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韓民國 未來를 위한 敎育의 改革을 위한 硏究 (11)

(韓國近代敎育의 始作과 發達의 歷史的 考察)(1884-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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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이어            칼럼리스트 김창룡 목사(하나님이디자인하신교회)

일본에서 시행 하는 보다 좋은 학교제도가 이제 시작하려고 합니다. 기존 학교보다 높은 수준의 시설과 운동장 교육설비 교사진과 커리큘럼을 충족시켜야합니다. 일제의 요구에 부합하면서 계속 별도의 교육을 실행 하려면 별도의 검물을 가지고 있어야 성경을 가르칠 있습니다. 단시간 내에 노력을 기울여 매일학교를 대신할 있는 방식을 도입해야 합니다.그러나 이미 남감리교 선교회는 일제의 인가를 받기로 결정되므로 헨킨스 선교사는 마지못해 나중에 인가에 동참하게 된다.

 

1916 최초로 일제의 사립학교의 인가를 받은 학교는 가장 명문으로 꼽혔던 배재학당이다. 당시 배제학당 이었던 신흥우는 1916.2.3 이사회에서 고등보통학교의 인가를 받기로 결정했다. 이유는 첫째 한국인으로 선교사들과 달리 성경과목을 넣지 않으면 교육 되지 않는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둘째 공부시간에 넣지 않아도 원하는 학생들은 방과 후에 저녁에 가르치면 되지 않겠는가. 셋째 고등 보통학교 인가를 받는다고 배재학교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유예기간동안 학생들의 선택에 맡기면 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신흥우는 졸업생들의 장래를 위하여 인가를 받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이미 나라가 없어지고 일제의 치하에서 상급학교에 진학하려면 인가된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해야 지원 자격이 주어진다. 당연히 인가된 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한 자가 유리하기 때문이다. 배제학당의 이사들은 대부분 감리교 선교사들 이었는데 신흥우의 생각에 동조하였다. 이계기로 다른 기독교 학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특히 배재학당 운영에 함께 동참했던 재한개신교복음주의 선교회 에서는 감리교회가 너무 일찍 일제의 안에 수용한 아니냐는 의견이 많았다.

 

특히 장로교 선교사들은 만일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예배를 드리지 못한다면 선교부에서 학교를 운영하는 것이 무의미 하다는 것이다. 10년의 유예기간을 두고 일제의입장이 바뀌면 성경을 가르치고 예배를 드리자는 것이다. 불과1 일제의 교육개정정책에 강력하게 항거하던 감리교선교사들이 한순간에 입장이 바뀐 이유를 듣고 싶었다. 한국을 복음화하기 위해 연합하여 학교교육의 선을 이루었던 관계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것에 대하여 당시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나라의 감리교를 치리했던 해리스감독을 제외하고 재한 감리교대표격인 노블(W.A.Noble) 선교사의 답변이다.

 

그는 먼저 선교협의회가 학교운영과 선교방식, 선교비 지출, 학교의 운영에 관해서 간섭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상기시키면서, 자신은 일제의 규칙이 오히려 앞으로 학생들에게 유익한길이 열려지리라 믿는다고 했다. 그리고 일제 인가를 받으면 선교사역에 자유로울 것이고 기독교의 발전이 있을 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의 일제의 노련한 회유정책 이었다. 당시 총독부 내무국장인 우사미는 개정된 규칙 안에서 어떻게 성경을 가르치고 예배를 드릴 있느냐고 질문하자 교사 안에서는 가르칠 없으나 다른 곳에서는 가르칠 있다는 것이다. 당시 남감리교회의 교육선교의 방향을 명확히 보여준다. 미감리교회가 세운 배재학당이 아펜셀러가 세상을 떠나자 감리교회와 공동 운영을 해왔다. 1917 개성 한영서원이 인가를 받았다 이유는 당시 한영서원의 초대교장인 윤치호의 변화이다.

 

한일합병 이후 일제의 교육정책에 누구보다 앞장서 항거했던 윤치호는 105 사건으로 옥고를 치루고 나서 그의 생각은 친일쪽 으로 기울어졌다. 일제의 통치 안에서는 어쩔 수없이 받아들여야하고 일제의 정책에 협력하는 대신 한국인들의 실속을 챙겨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윤치호의 생각은 남감리교의 실질적 실세인 그렘(W.G.Gram 선교사와도 같이하며 신흥우, 양주삼도 동의했다.1918서울 이화학당, 개성의 호수돈여학당, 광성학당, 후에 늦게 평양의 정의학당도 인가를 받았다.

 

당시 감리교회 장로교회를 가리지 않고 서울쪽의 선교사들은 개방적이었다. 평양을 중심으로 서북쪽의 선교사들은 보수적이었다. 감리교회는 일찍 고등 보통학교의 인가를 받아드렸고 장로교회는 성경도 가르치고 예배도 드리게 하는 일제의 인가를 받아드리지 않기로 했다. 명칭대로 중학교라 칭했다. 장로교회가 운영하는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곧바로 상급학교에 진학할 없었다. 이들은 다로 검정고시를 치러야했다.

 

총독부는 인가를 받지 않은 학교를 각종학교, 잡종학교라 지정하고 전문학교나 대학에 진학할 없도록 했다. 일제의 정책에 굴하지 않고 장로교회들은 열심히 그대로 학교를 운영해나갔다. 당시 주일학교 수를 보면 장로교회가 2,095 반면 감리교회는 265개교 밖에 되지 않는다. 장로교회가 얼마나 열심히 주일학교 교육에 치중하며 신앙과 애국애족의 마음을 가르쳤는지 보여주는 예다. 일제 당국의 시행하는 공교육보다 교회에서 운영하는 주일학교가 많은 선교적 지원을 받았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4)삼일운동 이후 일제의 교육정책의 변화

역사는 3.1운동은 실패로 끝났다라고 기록된다.. 일제는 가까스로 시위를 진압하기는 했다. 31운동은 일부한곳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전국각처에서 전국적으로 면단위 지역으로 장이 서는 곳이면 모여들어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우리민족의 바램을 담은 우렁찬 하나 된 함성이다. 이일로 많은 분들이 죽임을 당하고 옥고를 치뤘다. 온 세계만방에 우리민족의 함성이 전해져 갔다.

 

민족이 하나 되어 부르짖던 그 함성은 하나님을 감동시키며 온 열방을 감동시킨 승리의 함성이요 훗날 해방의 기쁨을 우리민족에게 가져다준 미스바의 기도라 생각한다. 필자는 3.1운동을 새롭게 조명해 본다. 3.1운동은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그이유가 여기에 있다. 삼일 운동은 3.1일 벌어진 일이라 삼일 운동이 아닌 것이다. “삼일정신”에서 시작된 교육의 열매이다 .1902 수원에 삼일학교가 세워질 때 “삼일” 이라는 이름이 지어진 동기가 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