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기윤실 운동에 대한 도전적 평가

기윤실 운동은 무엇보다도 기독교인들이 한국사회의 책임적 구성원이 되어야 한다는 자각으로부터 시작된 기독시민운동이다. 기독인으로서의 기윤실은 기독교적인 정체성을 더욱 분명히 하는 차별성을 유지하여야 한다는 과제를 갖는다. 그러나 시민운동으로서의 기윤실은 사회적 책무를 강조하며 그것의 실현을 위하여 다른 시민단체들과의 연대에 우선적인 관심을 갖도록 촉구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기독교적인 차별성과 시민운동으로서의 포괄성이 모순 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느냐는 질문이 제기될 것이다. 정확한 증빙자료를 제시하기는 어렵지만 20세기 후반까지는 문화적으로 보수주의적인 한국사회의 성향이 기윤실과 다른 시민운동단체들과의 연대를 특정한 분야에서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냐는 추론도 가능할 것이다. 예컨대 음대협의 활동이나 낙태 및 인간복제에 대한 반대운동 등에서 보인 활발한 연대활동이 그 예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기윤실 운동을 문화적으로 진보적인 견해를 가진 단체들이나 개인들로부터는 거리감을 가지게 하는 역효과를 낳기도 하였다.

21세기 들어 급변하는 사회환경은 지금까지의 우호세력이라고 할 수 있었던 보수주의적 사회진영과의 관계형성도 새롭게 할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다. 출발과정에서 잘 나타나듯이 기윤실 운동의 모판은 일반적으로 개량주의적 보수신앙유형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보수적이라 함의 의미는 성경해석에 있어서는 문자주의에 가까운 입장을 취하면서, 현재의 사회 부조리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보다는 급진적인 사회변화로 인한 불안정과 부정의를 더욱 심각하게 보는 성향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점진적인 사회개혁을 주창하게 된다. 점진적이라 함은 곧 개량적이라는 말로 바꾸어 질 수도 있다. 이러한 기윤실 운동의 개량적 성향은 혁명적 사회주의세력이 그 주요한 상대로서 득세하였을 때에는 비교적 명확하게 차별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자본주의 세계 시장경제를 근간으로 하는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득세하게 된 시점에 이르러서는 기윤실운동이 오히려 급진적인 것으로 보이게 되는 형편에 이르렀다. 필자가 파악하는 대로는 대부분의 기윤실운동의 적극적 참여자는 보수적인 신앙유형에 속하는 이들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회원 중 상당수의 사회개혁관은 매우 급진적이다. 급진적이라는 의미는 근본적인 개혁을 주창한다는 표현이다. 과연 자신들의 보수적인 신앙과 급진적인 사회개혁관을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는 오늘의 삶에서 성공적으로 조화시키고 있느냐는 질문이 여기에서 제기된다.

II. 기윤실 운동의 과제와 비전

첫째, 기윤실운동은 더욱 확장된 사회적 책무를 감당할 수 있도록 지도력을 발휘하여야 한다. 이러한 지도력 확보의 필수적인 요소로는 도덕적·지적 탁월성을 더욱 높이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도덕적 탁월성은 율법주의적 맥락에서가 아닌 복음의 자유함에서 비롯되는 탁월한 도덕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복음이 주는 진정한 자유를 매일 매일의 삶에서 체험하며 사는 영적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동시에 기윤실운동의 대사회 지도력은 지적 탁월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이러한 지적 탁월성의 확보를 위하여 기독지성인들의 활발한 의견개진과 참여, 일종의 Think-Tank의 기능을 하는 활발한 활동이 우선적으로 요청된다.

둘째, 기윤실운동의 가시적 열매는 대중적인 물리적 지지를 확보함으로 가능하다. 이 점에 있어서 기윤실운동은 다른 여느 시민운동단체들보다 유리한 환경을 갖추고 있다. 이미 전 인구의 1/4에 해당하는 기독인들을 잠재적 동참자로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성교회에 대해 신실한 협력자와 건설적 비판자로서 기윤실의 자리매김이 절실한 과제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기윤실이 교회에 대한 냉소적 비판자들의 연합체로 보이기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기윤실은 기성 교회가 고민하는 문제들에 대한 개혁적 대안들을 제시할 수 있는 건설적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대한민국교육봉사단’사역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감당할 수 있고, 감당하여야 할 최적의 사역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셋째, 저널리즘과의 관계정립에 대한 과제를 지적하고 싶다. 과연 기윤실 운동과 저널리즘과의 관계를 신앙적인 관점에서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인가? 혹시 운동으로서의 결과 창출을 위하여 저널리즘의 치명적인 단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결코 단순하지 않은 현실이나 문제들에 대한 단순화’의 유혹에 빠져드는 우리는 아닌지도 반성하여야 할 것이다. 동시에 어떻게 하면 율법주의, 결과주의 혹은 공리주의에로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지도 기독시민운동으로서의 여전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넷째, 기윤실운동이 기독교적인 차별성을 유지하면서도 시민운동으로서의 연대성을 유지할 수 있는 관건은 모든 사건을 더욱 통전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큰 틀을 가지는 데 있다. 기독교적인 정체성과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그와 같다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기초하여야 한다. 무엇보다도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크신 분이라는 것을 이야기하여 준다. 하나님은 ‘기독인으로서의 나’와 ‘시민으로서의 나’ 모두의 주인이시다. 또한 그 분은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이 세상의 어느 것도 존재할 수 없었던 창조주이시며, 인간의 타락 이후에도 계속하여 구속의 사역을 베푸시는 구원자이시며 동시에 이 세계와 역사를 오늘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그 분을 주님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온 세계에 대한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윤실운동이 그 활동범위를 하나님의 피조세계 전체를 향하여 나날이 확장하여 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