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고 나거든 나의 비문에는 '주를 섬기면서 살다간 사람'

 이라고 적어달라"

  바른소식을 전하는 방송 JTNTV.JPG 바보 의사

그는 1968년 당시 100원하는 담뱃값만도 못한 월 보험료 60원에 뜻있는 사람들과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설립하여 1989년 전 국민에게 의료보험이 확대될 때까지 20만 명 영세민 조합원에게 의료혜택을 해 주었습니다. 국가보다 10년 앞선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의료보험이었습니다.

 

그는 뇌경색으로 반신이 마비될 때까지 무의촌 진료를 다녔습니다. 서울대, 부산대 의대 교수, 부산 복음병원 원장을 지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방 한 칸 없었습니다. 자신의 소유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그를 이렇게 불렀습니다.

 

그는 바보라는 말을 들으면 그 인생은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인생의 승리는 사랑하는 자에게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주님과 환자만 섬긴 작은 예수’.. 그 바보 의사가 바로 장기려 박사입니다. 장기려 박사가 19951225일 성탄절 새벽 14585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셨을 때 한국의 언론은 한국의 슈바이처또는 살아있는 작은 예수가 우리 곁을 떠났다고 아쉬워했습니다.

 

그는 어두운 밤과 같은 그 시대에 밝은 빛을 비추며 주님과 병든 사람들을 섬기면서 겸손하고 가난하고 따뜻하게 사신 분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분의 삶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는 주님만을 섬기며 겸손하게 사셨습니다.

 

1947년 김일성대학 의과대학 교수 겸 부속병원 외과 과장으로 부임할 때 주일에는 일할 수 없다는 조건으로 부임했고 환자를 수술할 때는 항상 기도하고 시작했습니다. 그 분의 삶의 모토가 예수를 본 받고 섬기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기를 싫어했고, 자신이 칭송받기를 싫어했고, 오직 주님을 높이고 섬기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는 이웃과 나누며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평생 집이나 재산을 소유하지 않고 무소유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의 삶의 목적은 나눔과 베풂이었습니다.

평생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월남 후인 19515월부터 부산에서 창고를 빌려 간이병원을 설립하고 피난민들과 전쟁부상자들을 무료로 진료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복음병원의 시작이었습니다. 그의 삶의 철학은 사랑 실천이었습니다.

 

사랑은 지고선이다. 사랑은 도덕의 도덕이요, 생명의 생명이다. 사랑의 철학은 생명철학의 일대 혁명이다. 사랑은 아름다운 것, 사랑은 영원한 것, 사랑은 생명 자체다이런 그의 사랑 실천의 삶은 사회에 강한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이상규 교수는 그의 생애와 삶은 한국교회 현장에 떨어진 거룩한 폭탄이었다고 표현했습니다.

 

아내에 대한 그의 극진한 사랑은 육체나 환경을 초월한 영혼과 영원의 사랑이었습니다. 195012월 평양의대병원 2층 수술실에서 그는 밤새워 가며 부상당한 국군 장병들을 수술하고 있을 때 갑자기 폭탄이 병원 3층에 떨어졌습니다. 국군들은 모두 재빨리 철수해야 했습니다. 그 바람에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생이별을 하게 되었고 일평생 빛 바랜 가족 사진 한 장을 가슴에 품고 아내를 그리워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재혼를 권했지만 그는 언제나 똑같은 말을 되풀이 했습니다.

 

"한 번 사랑은 영원한 사랑입니다. 나는 한 여인만을 사랑하기로 이미 약속을 했습니다. 내가 평양에서 결혼할 때 주례하시는 목사님께서 우리 부부를 앞에 세워놓으시고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두 사람은 백년 해로하라.' 재혼하는 것은 백년 뒤에나 생각해 볼 일입니다. 나는 사랑하는 나의 아내와 영원히 살기 위해서 잠시 동안은 그저 혼자 살겠습니다!"

 

그가 부인을 그리며 1990년에 쓴 망향편지는 우리들의 가슴을 에이게 합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당신인 듯하여 잠을 깨었소. 그럴 리가 없지만 혹시 하는 마음에 달려가 문을 열어 봤으나 그저 캄캄한 어둠 뿐허탈한 마음을 주체 못해 불을 밝히고 이 편지를 씁니다. 여보." 미국에서 북한을 많이 도운 그의 제자가 북한당국과 합의하여 중국에서 장기려 부부를 만날 수 있도록 주선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어코 그 기회를 사양하였습니다. 그런 특권을 누리면 다른 이산가족의 슬픔이 더 커진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는 결국 빛 바랜 사진을 보면서 아내를 그리워하다가 만나지 못하고 작고했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남긴 유언은 "내가 죽고 나거든 나의 비문에는 '주를 섬기면서 살다간 사람' 이라고 적어달라" 는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