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선을 넘어서 [12화]
     
[김정일 생일맞아 탈북자 사면 갈 수 없는
                               고향… 또 중국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지 않는 분이었다. 2월 초 북한으로 끌려간 우리는 사형당하거나 정치범 수용소에 갈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2월16일 김정일 생일을 맞아 탈북자들에게도 관대한 조치가 내려졌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고향으로 돌려보내라는 노동당의 지령이 내려진 것이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는 고향을 생각하니 그리움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그러나 갈 수 없는 길이었다. 나는 이미 북한 공민으로서의 모든 것을 잃은 상태였다. 다시 두만강을 통해 탈북하기로 동생들과 합의했다. “부장동지, 우린 꼭 지금 가야 합네다.”“아니, 제 정신이오? 며칠 전에도 한 청년이 살얼음 위를 건너다 빠져 죽었소. 5월까지 기다렸다가 수온이 좀 오르고 수량도 좀 줄었을 때 건너시오.”“안 됩니다. 지금 가지 않으면 중국에서 운영하던 식당이랑 돈이랑 다 없어집네다. 결행하겠습네다.”

매수한 국경보위대 간부에게 죽어도 좋다는 다짐을 하고 나와 동생들은 두만강 얼음판 위에 올라섰다. 우린 손에 손을 잡고 눈물로 기도했다. 우리를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는 하나님께 생사를 맡겼다. 그리고 누구든 얼음 속에 빠지더라도 소리를 지르지 않기로 약속했다. 얼음판을 건너는 내내 속으로‘하나님 아버지’만을 읊조렸다. 칠흑 같은 밤에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하늘만 바라보면서 정신없이 걸었다. “언니, 다 왔어요!”

중국 쪽 두만강 기슭이었다. 그 넓은 강폭을 이렇게 빨리 올 수 있었는지 꿈만 같았다. 우린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잠시 호흡을 고르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의 발에는 물기 하나 없었다. 얼음이 녹아 위험하다던 두만강이 아니었던가.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낚아채 들어올려 얼음판을 건너게 해주신 것이었다. “할렐루야! 하나님 만세!”우리는 두 손을 쳐들고 하늘을 향해 눈물의 기도를 드렸다. 이제는 이 국경 지역을 벗어나야 한다. 순찰하는 군인들에게 잡히는 날엔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다. 차 불빛만 보이면 땅에 납작 엎드리면서 마을로 진입했다. 새벽이 밝아지면서 여기저기 사람들이 다녔다. 우리는 그들 속에 묻혀 태연하게 움직였다.

“얘들아, 저기 십자가 보이지? 이 새벽에 우리가 갈 곳을 못 찾을까봐 하나님께서 저 집에서 기다리고 계시는 거야!”눈물범벅이 되어 뛰었다. 새벽기도가 처음 시작된 한 교회였다. 이처럼 세밀하게 준비하시고 우리를 맞아주신 하나님의 초대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대상 앞 땅바닥에 꿇어앉아 실컷 울었다. 그리고 이제부터 우리 모두의 운명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충성된 삶을 살아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한참을 기도하다가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모두 잠이 들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자 보는 단잠이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닭울음소리에 잠을 깼다. 교회 사찰 아저씨가 차려주는 식사를 염치도 없이 걸신들린 양 먹어치웠다. 아저씨로부터 옌지 시내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세세하게 지도받았다. 문제는 세 개의 경비초소였다. 버스를 타면 초소마다 서서 일일이 검사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택시를 타는 게 유리했다. “예림아, 아직 몸에서 나오지 않은 돈이 얼마나 있지?”“아직도 여러 개나 안 나왔어요.”“그래, 기도하자.”지금까지는 돈이 나오지 않게 해달라고 계속 기도했지만, 이젠 돈이 나오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택시비를 마련하기 위해선 당장 돈이 필요했다. 하나님의 능력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다는 믿음으로 기도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17: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