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사도영성 운동의 역사

제네바에서의 칼빈의 목회


사도영성 홍항표 목사.jpg 당시 제네바의 사회상은 신앙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도덕적으로도 극도로 타락하였다. 너무 많은 공장, 그것을 구별하기 위해 특별한 복장을 입혀야 했고, 심지어 교직자 중에도 첩을 몇씩 두어서 사생아가 많았고 민간재산을 강요해 음란한 생활에 소비해 버리는 일이 많았다. 정치적으로는 신성로마제국의 영도 하에 극히 복잡한 정치적 입장에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 개혁운동이 일어났지만 그 운동이 반대파로 인해 무너질 위기에 놓였을 때 칼빈에게 성경 강해를 부탁했다.

 

말씀교육을 통한 개혁을 지속적으로 벌이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다. 15368월말 산파엘교회에서 바울서신 강해를 시작으로 제네바에서의 칼빈의 목회는 조용하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틈이 나는 대로 복음의 토론을 하였고 이로 인해 로잔과 그 주변의 주민들은 신교신앙을 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로잔의 토론회와 베른의 루터파 대표자들과의 회의에서 명성을 얻은 칼빈은 설교자로 임명받아서 제네바교회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때 칼빈은 구체적인 작업으로 세 가지 개혁을 실천하였다. 첫째, 자녀들의 종교 교육이었다. , 모든 어린이들에게 복음적 신앙의 요점을 철저하게 가르치고 다음 세대까지 종교개혁이 이어지는 데에 역점을 두었다. 둘째, 도덕적 훈련을 시켰다. 새로운 교회와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민들 중에는 이것을 방해하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 칼빈은 모범적인 인물들을 뽑아 장로회를 조직하고 시민의 행동을 감시하도록 했다. 교회의 도덕 규율에 따르지 않는 자를 수찬 정지시켰다. 셋째, ‘신앙고백을 제정하였다. , 교회 형성을 출발점으로 하여 참된 신교 신앙고백과 새 교회 건설을 할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를 시민 하나 하나에게 결단케 하여 거부하면 제네바시에서 추방하고 시인하는 자만으로 제네바 시를 구성하자는 신앙고백을 제정한 것이다.

 

개인의 정신 자립이라는 원리를 세우는 반면에 전 시민이 따를 신앙고백을 규정하여 따르지 않으면 추방한다는 중세 공동체적 사고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모순도 있었다. 이로 인해 많은 반대와 저항에 부딪히게 되었고 시민 자치회의 결의에 의해 급진적 개혁이 좌절되게 되었다. 결국 시의회의 가결에 의해 칼빈은 제네바 시에서 추방을 당하게 된다. 그 때가 15384, 제네바에서 목회를 시작한 지 만 2년이 채 못되는 때였다.

 

한편 칼빈을 추방한 제네바 시는 거의 무정부상태로 돌아갔으며 날로 부패하고 신교는 구교의 세력에 다시금 힘을 잃을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칼빈의 초청을 다시금 요구하게 되었다. 결국 시의회는 1540년 칼빈을 재 초청하기로 결의하여 초청한다. 이에 대해 처음에는 칼빈이 선뜻 응하지 않았으나 간곡한 권유 때문에 15419월 제네바에 다시 들어가게 된다. 칼빈의 제2차 제네바 목회가 시작된 것이다. 이때부터 15645월 그의 마지막 때까지 23년 간 철저한 개혁운동가로 목회하며 지내게 된다. 이러한 칼빈의 신앙개혁운동은 결국 유럽의 각 국들이 개혁교회를 세우는 도화선이 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