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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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대에는 순서가 있다. 영적 필요를 위해 지적, 정서적 필요를 희생시키실 때가 있다. 정서적 필요를 위해 신체적, 사회적 필요를 포기 시킬 때가 있다. 지적 필요를 위해 물질적 필요를 희생시키실 때가 있다. 그러나 그 순서의 공식이 바꿔질 때도 있다. 주님은 자유로운 분이시다.

물질적 필요를 채우심으로 신체적, 정서적, 영적 필요를 한꺼번에 해결하시는 경우가 있다. 지적 필요를 채움으로 정서적 필요를 채우시는 경우가 있다. 상대방을 깊이 이해하고 나면 사랑과 동정이 생기는 경우가 얼마나 허다한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법과 범위에는 제한이 있을 수 없다. 이 복잡한 인간의 필요를 채우시는 방정식을 다 이해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냥 주님을 신뢰하는 것이 최고의 지혜이다.

내 머리에 의지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자. 한참 일이 안 풀릴 때는 어느덧 내 머리를 굴리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고민하다가 머리가 아플 때는 최소한 주님의 뜻이 아닌 것이다. 그냥 통째로 주께 맡겨버려라. 이 복잡한 필요의 방정식을 어찌 내 머리로 풀 수 있단 말인가.

한계의 모서리를 방황하지 말자. 인간의 한계선을 표류하는 돛단배가 되지 말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안 하고 내가 할 수 없는 일에만 매달리는 비극을 아는가. 할 수 있는 일은 시시해서 못하고 할 수 없는 일은 능력이 없어서 못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이른바 잘못된 불만족의 비극이다. 나의 의대생 시절 공부를 소홀히 한 대가를 후에 얼마나 비싸게 치렀는지 모른다.

소년답지 못한 시절, 학생답지 못한 시절, 청년답지 못한 시절의 회한이 내게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왜 그때 현실에 충실하며 실력을 키우지 못했던가. 내게 주어진 현실 속에서 꽃을 피우지 못하면서 냉소주의에 빠질 때가 얼마나 많은가. 할 수 있는 일에 전력을 다하자. 내 일에 프로의식을 갖추자. 일단 일을 맡았으면, 내게 일이 주어졌으면 그 일에 미쳐야 한다. 광인이 되어야 그 일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다. 그래야 감사가 나온다.

학생 시절 가장 행복했던 때는 밤늦게 도서관을 나올 때였다. 의사로서 가장 보람 있었던 때는 환자 한 사람을 붙들고 그 치료를 위해 한 시간 동안 씨름하던 때였다. 그 만족감이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에서 꽃을 피우는 만족감을 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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