옵니다. 예배당 안에서 장사하여 이를 남기려는 사람은 다 악마의 졸도라고 내쫒아야 합니다. 오늘날 예배당에서 도적질하는 사람도 종종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심판이 무섭습니다.

2. 예수님은 세상에 어떻게 오셨습니까?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기적 가운데 오셨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것은 인류 6천년 역사에 한 번밖에 없는 기적입니다.

천사가 하는 말이 “마리아여..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락 무궁하리라”(눅 1:30~33)

여러분, 세상에서 아기를 낳기도 전에 아들을 낳을 줄 알고 먼저 이름을 지어놓고 이 아들을 어느 대학을 마치게 하여 변호사를 시킬 것이라는 계획을 세우고 낳는 법이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오시기 전에 벌써 천사가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최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잉태하기 전에 세상에서 하실 일을 모두 밝힌 기적 중에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에 목자들이 들에서 양을 지키며 밤을 새는데 천사들이 내려왔습니다. 목자들은 깜짝 놀라 떱니다. 홀연히 하늘의 천군천사가 나타난 할렐루야 합창을 부릅니다. 목자들은 얼이 빠지고 말았습니다. 인류 역사 이래 아기가 날 때에 하늘의 천사가 내려온 일이 언제 있었으며 하늘의 천군이 내려와 합창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에 전부가 기적입니다.

이 광경을 본 목자들은 베들레헴까지 찾아가 경배하고 돌아오면서 “여러분, 우리는 구주 예수님이 나신 광경을 보았습니다” 만민에게 전도를 시작하며 찬송을 불렀습니다. 이것이 새벽송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에 구유에서 나신 초라한 모습만 보지 말고 기적 중에 태어나신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앞으로 재림하실 때에 예수님은 상상 못할 기적 중에 오실 것입니다.

3. 누가 탄생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나 뵈었습니까?

성경을 잘 가르치던 서기관도 아닙니다. 저 잘났다고 뽐내던 외식쟁이 바리새인도 아닙니다. 나라를 다스린다고 호령하던 헤롯왕도 아닙니다. 로마의 총독 빌라도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탄생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나 뵈었습니까?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입니다. 계급으로 말하면 노동자입니다. 이들이 먼저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목자들이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난 이유가 무엇입니까?

(1) 목자들은 생명을 사랑하고 책임에 충성하였기 때문입니다.

목자들은 남이 다 자는 밤에 양떼에 생명을 사랑하므로 밤을 밝히며 지키는 책임에 충성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재림하실 때에 누구에게 상을 주시겠습니까?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이 상을 받으라” 놀고 얻어먹는 자나, 돈이 많고 지위가 높은 자도 예수님을 환영하지 못합니다.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책임에 충성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을 모실 자격이 있습니다.

(2) 목자들은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들은 이 말을 특별히 잘 들으십시오.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책을 보거나 설교를 듣다고 옳다하고 깨달았으면 그 시간에 ‘나도 이렇게 살아야지’ 결심이 생기게 됩니다. 결심이 생기면 결단을 내려 그 시간에 끊을 것을 끊고 행할 것을 행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결단하여 실행하기까지의 시간이 길면 길수록 성공이 느립니다. 그러므로 빨리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마음에 느낍니다. ‘목사는 그렇게 설교하는 법이야’하면서 결심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성공이나 발전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일이 잘 되면 감사하고, 일이 못되면 회개를 하고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느낀 것이 있으면 결심을 하고 결심을 했으면 그 시간에 실천해야 하나님의 복이 선물로 임합니다.

목자들은 천사들의 지시를 받은 그 시간에 일어나 베들레헴까지 달려갔습니다. ‘천천히, 밝은 다음에 조반이나 먹고 가자’ 우물쭈물하지 않았습니다. 그 시간에 베들레헴으로 달려갔습니다.

(3) 목자들은 전도하였습니다.
목자들은 아기 예수님을 만나보고 나와서는 “여러분이여, 우리가 메시야 예수님을 만나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습니다.‘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입을 봉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4) 목자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목자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가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찬송을 부르면서 갔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삽시다.

성탄절은 우주에서 가장 큰 명절인데, 이 명절을 바로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하나님께 감사하며 지켜야 합니다. 만물을 주시고 독생자까지 주신 하나님 고맙습니다.
- 예수님을 생명의 구주로 믿고, 임금님으로 순종하면서 성탄절을 지켜야 합니다.
- 목자들처럼 생명을 사랑하고 책임에 충성하면서 성탄절을 지켜야 합니다.
-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면 즉시 순종하는 마음으로 성탄절을 지킵시다.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성탄절을 지킵시다.
- 사람에게는 전도하면서 성탄절을 지킵시다.
이렇게 성탄절을 똑바로 지키는 자는 마음과 가정에 천국이 이루어지고 이런 사람이 많은 나라에 천국이 임하나니 한국이 이렇게 복 받는 나라가 되고 여러분과 가정이 천국의 복을 받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김창인, <절기설교집>, 충현교회 출판부, 1986, pp.399~413

                     2009년 12월 14일 (월) 07:41:10 장운철 kofkings@ame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