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저는 경건 연습을 다시 시작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읽고, 거기서 은혜 받은 말씀을 외우고, 외운 말씀을 저의 기억 속에 저장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씹고 갈아 으깨서 계속해서 다시 반복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건의 연습은 그 자체만이 목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를 넘어서기도 합니다. 제가 경건을 연습하는 것은 단순히 제가 하나님을 뵈옵기 위해서만은 아니고 개인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저의 말씀 연습은 저의 기억이 말씀으로 채워져서 저의 정체성이 말씀으로부터 그리고 말씀으로 인해서 생겨나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서 제가 변하기를 소망합니다. 제가 이렇게 저 자신이 바꾸어지기를 원하는 것은 말씀이 명령하는 바를 실천할 능력이 제 속에 없다는 것을 절감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전에 집사람이 소년원에 봉사를 나갈 때에 저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제일 힘든 때는 소년원을 나와서 사회로 돌아오려는 원생이 헨드폰 전화를 가르쳐 달라고 할 때라는 것입니다. 그는 사회에 나가 보아도 따뜻하게 맞아 줄 사람이 없어서, 저희 집을 찾아 올 마음이 있는 것이고, 저희는 그를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년원에 봉사를 가서 어떤 아이를 돌본다고 해도 그 애가 우리 집 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경지에는 한 없이 못 미칩니다. 우리가 기윤실 회원으로서 여러 가지 사회적 실천을 하게 됩니다. 이때에 우리는 스스로에게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과연 충분한가 하고 생각해 보면 그렇지 못하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계발 독재 시대를 넘어 가면서 정의와 사랑도 복잡해져서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분별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안다고 해도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 깊이로 그리고 그 넓이로, 진정 실천할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아쉬움과 어려움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들을 돌보는 사역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우리가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하는 분들도 있고 어떤 분들은 한국 남성과 결혼한 분들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이든 쉽지 않은 삶을 살아갑니다.

얼마 있지 않으면 주님께서 임마누엘하신 하나님으로서 우리 곁에 찾아오신 것을 기념하는 성탄절이 옵니다. 흥겨운 크리스마스 캐롤과 화려한 추리와 흥청거리는 백화점이 연상됩니다. 또한 함께 하는 연인들 그리고 따뜻한 집에 둘러앉은 가족들도 떠오릅니다. 그러나 또 한 편 바로 그렇게 흥겹고 화려하기에 더욱 외롭고 고통스러운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탄절은 과연 어떤 절기인가요? 그리고 어떤 절기이어야만 하는가요? 이 성탄절에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주님이 보시기에도 충분한가요? 하나님이 우리 곁에 오셨는데, 우리는 어디에 있나요? 누구 곁에 있나요?

임마누엘하신 하나님을 기뻐합니다. 찬양합니다. 그러나 또한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임마누엘의 무게에 짓눌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말씀을 읽습니다. 그리고 외우려고 합니다. 저의 과거에 대한 기억, 그리고 그 기억에 비추어서 미래를 전망하면서 행하게 되는 현재의 계획과 활동들. 이런 것들로만 구성된 정체성이 아니라,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주님의 말씀으로 채워진 정체성을 받기 위함입니다. 저는 임마누엘하신 아기 예수를 기다립니다. 그 분께서 제 곁에 오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러나 또한 저도 누군가의 곁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