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韓民國 未來를 위한 敎育의 改革을 위한 硏究 (14)

(韓國近代敎育의 始作과 發達의 歷史的 考察)(1884-1945)

칼럼리스트 김창룡 목사(하나님이디자인하신교회)

cpjtv001.jpg

지난번 이어

국체명징(國體明徵)- 이는 나라의 근본을 생각하자는 것으로 그들이 주장하는 근본 의미는 신을 경배하고 조상을 숭배하는 경신숭조 와 제정일치였다. 일본은 전쟁중에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천황을 신성화 하는 정책을 썼다. 천황을 상징화 하여 자기의피와 재산 그리고 생명까지 천황의 것이므로 천황을 위해 전쟁에서 싸우고 천황을 위해 죽는것을 영광으로 알았다. 참으로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그들은 바로 우리민족에게 이런 사상을 가르쳐 이용하려하였다. 바로 이것을 실행하기위해 시도한 것이 “신사참배(神社參拜)” 와 “궁성요배宮城遙拜”이다.

 

“신사”라 함은 일본의 황실의 조상이나 국가의 공로자를 신으로 모신 사당이 있는 곳이다. 서울의 남산에 가장 큰 신사가 있었으며 전국각처에 신사를 만들어 참배를 강요했다. “궁성요배”는 일본 천황이 있는 곳에 절을 하는 예식이다. 일제는 이를 구체적으로 실행 키위해 학교마다 봉안대를 설치 아침 등교 시 학생들에게 절을 하게하였다. 아침 조회 때마다 황국신민서사를 외우게 하였다.

 

황국신민서사는 천황의 신하임을 외우게 하는 것이다. 정오가 되면 집에 있는 사람들까지 모두 묵도를 하게했는데 천황에게 감사하고 전쟁에서 죽은자들의 명복과 전쟁에서 이기게 해달라는 기도다. 한국 사람들에게 일본국민 이므로 전쟁의 당위성을 심기 위함이다. 내선일체(內鮮一體)-일본과 조선이 한나라라는 뜻이다. 두나라를 한나라로 만들겠다는 속셈이다 내선일체를 이루기 위한 첫째는 조선어를 쓰지 말고 일본어를 쓰라는 것이다, 말은 그 나라의 얼이요 정신이다, 얼빠진 민족을 만들려는 속셈이다.

 

만일 학교 안에서 조선어를 쓰다 적발하면 벌금 견책, 처벌 등이 이루어졌다. 10384월부터는 조선어를 가르치지 못하게 했다 몰래 조선어를 쓰는 자는 배일사상이 농후한자로 불이익이 많았다. 두 번째 시책은 “창씨개명(創氏改名)”으로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게 했다.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 다“ 는 격언이 있다. 개인의 이름은 그 사람의 정신이며 가계의 뿌리이며 한 인격의 권리이다. 형식은 자유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론 강제였다. 어느 학교에선 교사로 채용하는데 창시개명을 안 한자는 채용자격이 주어지지 않았고 학생으로도 받지 않았다.

 

인고단련(忍苦鍛鍊)- 전시에 물자가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학교전체를 노동자 양성소로 만들려했다. 한창 문화적 욕구에 무엇이든 다 배울 시기에 학생들을 전쟁수행을 위해 정신교육과 군수물자 생산을 위한 노동자로 삼으려했다. 우리 민족에게 행한 범죄중 가장 악날한 것 중의 하나다, 학교에서는 애국일행사, 신사참배, 총력연맹행사, 국방헌금행사, 폐품수집 등에 내몰려 공부도 못하게 하고 여기에 시국영화 관람까지 전쟁을 위한 정신교육장이다. 남학생의 경우 근로대를 만들어 학교대신 비행장, 공장으로 나가서 노동자처럼 일했다.

 

일본 군인들이 감독을 하여 마치 포로수용소를 방불케 했다. 자고 먹는 것도 비참할 정도다. 추운 곳에서 자고 먹지도 못하니 병에 걸리는 학생도 많았다. 진료도 못 받고 죽는 학생도 있었다. 인솔교사와 군인들의 충돌도 있었다. 여학생들은 군복을 깁는 일에 시간을 빼앗겼다. 항공 훈련이나 행군 원족을 비롯한 군대식 체조훈련을 받았다. 위문문을 쓰고 위문대를 만들었다. 더욱 가증한 것은 이런 전쟁준비를 수행하기위한행사에 참여 한것을 성적에 반영 한다는 것이다. 이 시대에 학교를 다닌 학생들은 황폐한 문화적인 환경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6)신사참배(神社參拜)와 기독교 학교들의 자진폐쇄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따라 교회는 신사참배문제로 마찰이 많았다. 특히 보수적 장로교회의 반발이 심해서 주기철 목사 같은 분은 순교까지 당하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에 장로교 계통의 학교들은 신사참배를 하느니 차라리 교육을 포기하기로 하였다. 1935년 북장로교회에 속한 숭실학교 가 신사참배를 할수 없다고 거절했다. 일제는 회유하고 협박하며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결국 북장로교 계통의 남녀중학교10개교 전문학교1개소 남장로교회 중학교2개교, 초등학교8개교가 자진하여 경영권을 포기하였다. 재령의 명신학교(,) 평양숭실학교(,) 숭실 전문과, 신성학교(), 보성학교() 숭의학교() 대구의 계성학교() 신명학교()) 전주의 신흥학교() 기전학교()와 기타초등학교 8개교다. 그동안 수많은 선교비를들여 학교를 세우고 유지한 선교부로서는 어쩔수없는 조치였다.

 

특히 재학생들에게는 자진폐쇄라는 극약처방이 과연 옳은 것인가 많은 고민중에 선택한 일이다. 복음의 본질을 지킬 수 없기에 결국 포기한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한 선교사들의 고뇌에 찬 한문서 를 공개한다. 당시 기독교학교가 처한 상황을 잘 보여주는 문서이다. 남장로교회 선교부 실행위원 이었던 씨디비 폴턴의 명의로 된 성명서이다. “한국에 있는 우리학교들이 당면하고 있는 사태에 대하여 신중히 생각한 후에 미국남장로 교회 해외선교부 실행위원회는 한국선교부의 우리 교육 사업에 영향을 주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따를 정책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제출한다.

 

1. 우리는 한국인을 위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데 수년 동안 참여 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하여 감사한다. 2, 우리는 선교부를 통하여 당국의 과거 우리 교육 사업에 상응하는 자유와 보호에 대하여 감사한다. 3.지금도 우리는 지금까지 가졌던 동일한 조건하에서 우리의 교육 사업을 계속하고자 하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우리의 교육활동을 중단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며, 우리의 학교설립당시 유용했던 동기와 동일한 목적으로 행동한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교리를 수정하지 않고는 우리의 교육 사업을 계속할 수 없을것 같아 최근의 사태 발전을 고려하여 이에 우리는 마지못해 우리 한국선교부의 적절한 절차로 우리학교를 폐쇄할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지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