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발달은 한편으로는 새로운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인간과 세계에 대한 해석의 지평을 넓혀 주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과 세계를 통전적으로 보는 시각을 상실하게 만드는 경우도 없지 않다. 예를 들어서 고대 희랍에서 에코노미아(economia)는 공동체를 조화롭게 운영해 나가는 기술이라는 맥락에서 돈의 운영을 파악하는 개념이었다. 그러나 현대 경제학에서 에코노미(economy)는 공동체의 조화로운 운영이라는 지평이 희미해 져 버린 상태에서 돈을 효율적으로 운영하여 이윤을 창출해내는 일종의 재정학으로 위축되어 버렸다. 한마디로 말해서 에코노미아가 가지고 있던 도덕적 토대 곧, 바른 인간관계수립이라는 지평이 에코노미에서는 사실상 사라져 버린 것이다. 경제학이 전문적으로 발달하면서 보다 넓은 지평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이 점은 법의 영역에서도 발견된다. 통상적으로 고대 희랍사회에서 법을 의미하던 희랍어 노모스(nomos)는 아주 폭넓은 의미의 지평을 지니고 있었다. 노모스는 자연 안에 내재한 자연법칙 혹은 창조질서의 체계를 의미하기도 했고, 모든 인류의 마음 속에 기록되어 있는 도덕법을 의미하기도 했고, 모세의 율법과 같은 성문화된 법전을 뜻하기도 했고, 사회의 실정법체계를 의미하기도 했다. 따라서 사람들이 실정법을 가리키는 맥락에서 노모스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도 자연스럽게 성문화된 도덕법전, 마음의 도덕법, 자연법칙 등을 연상하여 떠 올리면서 그 지평 안에서 실정법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 법학에서는 법학이 종교학이나 윤리학으로부터 독립하여 전문화되면서 종교적 지평을 상실함을 물론 윤리적 지평조차도 상실해 가고 있다. 법은 최대한 종교적이고 윤리적으로 독립된 채 중립을 유지하면서 합리적 공정성을 추구하는 분과로 제시되었고, 법은 이와 같은 독립성에 대하여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사실 다원주의종교관과 상대주의 윤리관이 대세가 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어느 특정한 한두가지 종교나 윤리적 입장에 의존할 수도 없게 되어 있기도 하다.

종교적 지평과 도덕적 지평을 사라질 때 법을 지도할 이념적 표준은 하나밖에 남지 않는다. 그것은 곧 사회적 다수의 일반의지다. 문제는 사회적 다수의 일반의지가 무엇을 추구하느냐 하는 것이다. 대체로 사회적 다수의 일반의지는 그 시대를 지배하는 시대사조의 논리를 거스리는 법이 없다. 이 말의 의미는 현대사회의 사회적 다수의 일반의지는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시대사조인 실용주의(pragmatism)의 논리를 넘어서지 못한다는 뜻이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몇가지 중요한 법제화시도들에서 이와같은 흐름을 읽어낼 수 있다. 이미 낙태의 문호를 넓게 열어 놓고 있는 모자보건법을 더 넓게 낙태를 허용하는 방향으로 개정하려고 집요하게 시도하는 보건복지부의 개정노력이나, 부시행정부에 의하여 금지되어 있던 배아복제지원법을 오바마행정부가 허용하자마자 체세포배아복제를 곧바로 허용한 국가생명윤리위원회의 결정이나, 사실상 혼수상태의 환자를 안락사시키는 것을 허용하는 존엄사관련사건들에 대한 법원들의 판결이나 입법청원 등에서 우리는 인간의 생명의 보호라는 보편적 가치 보다는 건강한 성인들의 복리적 이익을 추구하는 사회적 다수의 일반의지의 자력에 끌려 들어가고 있는 법의 현실을 목도하게 된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은 이처럼 도덕적 토대를 상실한 채 사회적 다수의 이기적 욕구에 휘둘려서 표류하고 있는 한국의 법조계를 준엄하게 비판의 목소리를 발해야 하며 바른 법은 인류 보편의 가치를 담지한 바른 도덕적 토대 위에 수립되어야 한다는 점을 일관성있게 강조해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