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내다보며 조금만 더 참고 감내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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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31일 영신예배 모습


교회사가인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초대교회 시대에 이교도들은 전염병에 감염된 환자들을 내쫓아 버렸고 죽은 시신들을 오물처럼 취급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전염병 환자들을 찾아가서 기도해 주고 돌봐 주었다고 합니다. 기독교인들의 돌봄만으로도 사망률을 크게 줄였고 이로 인해 기독교가 로마에 공인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종교사회학자인 로드니에 의하면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사랑과 봉사 때문에 기독교가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게 됩니다. 팬데믹 시 초대교회는 예배를 드리는 것 못지않게 환자들을 돌보는데 치중을 하였습니다.

 

종교개혁시대에는 더 그랬습니다. 특별히 제네바에서 칼빈을 중심으로 한 종교개혁자들은 예배 못지않게 목사의 환자 심방을 의무화 하였습니다. 흑사병 감염을 두려워하여 환자의 심방을 거역하는 목사는 면직할 정도로 환자 심방 사역에 치중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때 용기 있는 불랑쉐 목사, 마티우 목사 등이 자원하여 흑사병 환자들을 찾아갔지만 곧 감염이 되어 사망을 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제비뽑기를 하여 한명은 병원심방을 하고 또 한명은 코론티난(quarantine, 격리 당해 있는) 가정에 심방을 하게 했습니다. 당시에도 감염병을 예방하기 위하여 격리를 시켜 놓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에게도 위로와 격려, 소망을 주는 심방을 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와 종교개혁시대에도 사제들은 허들링 목회를 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영혼만중요시한 것이 아니라 육체의 생명도 존중하였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환자들을 시 당국이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직접 돌보고 치료해야한다고 주장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전염병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대처를 한 것이죠. 이러한 종교개혁자들의 목회사역의 교훈을 오늘 우리 현실에는 어떻게 반영을 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예배가 교회의 생명이고 본질이기 때문에 반드시 예배를 지키면서도 환자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의료진들이 환자들을 다 돌보는 현실에서는 교회는 방역수칙을 잘 지키고 교회에서 확진자를 안 내는 것이 간접적으로 의료봉사에 참여하는 것이고 환자들을 돌보고 이웃을 배려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교회가 우리만의 이너서클, 우리만의 카르텔로만 존재하려고 했을 때 무더기 확진자를 낸 사례가 많았습니다. 요즘 회자되고 있는 특정 선교회나 단체 등 코로나감염병과의 전쟁 상황에서 무더기 확진자를 내어서 얼마나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는지요. 광주의 어떤 교회는 계란투척까지 당하였습니다. 이제부터라도 교회는 다시 자성하고 집단 확진자들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더 이상 한국교회 브랜드와 이미지를 추락시키면 안 됩니다.

 

정말 소탐대실의 실수였습니다. 요즘 시대는 아무리 제품이 좋아도 기업의 이미지가 추락해버리면 그 회사의 물건을 사지 않습니다. 복음이 유일한 구원의 진리인데 우리의 실수로 복음의 진보를 막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땅을 치고 가슴을 치고 싶습니다. 우리가 복음의 진보를 위해서라면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우선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만 얻으려고 무리수를 두는 것보다 조금 절제하며 감내하는 것도 생각해 봐야합니다.

 

정부의 방역에 미숙함이 있고 교회가 잠시 부당한 대우를 받는 면이 있다 하더라도 복음의 진보, 넓게 보는 선교전략, 다음세대까지 이어갈 교회 부흥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조금만 더 참고 감내할 수 없을까요. 우리만의 소리를 내고 규탄하는 것보다 초대교회 지도자들처럼, 종교개혁자들처럼 국민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며 감동을 주는 교회가 될 수는 없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