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韓民國 未來를 위한 敎育의 改革을 위한 硏究 (9)

(韓國近代敎育의 始作과 發達의 歷史的 考察)(1884-1945)

칼럼리스트 金 昌 龍 牧師(하나님이디자인하신교회)

2 칼럼리스트 김창룡 목사(하나님이디자인하신교회).jpg

지난호에 이어...

5. 한국 근대교육의 사상적 흐름

1) 국가주의 교육사상

1880년대에 오면서 구한말정부가 취한 국민교육정책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교육을 국가발전의 중요한 수단으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당시 정부의 근대적인 교육정책으로의 이행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발표가 있었는데 가장 분명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1895년에 발표된 고종의 칙서로서 교육입국의 방침을 천명하였다. 이 조서에서 고종은 “교육을 국가보존의 근본으로 여기고 임금이 교육에 관심을 기울여야 교육이 제대로 설 수 있고 국민은 교육을 받아야 국가가 바로 서고 세상의 일에 무지몽매한 자는 필요가 없다.”고 하여 교육이 없이는 국가가 설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백성을 교육하지 않으면 국가를 부강하게 하지 못하고 독립하여 융성하는 제국은 인민의 지식이 개명하고 교육의 최선이라 교육은 실로 국가보존의 근본이다.”라고 하여 국가주의에 입각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2)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1880년대 개화사상가에서 주장되었다. 개화사상은 온건파와 급진파로 나눈다. 온건파는 당시의 집권세력으로 동도서기론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서양의 기()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서양 과학기술의 습득과 채용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도()는 유교윤리가 천직의 성에 따른 영원불변의 도리이므로 이것을 고수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우리의 도덕이나 사상은 그대로 지키되 오늘날 우리가 부족한 서양의 기술만을 받아들이자는 것이었다. 동도서기론은 중국의 양무(洋務), 자강(自强))사상과 비슷한 사상체계이다.

 

3)사회진화론 (社會進化論)

사회진화론은 다윈의 진화론에 근거를 둔 이론으로 1880년대부터 일본ㆍ미국ㆍ중국을 거쳐서 유입되었다. 사회진화론은 다윈의 진화론의 이론적 기간이 되는 동물세계에서의 약육강식, 적자생존이 인간사회에서도 적응된다는 논리이다. 1900년대까지 우리나라에 수용된 사회진화론은 당시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하여 식민지를 만드는 약육강식의 국제정세를 알려주었고, 우리나라도 약소국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근대화해야 한다는 주장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사회진화론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사람은 유길준인데 그는 사회진화론을 바탕으로 국가와 사회는 경쟁을 통하여 진보 발전한다는 주장을 하고 국가가 경쟁에 승리하여 부강하려면 국민들에게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국민교육론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이는 오늘날의 한국교육에도 영향을 주어서 경쟁하는 교육체제를 만든 근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6.을사조약 전 후 의 교육상황(1902-1910)

1) 사립학교들의 발전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전 기독교의 선교의 열매는 학교들의 발전으로 나타난다. 서울, 경기도 수원을 중심으로 남부지역 멀리 관서지방 평양에 이르기까지 교회와 학교들이 세워졌다. 을사조약이후 나라를 빼앗긴 후 교육에 대한 백성들의 열망은 더 뜨거워졌다. 배워야 산다. 배워야 나라를 빼앗기지 않는다. 당시 선교사로서 최전방에서 사역을 펼쳤던 케이블 선교사의 보고서를 참조하면 “한국의 국권상실은 한국인의 교육발흥에 자극제가 되었다.

 

지난 1년 동안 나는 가는 곳마다 학교를 세우는 일에 매달렸다 한국의 청소년들과 노인들에게 지치도록 시달렸다. 사방에서 학교를 세워 줄 것과 그들이 공부할 여러 가지 조건들을 충족 시켜주지 못해서 고민에 빠졌다. 교사와 서양학문에 대한 요청의 함성은 대단한 것이다. 이러한 사태에서 교회가 성도들에게 교육자원과 교육시설을 준비하지 못한다면 선교의 실패와 이 민족에 대한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 사방에서 학교가 세워지고 학교는 민족의 함성을 표출 하는 곳이 되었다. 특히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정신을 이어 가려는 뜻있는 사람들은 앞 다투어 학교를 세웠다. 이에 교회들이 이일에 선두로 교회마다 주일학교와 매일 학교를 세웠다.

 

국민들은 오히려 국가에서 운영하는 공립학교보다 사립학교에 자녀들을 보내려 하였다. 그 이유는 공민학교는 국가의 유익을 위하여 가르치는 곳 이고 사립학교는 백성들을 위하여 개인의 존중과 삶에 필요를 만족시켜주는 교육으로 인식되었다.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긴 국가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고 아무 조건 없이 우리나라에 와서 헌신적으로 복음과 사랑과 신문화와 교육을 전한 선교사들에 대한 신뢰가 커졌기 때문이다.

 

2) 일제의 사립학교의 통제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고 나라의 흥망이 풍전등화 와 같을 때 뜻있는 사람들의 열정은 학교의 교육에 힘을 모아졌다. 아마 그 선각자들의 노력은 100년을 내다보는 눈을 가진 것 같다. 백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민족의 향학열과 고학력의 국민을 배출한 것이다. 일제의 탄압은 오히려 우리국민에게 교육 필요성을 높여주었고 미래에 나라를 되찾고 대한민국을 세우는 초석이 되었다.

 

학교

학생

대학

신학교

1

143

중학교

15

1,138

소학교

589

13,429

합계

605

14,708

일요학교

942

87,178

 

1910.2월 한일 합방이 시작될 때 한반도 전역에 세워진 감리교회와 장로교회에서 세운 학교들의 수와 학생 수가 집계되었는데, 장로교회 총학교 및 학생 수, 1910.2 감리교회 총 학교 수 및 학생 수 이외의 파악되지 않은 학교의수가 집계된 수보다 더 많았다고 한다. 우후죽순으로 많아진 학교들의 교사를 구하기도 힘들었다.

 

 

학교

학생

대학

1

3

신학교

1

279

중학교

4

413

소학교

194

5,738

합계

200

6,423

일요학교

230

22,892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