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 강해(31) 아 4:9절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2.
아 4:9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예수님의 죽으심과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믿으면 구원받고 영생을 얻는 것이지 왜 내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해야 합니까?” 이런 반문을 하는 분들은 왜 자기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해야 하는지 도대체 그 이유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 이유의 심각성을 모르기 때문에 그 이유를 알고자 하지도 않습니다.
여러분은 이 심각성을 아시겠습니까? 자기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는 신자들은 아직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거듭났다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참예함으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내 옛사람의 죽음으로 경험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죽으심은 나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내 새사람의 부활로 경험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은 나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그분 자신을 위한 일입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원래 하나님이셨기에 죽으실 일도 부활하실 일도 없으신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우리의 죽음과 부활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우리의 옛사람을 예수님과 함께 죽이시고 우리의 새사람을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시키시므로 함께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앞에, 하늘에 시민권을 가진 자로, 주님의 신부로 영원히 함께 살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목적을 안다고 하면서도 아직 예수님과 함께 죽은 옛사람을 장사지내지 않습니까?
염려하고, 불평하고, 미워하고, 판단하고, 시기하고, 혈기내고, 항상 기뻐하지 않고, 항상 기도하지 않고, 범사에 감사하지 않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지 않는 옛사람을 왜 장사 지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염려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시기하지 않고, 혈기내지 않고, 항상 기뻐하고, 항상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새사람이 부활되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시온의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이미 예수님과 함께 죽은 옛사람을 장사지내지 않는다면, 부인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새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승천하여 천국에 갈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갓 거듭나 아직 영적 어린아이의 단계에 있는 분들은 “주일을 지키지 말라,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말라”는 옛 사람에 대해서는 죽고 “주일을 지키라,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새사람은 부활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말씀에 대해서는 승천하여 천국의 안식을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이대로 살다가 죽는다면 천국에서 이 두 말씀을 이룬 상급만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613가지의 말씀에 대해 죽음을 경험하고 부활을 경험하여 승천에 이른다면 613가지의 말씀을 이룬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차이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러니 이 세상에 살 동안에 더 많은 말씀에 대해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여 승천에 이르시기 바랍니다. 이런 수준에 이른 신부에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아 4:9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나의 신부’에서 호칭이 하나 더 늘었습니다. “나의 누이”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을 때만 “나의 누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승천을 경험한 신부는 이제 주님의 생명과 본성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나의 누이”라는 형제간의 호칭을 갖게 된 것입니다.
히브리서 2:11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승천을 경험한 신부가 주님의 생명과 본성과 하나가 되어 “나의 누이”가 될 때 주님의 마음을 빼앗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마음을 빼앗고 싶습니까? 주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빼앗고 싶습니까? 주님의 마음을 빼앗아 여러분의 마음에 모시고 싶습니까? 빼앗고 싶은 욕망은 그 대상이 너무 귀하고 가치 있기 때문에 자신이 차지하고 싶은 것입니다.
빼앗기 위해서는 침노해야 합니다. 침노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침노하기 위해서는 자기 소유를 다 팔아야 합니다. 자기 소유란 자아 곧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빼앗으려면 자아, 곧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다 팔고 주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이 주님의 모든 말씀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항상 기뻐하라는 주님의 마음을 빼앗으려면 항상 기뻐하지 말라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다 팔고 침노해야합니다. 불평하지 말라는 주님의 마음을 빼앗으려면 불평하라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다 팔고 침노해야합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 더 나아가 주님의 신부가 된 후에 매 순간 주님의 마음을 빼앗고 계십니까? 아니면 매 순간 사탄의 마음을 빼앗고 계십니까?
염려하라는 사탄의 마음을 빼앗으려면 염려하지 말라는 신부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다 팔고 침노하면 됩니다. 세상과 돈을 사랑하라는 사탄의 마음을 빼앗으려면 세상과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신부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다 팔고 침노하면 됩니다. 범사에 감사하지 말라는 사탄의 마음을 빼앗으려면 범사에 감사하라는 신부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다 팔고 침노하면 됩니다.
지금도 사탄을 사랑하기에 사탄의 마음을 빼앗으려고 주님과 하나가 된 자기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다 팔고 지옥을 침노하는 미련한 신부들이 있습니다. 사탄은 자신과 결혼하여 영원히 지옥에서 함께 살 신부를 찾고 있는데 거듭났다는 주님의 신부들이 주님의 마음을 팔아 잘도 사탄의 마음을 빼앗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시온의 성도님들은 이와 반대로 자신 안에 있는 사탄의 마음을 팔아 주님의 마음을 빼앗으시기 바랍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구체적으로 무엇이 주님의 마음을 빼앗았을까요?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입니다.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승천의 단계를 경험한 신부의 눈은 오직 주님만을 바라봅니다. 신부의 눈으로 한 번 보는 것은 숫자적인 한 번이 아니라 인격적인 한 번 곧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신부가 주님의 마음을 빼앗을 수 있습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기에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다 파는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는 주님의 모든 말씀에 이제는 순종만 하겠다는 태도입니다. 승천의 단계를 경험한 신부는 이와 같이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눈과 주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목의 구슬 한 꿰미를 가졌기에 주님의 마음을 빼앗은 것입니다. 광야를 통과하고 요단을 건너 가나안에 입성한 시온의 성도님들은 승천의 단계를 경험했기에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눈과 주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목의 구슬 한 꿰미를 가지므로 신랑되시는 주님의 마음을 다 빼앗으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