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변질 이유…친권력 전통과 교권주의 그리고 맹신도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 6:3)

 최근 제자교회, 갈보리교회, 사랑의교회, 그리고 증가성결교회뿐만이 아니라 과거 충현교회, 소망교회, 금란교회, 개봉감리교회, 한국대학생선교회, 각 교단 총회 등 한국교회 일각에서 발생한 여러 사건들을 돌아보면서 '바른 교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일단 이 사건들이 크게 우려스러운 이유는 목회자들이 문제의 중심에 우뚝 서 있다는 점이며, 아울러 수천년 교회 역사의 그늘에서 끈질기게 기생하여 온 '교권주의'라는 독버섯을 또다시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교권주의란 부패한 교회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일반 신자들과는 다른 특별한 성직이라고 강조하면서 권력을 세력화하고 제도화하여, 부와 명예 그리고 세속적 성공을 추구하며 진리를 왜곡하고 교인들 위에 군림하려는 사상을 의미합니다. 신약 성경은 교회 내에 공존하는 이런 잘못된 종교 지도자들이나 불순한 세력들을 '바리새인', '자칭 선지자라 하는 이세벨',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 또는 '사단의 회'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어느 나라에서든 교회가 외형적으로 성장하고 부흥할 때는 거의 예외 없이 이 교권주의가 기승을 부려 왔습니다. 중세 유럽 교회와 17-18세기 영국의 교회, 그리고 오늘날 미국의 일부 대형 교회들이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커진 그만큼 더 큰 이권과 부수익이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수백 개의 크고 작은 교단들로 사분오열된 것도 실제로 진리 문제로 갈라선 경우는 매우 드물고, 거의 다 이들 교권주의자들이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거나 또는 교권 세력 사이의 밥그릇 싸움으로 기득권에 따라 이합집산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교권주의의 뿌리 속에는 인간의 탐심과 죄성이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교권주의자들은 입으로는 언제나 하나님과 교회를 말하고 있으나, 뒷전으로는 자신들의 사익 추구를 최우선으로 합니다. 그리고 이런 악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며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왜곡시켜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한국교회 교권주의의 뿌리와 그 실태를 간략히 살피고, 이에 대한 기본적인 대처 방안도 일부 논의해 보고자 합니다. 아울러 여기서 말하는 '한국교회'란 일반적인 의미로, 한국의 많은 교회들을 뜻합니다. 즉 한국의 모든 교회를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한국교회의 친권력 전통과 교권주의

먼저 한국교회 교권주의의 뿌리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멀리 일제 식민지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본격적으로 전파된 시점이 바로 구한말로부터 연결되는 일제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제의 집요한 속박과 탄압 속에서 한국교회는 기초적인 성장을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조선의 교회가 직면한 가장 크고 현실적인 난제는 바로 신사 참배 문제이었습니다. 물론 이에 저항하여 주기철 목사님처럼 순교를 당하시거나 투옥을 당하신 많은 목회자들도 있었으나, 유감스럽게도 거의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은 적당한 핑계를 구실로 하여 신사 참배에 굴복했습니다. 나중에는 아예 단체로 떼를 지어 일본 본토 신궁에까지 찾아가서 참배를 하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교단 총회장과 지도급 인사였던 목사님들이 자진하여 전투기와 기관총 대금을 헌납하고, 심지어 교회 종까지 떼어다 바쳤으며, 성경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황국 신민 사상을 전파하고, 기독 청년들을 전쟁터에 내모는 정치 선동을 하는 등 적극적인 친일 행위를 하였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즉 이분들은 필요하면 파렴치하게 예수뿐만이 아니라, 덤으로 민족까지도 팔아넘길 수 있음을 일찍이 손수 보여 준 것입니다.

초기 한국교회 교권주의의 문제는 여기서부터 증폭되고 확산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상당수의 순수한 지도자들은 투옥을 당하거나 국외로 망명을 하거나 순교를 당하게 된 반면에, 일제에 협력하고 변절한 목회자들이 교회 내에서 승승장구하며 주도권을 잡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일반 신도들이야 일제의 칼날 아래서 숨도 제대로 못 쉬며 그저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암울한 시절이었으니, 교단 정치 따위에 신경을 쓸 여유가 있었을 리가 만무합니다.

이렇게 일제의 비호 속에서 교회 내의 권력을 유지한 친일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더욱 일제에 협력하였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초기 성장기에서부터 매우 건강하지 못한 취약 체질을 갖게 된 것입니다. 즉 대부분의 교회들이 변절된 지도자들의 그늘 아래서 성장했다는 사실입니다.

1938년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총회장 홍택기 목사의 주도로 열린 제27차 조선 장로교 총회는 신사 참배 반대자들을 회의장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며, "신사 참배는 국민의례이다"라고 가결시켰습니다. 그리고 바로 부총회장 김길창 목사는 23명의 노회장들을 데리고 평양 신사에 가서 시범적으로 신사 참배를 하였습니다. 어떤 목사들은 부산 송도 앞바다에서 일본 우상 천조 대신의 이름으로 세례까지 받기도 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신사 참배를 끝까지 반대한 약 200여 교회가 파손되었고, 2,000여 명이 투옥되었으며, 그중에 50여 명은 옥중에서 순교하였습니다.

물론 이 시기에도 음양으로 믿음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고군분투하신 목사님들도 적지 않게 계셨습니다. 그리고 비록 신사 참배가 큰 죄이기는 하지만, 그것 하나로 신앙을 버리고 완전히 배교하였다고 정죄해서도 안 될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존경하는 한경직 목사님 같은 분도 당시에는 신사 참배를 하였다고 고백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이 신사 참배를 계기로 하여 성장기 한국교회의 지도부가 신앙적으로 순수하지 못한 세력에게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제에 협력하던 이런 변절된 목회자들이 모인 노회나 총회 등이 갈수록 정치화하고 세력화한 것이 한국형 교권주의의 뿌리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울러 이런 한국교회의 친일파 전통과 토양이 초기 교권주의를 고착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것은 부인하기가 힘든 역사적 사실입니다.

변신 그리고 또 변신

여기에 추가하여 심각한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당시 한국 사회의 정치권, 경제계, 언론계, 군부 등과 마찬가지로 이들 친일 교권주의자들은 해방 후에도 철저한 친일 청산과 회개 없이 계속적으로 기득권을 유지하였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세상이 바뀌자 태생적 변신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과거 일본 제국 대신에 이번에는 미국과 자유당 독재 정권에 유착하여 세력을 견고하게 확장했습니다.

마침 공산주의에 대한 대처가 최우선적으로 시급한 어수선한 시절이었기에, '반공'이라는 매우 훌륭한 명분을 이용하여 과거 '친일'이라는 수치스런 행적을 적당히 얼버무리고 감출 수 있어서 변신의 기회도 아주 좋았습니다. 그 덕분에 고사 직전의 매국 친일파들이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모두 열렬한 '애국 반공 투사'들로 새롭게 부활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성지가 바로 지금의 한국 땅입니다.

이런 역사적 토양 속에서 아직도 선거 때가 되면 일부 목사님들이 설교 중에 특정 정치 세력을 지원하는 못된 버릇을 가끔 보여 주시는데, 아마 권력에 아부하던 옛 습성을 미처 버리지 못한 생생한 증거일 것입니다. 이분들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구약 성경의 깊은 의미를 다시 새겨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하여튼 다시 권력을 유지한 대다수 친일 교권주의자들은 제대로 진심을 담은 공식적 회개조차 없이 오히려 순수 세력인 출옥 성도들과 목회자들을 압박하고 내몰며 교권의 칼을 휘둘렀습니다. 그래서 해방 뒤 출옥 성도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회개 운동이 친일파 인사들의 반발로 큰 성과 없이 무산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경남 지역 고신 교단의 설립도 이런 일련의 사건들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모두가 잘 아시는 내용일 것입니다.

더구나 장로교 총회는 신사 참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제명하고 추방시켰던 한부선 선교사를 해벌(解罰)한다는 결정을 했습니다. 하지만 범법자이며 가해자였던 한국교회가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거나 참회하지 않고, 오히려 무고한 피해자에게 해벌을 통보한 것은 적반하장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이 역시 참된 반성과 회개를 모르는 친일파 지도자들의 철면피한 역사 인식과 교권주의적 발상이 낳은 기막힌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필자는 이런 저급한 교권주의자들을 단순히 '친일파'라고 규정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감이 있다고 느낍니다. 적어도 이들에 대한 보다 정확한 표현은 '기회주의자'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필요 시 언제든지 예수는 물론이고 민족과 영혼까지 팔아 가며 친일뿐만이 아니라 친미, 친독재, 친군부, 그리고 친재벌 등 어떤 변신도 불사해 왔기 때문입니다.

이런 불행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일제 시대 이후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극심한 교권주의에 의하여 휘둘린 한국교회는 정의를 추구하며 약하고 억눌린 자들의 편에는 한 번도 제대로 서지 못하고, 언제나 부와 권력을 가진 강자의 편에 서 왔다는 신랄한 비판에 마땅히 변명을 하기 힘들게 된 것입니다. 단지 개혁 교회 내의 일부 양심 세력들만이 교권주의를 거부하고 저항해 왔을 뿐입니다.

한국적 교권주의의 악습

이렇게 세상이 바뀌고 정권이 여러 번 교체된 이후에도 한국교회의 교권주의자들은 혈연, 학연 그리고 지연 등의 인맥을 이어 가며 교묘한 줄타기를 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매우 성공적으로 잘 지켜 왔습니다. 물론 이들 모두가 자신들의 권력을 자식들이나 친인척에게 물려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문제가 매우 심각한 것은 이들 교권주의자들이 세계 교회사에 보기 드문 한국적 악습들을 교회 내에 뿌리 깊게 심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우선 목회자를 위한 과도한 권력 집중이 한국교회 특유의 나쁜 관습입니다. 담임목사가 '주의 종'이라는 명분으로 교회 내에서 사실상 입법, 사법, 행정 등 삼권을 모두 쥐고 마치 '중세 교황'처럼 행세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개혁 교회 안에서 어떤 직분자도 신도들 위에 군림할 권한은 없습니다. 신약 시대에 사는 모든 신자는 '왕 같은 제사장'이며, 그런 면에서 직분에 관계 없이 신자들 모두가 대등한 '성직자'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계적으로 매우 희귀한 일로써, 한국교회의 거의 모든 교단들이 합창이라도 하듯 십일조를 율법처럼 문자적으로 의무화하여 중대형 교회마다 돈이 쌓이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자국에서는 십일조를 의무화하지 않는 건전한 외국 교단들도 유독 한국에 들어와서는 십일조를 챙깁니다. 이렇게 넘치는 돈으로 성장주의와 물량주의를 추구하며 영업을 크게 확장하여, 전세계 50대 초대형 교회 중에서 가장 큰 교회를 포함한 무려 27개 교회가 한국 땅에 좌판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교권주의자들은 교회 공금을 자기 주머닛돈으로 쉽게 착각합니다. 그래서 툭하면 교회 공금을 횡령하거나, 아니면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 자기 주머니를 만족시킵니다. 자신이 시무하는 교회 집회에서 몇 번 설교를 하고서 강사료 명목으로 1,000만 원이나 챙겼다고 소문이 난 어느 목사님 이야기는 그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요즘은 외부에서 하도 시끄럽게 떠든 덕분에 그래도 다소 개선되고 있지만, 교회 재정 처리 역시 담임목사의 입김이 너무 강하고 아직도 불투명한 부분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어떤 목사님은 은퇴를 위한 교회를 짓겠다는 명분으로, 교회 돈을 무려 200억 원이나 빼 가고 교회 장부를 아예 불살라 버렸다는 소식도 들려 옵니다. 이렇게 법과 절차를 무시하고 교회를 개인 회사처럼 운영하는 것 역시 한국형 교권주의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입니다.

거기에 추가하여, 선거 부정이 상습화해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교단 선거에서 자신들이 당선되기 위해 돈으로 표를 매수하는 악한 행위가 그것입니다. 만일 외국 목회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전혀 믿지를 못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다른 목회자들을 매수한다는 것은 차마 상상도 못할 엄청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리스도인이기를 포기한다면 가능하겠지요. 그런데 이런 부끄러운 현상이 한국교회 내에서는 비일비재합니다.

다음으로는, 당연히 담임목회자들의 교회 세습을 거론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지구촌 어디를 둘러보아도 한국교회처럼 광범위하게 세습을 자행하는 교회들은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친족들에게 특혜를 준다는 면에서, 이 역시 사실상의 성직 매매와 크게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교회가 이미 기업화했음을 잘 보여 주는 증거입니다.

물론 이외에도 더 많겠지만, 거짓된 교권주의자들이 교묘한 말로 신도들을 속이며 자신들의 배를 불리며 부와 이권을 축적하고, 교회 내에 기생하며 교인들을 착취하여 오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어두운 실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여튼 다른 나라에서는 쉽게 찾기 힘든 이런 악습들이 교권주의의 그림자 속에서 거의 관습화하고 제도화한 것이 기형적인 한국교회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이들은 거룩한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의 세속적 가치관을 그대로 추구하며 이를 성취하기 위해 불의한 수단들을 거침없이 쓰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필자가 한국교회를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 지구촌에서 가장 부패한 교회라고 서슴지 않고 지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없고 세상과 짝하여 목사와 건물만이 위세를 부리는 바람난 교회, 이것이 바로 고멜의 모습입니다. 또한 오늘날 교권주의에 짓밟히고 세속적 거품으로 가득 찬 한국교회의 슬픈 한 단면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교권주의의 동역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권주의에 적극 협조하고 지원하는 강력한 동역자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 교권주의자들의 충실한 제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맹신도들입니다. 이들은 목사를 따르는 일이 바로 예수를 따르는 일과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분들의 안목은 매우 특이합니다. 그래서 목사가 교회 공금을 횡령하고, 교단 선거에 돈을 뿌리고, 여신도와 간통하고, 자식에게 교회 세습을 하는 등 하여간에 무슨 짓을 해도 별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옆에서 보는 사람들도 분통이 터질 정도인데, 이들만은 그렇게 충직할 수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하고 놀라울 정도입니다.

더군다나 한국의 교권주의자들은 대부분 위선적인 인사들이고, 그들 스스로 내세우는 세탁된 학력이나 경력 역시 알량하기 그지없습니다. 세속적인 기준으로 보아도 교인들의 수준에 훨씬 못 미치는 조잡한 인물들이 목사직이라는 겉옷으로 성직자처럼 위장하고, 유명인으로 행세하며 거짓된 입술로 경건을 말하고, 순진한 신도들 위에 군림하며 기만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교권주의에 잘 길들여진 맹신도들은 겸허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참된 주의 종들은 외면하고, 오히려 자기들이 드린 헌금으로 호의호식하면서도 자신들을 힘으로 억누르는 이런 거짓된 종교 업자들을 더 좋아하고 그들에게 충성을 바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이해하기 힘든 일이 비단 한국교회에서만 일어난 일은 아닙니다. 이미 오래 전에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깊이 한탄한 바와 매우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고후 11:20)

이런 일만 보더라도, 허탄한 인생들이란 정말 어쩔 수가 없는가 봅니다. 겉모습만 보면 모두 똑똑해 보이는데, 희안하게도 영적인 문제로만 가면 갑자기 이상하게 변합니다. 여기에는 대학 교수도, 국회 의원도, 장관도, 판사도, 장성도, 언론인도 거의 상관이 없습니다. 우선 주변의 이단 종파들을 한번 살펴보십시요. 얼마나 많은 멀쩡한 분들이 그 줄에 서서 애쓰고 있는지, 정말 답답한 일입니다.

그래서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의미를 더욱 확신케 되기도 합니다. 영적으로 지혜로운 자는 태산이라도 기필코 넘어가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저 작은 지푸라기 하나에도 이를 핑계삼아 쉽게 걸려 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맹신도들의 안쓰러운 모습입니다. 하여튼 앞으로 이 맹신의 문제는 교권주의를 해소하는 일에 가장 큰 장애가 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됩니다.

교권주의를 끝내려면

사실 교회가 정화되려면, 제도의 개혁만으로는 불가능함을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목회자와 신도들 자신이 우선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물론 이는 옳은 말이고 우리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목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고칠 수 있는 제도적인 악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이는 매우 지혜롭지 못한 일이 될 것입니다.

먼저, 최근에 자주 언급된 것처럼 모든 교회는 개혁 교회다운 정관을 만들고 이를 통하여 모든 직분자의 권한과 의무의 한계를 명확히 설정하고 지켜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럴 경우에, 목회자나 장로들의 독주와 교권 남용을 크게 해소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담임목사나 시무 장로의 임기도 물론 여기에 포함되면 좋을 듯합니다.

또한 담임목사의 시녀로 전락되기 쉬운 당회를 늘 감시하고 견제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상대적으로 소수 모임인 당회를 이용하여, 전체 교인의 권리를 짓밟고 월권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일반 교인들이 참여하는 제직회나 공동의회의 감사 기능과 권한을 크게 강화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각 교단의 노회나 연회, 그리고 총회 등의 핵심 임원들은 원칙적으로 평생 단임제로 하면 좋을 듯합니다. 그래서 한 번 임원을 했던 분들은 다시는 교단 정치에 나서서 계속 세력화하는 일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즉 한 번 봉사한 것으로 만족하시고 깨끗히 물러서시라는 뜻입니다. 이럴 경우 어느 특정인들이 파벌을 이루며 지속적으로 교단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교회를 개혁하기 매우 힘든 이유 중 하나는, 개혁의 대상인 정치 목사들이 교단의 지도급 자리에 눌러앉아 돈과 인맥으로 세력을 구축하고 평생 교권을 흔들며 개혁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교회 내 부정과 부패에 대한 단호한 치리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교단 선거에 돈을 뿌리거나, 교회 공금을 유용하거나, 또는 도덕적으로 치명적인 잘못을 범한 직분자들은 반드시 해임 처리하여 다시는 교회 정치나 직분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조치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이에 저항하거나 회피하는 교권주의자들이 있다면, 기독교 언론이나 인터넷 매체 등을 통하여서라도 끝까지 추적하고 감시하며 고발을 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소명에 따라 순수하게 헌신할 준비가 된 분들만이 목회하시기를 권고하고 싶습니다. 비록 주님을 위해 죽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주님을 위해 한 번 바르게 살아 보겠다는 결연한 각오조차 없이 함부러 목회에 나서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생계나 치부의 수단으로 목회를 하는 불행한 일도 반드시 사라지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것입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자!"

독재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사람은 단순하고 무식한 대중들이고, 교권주의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교인은 영적으로 무지한 신도들입니다. 사실 지각 있는 신자들이 모인 교회라면, 누구도 교권을 함부러 휘두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나 교권주의자들에게 힘을 실어 주는 사람들은 외부인들이 아니라 바로 개교회의 맹신도들이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신자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 깨어 있어야만 비로소 교권주의를 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깊이 모르는 목회자는 평생 외식을 할 수밖에 없고, 성경을 제대로 모르는 신도들은 평생 맹신을 벗어나기 힘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늘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그 가르치심을 성실하게 실천하는 신자들이 되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 말씀 한 구절 때문에 고민하기도 하고, 때로는 가슴을 치고, 때로는 고난도 불사하고, 그러나 결국은 그 말씀의 능력과 위로 가운데 하늘의 소망과 기쁨을 이웃에 전하는 참된 제자의 길을 겸허히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거짓된 선지자들은 백성들이 영육으로 죽어 가도 언제나 평안하다고 외칩니다. 그러나 정말 지금 한국교회가 평안한지요. 과연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정의롭고 순결하며, 또한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어려운 이웃들과 잘 나누고 있습니까. 아니면, 일부 목사님들과 신도들이 잘 먹고 잘사니 평안하다는 뜻입니까.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고 다시는 저속한 교권에 흔들리지 않는 건강한 모습을 보여 주려면, 일찍이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보여 주신 애타는 마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호 4:6)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