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째 사역하고 있는 안창호 선교사 부부 파워인터뷰

 이름도 생소한 아프리카 말리는 현지 말로 ‘하마’란 뜻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1993년부터 16년째 선교사역을 하며 젊은 날의 열정을 쏟아 부었던 안창호 선교사는 선교지 말리를 소개하는 것을 행복해했다. 지구 반대편 80퍼센트가 사막인 나라, 아프리카 말리에서 사역하고 있는 안창호 선교사, 김희심 사모를 뉴스파워가 만났다.


▲ 북아프리카 말리에서 16년째 사역하고 있는 안창호 선교사(오른쪽)와 김희심 사모. ? 뉴스파워 최창민

이름 때문일까. 항일 독립운동가인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이름이 같은 그는 한때 일본 선교를 꿈꿨다고 한다. 일본 고베 신학교에서 신학을 하려고 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고, 기회를 얻어 일본 땅에 2주간 머물면서 전도를 했지만 하나님의 응답이 없었다. 그렇게 갈등하던 중 한 달 간 아프리카로 비전트립을 간 것이 그를 먼 타국으로 선교지를 정하게된 계기가 됐다.

“아프리카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까?” 그는 1992년에 아프리카로 비전트립을 가서 이 질문을 했다고 한다. “답은 뻔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이곳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찬양의 소리가 울려 퍼지게 하겠다고 비전트립을 하면서 결정을 하고 만 1년 선교 훈련을 받고 말리로 오게 됐다.” 그는 아프리카를 다녀온 이후 바로 GMS에서 1년간 선교 훈련을 받았고 1994년 유월, 말리 땅을 밟았다.

“한국 선교사는 내가 1994년 들어갔을 때가 처음이었다. 13년간 홀로 사역지에 있다가 14년차 되는 해에 평신도 사역자, 전문인 사역자가 태권도를 통해 사역하려는 한 가정 들어왔고 이후 전도사님 내외가 또 들어와 함께 팀 사역을 하고 있다.”

올해로 16년째를 맡은 안 선교사는 처음에 교회 사역을 해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고 한다. “무슬림이 종교가 아니라 문화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방향을 수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말리의 문맹률이 90퍼센트 이상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문화를 바꾸기 위해서는 어린 세대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교육이 제일 좋은 매개체였다.”고 말했다.


▲ 이들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고백이 안창호 선교사를 지구 반대편 말리까지 오게 했다. ? 뉴스파워

그는 학교를 시작했다. “매주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전교생이 하고 각 교실로 흩어져서 성경 한 장을 학생들이 읽고 있다. 수업을 마치고는 교사 기도회를 함께하는 기독교 학교로 정착이 됐다.” 그는 이슬람권에서 한국에서도 보기 드문 미션 스쿨을 운영하고 있다.

“중학교 때는 1주간 동안 정규 수업을 하지 않고 수련회를 통해 복음을 제시한다. 수련회 기간에 복음을 제시해서 95퍼센트 정도가 예수를 영접하는 이슬람권에서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됐다.” 그는 사역을 설명하면서 행복해 했다. 지금은 많은 사역을 현지인들에게 이양했다고 한다. 교사, 교장 등을 현지인으로 세우고 안 선교사 부부는 학교 관리를 맡아 현지인 사역자들을 돕고 있다.

김희심 사모는 말리 아이들의 변화를 보며 가장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다.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다. 또 학생들이 스스로 찾아와서 고맙다고 하는 때가 가장 보람이 있다.”고 말한 그녀는 “아이들에게 ‘우리에게 배운 거 생각나?’라고 기독교에 대해 물어보면, 안 잊고 있다고 말할 때 고맙고 감사하다. 현지인들이 우리들의 마음을 알아줄 때 너무 감사하다.”고 고백했다.

안 선교사도 현지인 사역자들을 소개하며 “내 생명을 내 놓을 정도의 친구들을 만나게 하신 것이 감사하다. 또 그들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세워지는 것이 감사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 북아프리카 이슬람권 내에서 미션스쿨을 운영하고 있다. ? 뉴스파워

이어 그는 “선교사가 제일 힘든 것과 기쁜 것을 나는 동일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현지인이 변하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고 감격하기도 하지만, 진짜 우리들의 기쁨은 내가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더 가까워지는 모습을 느낄 때”라며 “그들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을 느낄 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정말 힘들 때는 내가 이들을 위해서 내 노른자와 같은 생애를 쏟아 부었는데 그런 가치가 있는가라고 묻기도 했다.”며 “나는 말리 사람을 위해 말리로 갔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음성은 나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말리를 붙여주셨다는 것이었다.”고 고백했다.

김희심 사모는 “선교라는 것이 다 어려움을 감소하고 가는 것이다. 환경적인 것은 어렵다고 느껴보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다.”며 “오히려 어려운 것은 현지인과의 관계를 이뤄가는 것이었다. 우리와 너무 다르니까 그들의 문화 속에 들어가기 위해 겪어야 하는 것이 어려웠다.”고 말했다. 안 선교사도 “현지인과 관계가 잘 형성돼야 복음도 전할 수 있다.”며 “관계 형성하는 것이 참 지혜롭고 슬기롭게 해야 할 부분이었다.”고 말했다.

안 선교사는 지금 ‘니제르강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2기 사역을 준비 중이다. “아프리카 3대 강 중 하나인 이곳에 흩어진 종족을 향해 예수를 전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한 사역이다. 일단 이곳은 사역자가 너무 없다. 1만8천 명 당 1명의 사역자가 존재하는 곳이 아프리카 불어권이다.” 그는 북아프리카 중 리비아,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 등을 “100퍼센트 이슬람권”이라고 설명하고 그 밑에 걸쳐 있는 말리를 포함해 기니, 세네갈, 니제로를 “90퍼센트 이슬람권이지만 선교가 가능한 나라”라고 말했다.

이어 안 선교사는 “100퍼센트 이슬람권에 비해서는 자유로운 복음을 제시하고 들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거기에 선교사가 많지 않은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라며 “이 문이 언제 닫힐지 모른다. 북 아프리카의 이슬람들이 대거 남하하고 있다. 이 네 나라가 영적인 방어선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 안창호 선교사는 "말리는 20세기와 21세기가 공존하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 뉴스파워

안 선교사는 이어 “아프리카인들이 유럽을 변화시키는 것이 제가 가진 작은 꿈”이라며 “이들을 통해서 세계에 영적으로 많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도록 청년들에게 도전을 준다. 많은 선교동역자들이 아프리카, 특히 불어권 이슬람권으로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고사하던 김희심 사모도 안 선교사 옆에 앉아 함께 기억을 더듬어 냈다. 처음 아프리카 말리로 가자고 했을 때 어떻게 반응했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그때 사모는 목사님의 말에 무조건 따르고 순종하는 게 분위기였다. 그런데 지금은 아닌 것 같다."며 웃었다. 안 선교사는 "지금은 나보다 더 말리를 좋아한다."며 거들었다.

선교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는 두 선교사 부부에게서 뜨거움이 느껴졌다. 그의 말대로 '영적 방어선'을 지키고 있는 두 선교사 부부는 전쟁터와 같은 그곳에서의 삶이 "행복하다."고 여러차례 말했다. "말리를 위해 갔다고 생각했으나, 나를 위해 말리를 붙이셨다."는 그의 고백이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다음은 안창호 선교사 인터뷰 전문.

아프리카 말리는 어떤 나라인가?
아프리카 말리는 1991년 3월 26일에 많은 젊은이들이 피를 흘려서 사회주의가 붕괴되고 1992년부터 대한민국과 수교가 된 나라다. 그때부터 한국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말리다. 말리라는 말은 현지 말로 ‘하마’를 뜻하는 말이다. 수도 바마코는 ‘악어 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나라 이름이나 수도가 다 동물 명칭과 관계된 나라다.

이곳은 90퍼센트가 이슬람인 나라다. 내가 들어갈 당시만 해도 문맹률이 90퍼센트인 나라였다. 1994년 6월 19일 말리 땅에 도착을 했다. 한국 교민으로서는 두 번째, 한국 선교사로는 처음 들어간 것이었다. 말리 인구는 1천2백만 정도, 면적은 남한의 12.5배다. 그러나 땅의 80퍼센트가 사하라 사막이다.

선교사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나? 세계 여러 선교지 가운데 아프리카, 그것도 말리를 선교지로 선택하게 된 이유가 뭔가?

내가 선택했다기보다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1992년도에 아프리카로 비전트립을 가게 됐다. 기니, 시에라리온, 말리 세 나라를 갔다. 그때 하나님께 질문이 하나 일어났다. ‘아프리카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 나라와 이 땅, 이들. 답은 뻔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이곳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찬양의 소리가 울려 퍼지게 하겠다고 비전트립을 하면서 결정을 하고 만 1년 선교 훈련을 받고 말리로 오게 됐다.

GMS 교단(예장합동) 선교훈련원에서 선교 훈련을 정확히 1년간 받았다. 그 전에는 서울 강동구 해림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섬기고 있었다. 원래는 말리가 선교지가 아니고 일본이었다. 1991년도 오사카에서 두 주간 동안 밥만 먹고 전도를 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마음을 주시지 않았다. 그 후 아프리카를 선택하게 됐다.


▲ 김희심 사모는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고백했다. ? 뉴스파워

원래 선교사의 삶을 살려고 했었나? 아니면 비전트립 이후에 선교사의 삶을 선택한 것인가?

이름 때문인지는 몰라도 일본에 대한 미련이 있었다(웃음). 그래서 일본 고베 신학교에서 신학을 하려고 했지만 그게 연결이 잘 안돼서 못했다. 신학대학원을 마치고 일본에 대한 비전을 품고 갔었다. 그러나 전혀 하나님께서 어떤 사인을 주시지 않았다. 그래서 갈등하다가 부교역자 사역을 하는 중에 한 달 정도 휴가를 받아서 아프리카 비전트립을 간 것이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순종했다.

말리에는 한국인 선교사가 안 선교사님 말고 또 있나? 지난 2004년부터 16년째 사역을 해오고 계신 것으로 아는데, 말리에서 어떤 사역을 펼치고 있나?

한국 선교사는 내가 1994년 들어갔을 때가 처음이었다. 13년간 홀로 사역지에 있다가 14년차 되는 해에 평신도 사역자, 전문인 사역자가 태권도를 통해 사역하려는 한 가정 들어왔다. 그 다음 해에 프랑스에서 6년 정도 생활했던 전도사 내외분이 들어왔다. 이후부터 팀 사역을 하고 있다.

제가 처음 들어갔을 때는 교회 사역을 하려고 계획했었다. 그러나 들어가 사역을 하면서 무슬림이 종교가 아니라 문화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방향을 수정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당시 말리의 문맹률이 90퍼센트 이상이어서 교육과 함께 가야 한다는 생각이 일치했다. 이슬람 문화를 기독교 문화로 바꾸는 것에 있어서는 장기적인 전략이 필요했고, 어릴 때부터 해야 한다는 생각에 교육이 제일 좋은 매개체였다.

지금 초등학교는 4회 졸업을 했고, 중학교 3회까지 졸업을 했다. 교육을 통해서 이슬람권에서 매주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전교생이 하고 각 교실로 흩어져서 성경 한 장을 학생들이 읽고 있다. 수업을 마치고는 교사 기도회를 함께하는 기독교 학교로 정착이 됐다.

중학교 때는 1주간 동안 정규 수업을 하지 않고 수련회를 통해 복음을 제시한다. 수련회 기간에 복음을 제시해서 95퍼센트 정도가 예수를 영접하는 이슬람권에서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됐다. 지금 전체적인 사역은 현지인 사역자들이 다 하도록 이양하고 있다. 우리는 관리를 맡아서 현지인 사역자들을 돕고 있는 상황이다.

아프리카 불어권, 이슬람권 선교 사역을 강조하신 것으로 안다. 특별히 그 지역에 선교가 긴급히 요청되는 이유가 있나?

현재는 니제르강 프로젝트라고 하는 미전도 종족을 향한 사역인 2기 사역을 준비하고 있다. 니제르강은 아프리카 3대 강 중 하나다. 니제르강 주변에 흩어진 종족을 향해 예수를 전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한 2기 사역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

아프리카는 영어를 쓰는 나라가 19개국이 되고, 불어를 쓰는 나라가 24개국이다. 대부분, 92퍼센트 이상이 영어권에 선교사들이 밀집돼 있다. 불어권에는 선교사들이 별로 없다. 프랑스가 통치하면서 종교적 영향까지 주지 못했던 것 같다. 미국이나 영국은 종교적 영향까지 줘서 많은 문제가 있지만 외형적으로는 어쨌든 기독교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다. 불어권은 조금 남은 것이 카톨릭적인 문화이고 대부분 무슬림 문화다.

일단 이곳은 사역자가 너무 없다. 1만8천 명 당 1명의 사역자가 존재하는 곳이 아프리카 불어권이다. 아프리카 불어권은 이슬람권이 강한 지역이다. 10/40창에 속한 미전도 종족 지역이 아프리카 서북쪽에 밀집돼 있다. 50퍼센트가 넘게 불어권에 밀집돼 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불어권 지역에 사역자가 소외되고 사각지대에 있는 지역으로 꼽을 수 있다.


▲ 안창호 선교사 "내가 말리를 위해 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하나님은 나를 위해 말리를 붙여주셨다." ? 뉴스파워

이슬람권 국가면 기독교 선교에 대한 핍박은 없나?

나라마다 차이가 있는데 말리도 핍박이 있다. 북아프리카를 리비아,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가 불어를 쓰는 나라인데 이들은 100퍼센트 이슬람권이다. 표면적으로 복음제시를 못하는 나라다. 그 밑에 걸쳐 있는 기니, 세네갈, 말리, 니제로 이 네 나라는 90퍼센트 이슬람권인데, 선교사가 활동할 수 있는 나라다.

물론 간접적으로 많은 저지를 당하지만 그래도 선교사가 활동할 수 있다. 100퍼센트 이슬람권에 비해서는 자유로운 복음을 제시하고 들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거기에 선교사가 많지 않은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 문이 언제 닫힐지 모른다. 왜냐하면 북 아프리카의 이슬람들이 대거 남하하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이 네 나라가 영적인 방어선이라고 볼 수 있다. 지역학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이슬람권을 저지하기 위해서도 연합해서 같이 이 지역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말리는 개신교가 0.7퍼센트 정도 된다. 교회 개념이 한국적인 교회를 생각하면 안 된다. 건물은 거의 없고 흙집으로 지어진 곳에서 신앙이 조금 있는 의식 있는 사람을 파견해 주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교회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것이 현지인 교회다. 물론 뒤에서 선교단체나 선교사들이 많은 후원을 하고 있다. 말리 개신교 안에서 연합 사역도 조금씩 일어나서 연합 예배도 1년에 한차례 정도 드리고 있다. 전체가 다 모여도 5천여 명도 안 된다.

선교를 하면서 가장 어려운 때는 언제였나?

(김희심 사모) 선교라는 것이 다 어려움을 감소하고 가는 것이다. 환경적인 것은 어렵다고 느껴보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다. 처음에 갔을 때는 그 모습이 우리나라와 너무 달랐지만, 예전에 시골에서 할머니들이 사시던 방법대로 살고 있었다. 환경으로 인해서 어려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어려운 것은 현지인과의 관계를 이뤄가는 것이었다. 우리와 너무 다르니까 그들의 문화 속에 들어가기 위해 겪어야 하는 것이 어려웠다.

(안창호 선교사) 이슬람권은 관계중심적이기 때문에 현지인과 관계가 잘 형성돼야 복음도 전할 수 있다. 관계 형성하는 것이 참 지혜롭고 슬기롭게 해야 할 부분이었다.


▲ "주여. 말리 청년들이 유럽을, 미국을 변화시키게 하소서." ?뉴스파워

간증도 많을 것 같다. 어떨 때 가장 보람을 느끼나?

(김희심 사모) 아이들이 믿음 안에서 변화되는 것이 가장 보람 있었다. 어쨌든 우리는 사역자로 섰으니까 그게 상당히 좋은 것이었다. 커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다. 또 학생들이 스스로 찾아와서 고맙다고 하는 때가 가장 보람이 있다.

우리가 고등학교를 해야 하는데 아직 형편이 안돼서 못하고 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다른 곳으로 고등학교를 간 애들이 와서 ‘학교에 있을 때는 우리가 좋은 줄 몰랐는데, 그곳에 가서야 우리 학교가 얼마나 좋은지 알았다’고 스스로 이야기를 한다. 그 아이들에게 ‘우리에게 배운 거 생각나?’라고 기독교에 대해 물어보면, 안 잊고 있다고 말할 때 고맙고 감사하다. 현지인들이 우리들의 마음을 알아줄 때 너무 감사하다. 우리들의 말리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아는 것 같다. 그게 참 좋다.

(안창호 선교사) 제가 감사한 것은 현지인 사역자 만나게 하신 것이 감사하다. 정말 내 생명을 내 놓을 정도의 친구들을 만나게 하신 것이 감사하다. 또 그들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세워지는 것이 감사한 부분이다.

선교사가 제일 힘든 것과 기쁜 것을 나는 동일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현지인이 변하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고 감격하기도 하지만, 진짜 우리들의 기쁨은 내가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더 가까워지는 모습을 느낄 때다. 하나님의 거룩을 회복하는 모습, 그들을 섬기면서, 그들을 통해서, 그들 때문에, 그들로 인해 내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을 느낄 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우리가 현지 법정에 섰을 때도 있었다. 그때는 하나님 앞에 항변했다. ‘내가 정말 이들을 위해서 내 생애의 모든 것, 노른자와 같은 생애를 쏟아 부었는데 그런 가치가 있는가.’라고 묻기도 했다. 저희도 그런 많은 어려움과 눈물로 사역하고 했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음성을 주신 것이 나는 말리 사람을 위해 말리로 갔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음성은 나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말리를 붙여주셨다는 것이었다. 말리를 통해서 내가 하나님의 거룩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리를 붙여주신, 그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감당할 수 없는 귀한 친구들이다.

선교사로서 말리를 향해 가지고 있는 비전은 무엇인가? 언제까지 말리에서 사역을 할 생각인가?

그것은 우리가 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주권에 있다고 생각한다. 효과적으로 말리를 넘어 아프리카 불어권을 전체적으로 보고, 어떻게 하면 이곳에서 많은 사역자를 불러일으키고 이들을 더 세울 것인가. 꿈이 있다면 이들을 통해서 말리에 있는 동안에 말리에서 프랑스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다.

아프리카인들이 유럽을 변화시키는 것이 제가 가진 작은 꿈이다. 이들을 통해서 세계에 영적으로 많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도록 청년들에게 도전을 준다. 우리도 한번 미국을 돕자. 우리도 유럽을 회복시켜보자. 우리도 하나님의 주권에 쓰임 받는 역사를 감당하는 민족이 되자라고 도전한다. 하나님의 역사가 아프리카를 통해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선교동역자들이 아프리카, 특히 불어권 이슬람권으로 왔으면 좋겠다.

지저스타임즈 제휴 뉴스파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