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원고는 1907년 평양 대부흥 100주년 기념 학술 포럼
(2007년 7월 2일 새문안교회)에서 이주연 목사의 발표 내용 원고.

회개 영성 부흥
-무엇을 회개하고 무엇이 영성이며 무엇이 부흥인가
                                                                                         이주연 목사(산마루교회)


1. ‘대부흥’인가, ‘대각성’ 혹은 ‘성령의 대역사’인가
1.1 양적 부흥은 1907 대부흥이 될 수 없다


한 수도자는 마음의 고통으로
9년 동안의 수도생활을 포기하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오기로 하였습니다. 
길에서 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네가 9년 동안 씨름한 것은 너의 영광이다.”

-사막교부들의 금언집- 중에서

수도자는 이 말 한 마디에 큰 깨달음을 얻고 다시 돌아가 제대로 된 수도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 9년 세월의 수도생활이란 것이 자기의 영광을 얻기 위한 수단이었지, 자기 영광을 버리고 주의 뜻을 따라 길을 떠났던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거처만 사막으로 옮겼고, 껍데기만 수도자이지 그 속은 여전히 세상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대한민국 3대 종교 가운데 유일하게 교인이 줄어든 종파의 한 목회자로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부흥을 위하여, 비판적인 관점에서 자문합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왜 새삼스레 “(평양) 대부흥 100주년”을 들고 나온 것입니까? 대부흥운동이라 이름 붙여진 100년 전 평양에서의 놀라운 성령의 역사는 그 내용에 있어서는 ‘대회개운동’ ‘성령의 대역사’ ‘죄에 대한 대각성운동’이었는데, ‘대부흥’이라 이름 지은 그 무의식적 동기는 무엇입니까? 우선 외형적 대부흥에 여전히 눈이 고착된 것은 아닙니까? 줄어드는 교세 속에서 위기감을 느껴 100년 전에 있었던 대부흥의 감동을 리바이벌 하며 심리적으로 보상받으려는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교세가 줄어드니 다른 종파에 밀릴 수 없다는 생각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실로 이상과 같은 동기가 숨어 있어 우리 한국교회가 고민 끝에 대행사를 마련하고 있다면, 이는 9년간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번민하면서 헛되이 세월을 보냈던 껍데기만 수도자였던 경우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본래적 부흥의 의미가 아니라, 숫적 증가에 초점을 맞춘 외형적 대부흥에 여전히 마음이 사로잡혀 있다면 이는 이미 한계에 도달한 대교회주의와 성장주의의 환영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대착오적 어두움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한국교회의 침체와 퇴조는 대교회주의와 성장주의가 일으킨 조로(早老) 증후군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결코 아니 됩니다. 그리고 줄어드는 교세 속에서 옛날의 부흥의 감동을 심리적으로 보상받으려는 것이라면, 그것은 영혼을 구원할 권능을 상실한 자위적 감상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교세가 줄어드니 다른 종파에 밀릴 수 없다는 생각이 작용하고 있다면, 십자군 정신과 같은 종파주의적 충성심의 발로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한 영혼이 회개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한 오직 그 하나의 목표에서 벗어나서는 아니 됩니다. 모름지기 교회의 운동은 복음의 본질-진정한 그리스도 예수의 가르침과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삶으로 증언하여, 뭇 영혼을 구원받게 하기 위한 고난을 무릎 쓴 헌신이어야만 합니다.


1.2 영국과 미국은 ‘종교대각성운동’이라고 하였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18-19세기 영국과 미국에서 일어났던 대부흥운동을 그들은 ‘종교대각성운동’(Great Religious Awakening Movement)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평양에서의 커다란 회개운동이 일어나게 된 불씨가 된 하디 선교사가 선교에 실패하고 좌절하고 번민하였던 것 역시 수적인 증가를 직접적으로 염두에 두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영혼에 대한 관심이 자신의 무능을 회개하게 하였고, 마침내 성령의 은혜와 권능을 받아 수많은 영혼을 구원케 하였습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써도 이처럼
수고의 결과가 없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니, 내 자신에게 어떤 장애물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았지만 점점 더 깨닫게 된 것은 내게 영적인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하나님께서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4:6)고 하신 말씀에 나오는 그 성령의 능력이 없는 것이 사업 실패의 원인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R. A. Hardie's Report", MECS, (1903), 26.

위에서 하디가 말하고 있는 “수고의 결과”란 죄를 깨닫고 회개한 후 믿음의 열매를 맺게 되기를 갈망한 것이었습니다.

   “지난 수년 동안 나는 한국인들이 죄를 깨닫고 회개한 후 믿음의 열매를 맺게 되기를 갈망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일해 오는 동안 단순하면서도 분명하고 오래 지속되는 그런 회개를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아는 대부분 사람들은 이런 것을 지식수준에서 받아들일 뿐, 이를 실제적이고 생생한 체험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은 아주 적었다.
그나마 그들은 내가 아닌 다른 선교사들에게 영향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내가 성령 충만함을 받은 후 돌아온 첫 번째 주일 아침에 원산 교인들 앞에서 수치와 곤혹스런 얼굴로 교만했던 것과, 고집불통이었던 것과 믿음 없었음을 자백하면서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를 말하게 될 때 그들은 처음으로 진정한 자백과 회개의 체험이 어떤 것인지 보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단순한 믿음으로 성령의 은사에 대해 선포하는 나의 말을 듣고, 또 그 후 삼 주일 동안 나의 생활과 체험에서 변화된 모습을 보고나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하시려는’ 하나님의 능력과 믿음에 대한 새로운 교훈을 얻었다.”
"R. A. Hardie's Report", MECS, (1904), 23-24.

이상과 같이 1907년의 대부흥(진정한 의미에서의 부흥)의 불씨가 되었던 하디 선교사의 좌절과 실패, 그리고 성령 충만함을 받은 후의 능력 있는 증언자로서 회개운동을 일으키게 된 것은 결코 대교회와 외적 성장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한 영혼이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 오직 그것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하여, 오직 그것으로써 열매를 맺은 결과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준비한 프로그램과 목적 그리고 계산된 결과에 따라 그 놀라운 구령(救靈)의 사건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본인 자신도 그 결과에 대하여 놀라움을 당할 뿐인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인간적 목적은 자리하지 않고, 순수한 구령(救靈)의 열정이 성령의 불같은 임재를 통하여 대각성의 역사를 이룬 것입니다. 이는 성령께선 사람의 계산된 목적에 따라 춤을 추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난 사람”은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요 3: 8)는 것처럼, 사람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과 신비 안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2. 21세기 첫 인구센서스를 통해 나타난 한국의 종교 현황
2.1 개신교 1,000만 성도라고 말하지 마라


통계청에서는 매년 5년마다 대한민국 전 주택과 인구를 대상으로 실시하는 ‘인구주택총조사’(2005년 기준)를 2006년 5월 25일에 발표하였습니다. 이 발표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왜냐하면 문명의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는 21세기적 상황 속에서 제시된 신뢰도가 높은 첫 객관적 통계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아래 표와 같습니다. 

종교유형별 인구 추이(단위 : 천명, %)

 

1995

2005

증감

인구

구성비

인구

구성비

인구

증감율

 총 인 구

44,554 

100.0 

47,041 

100.0 

2,488 

5.6 

 종교 있음

22,598 

50.7 

24,971 

53.1 

2,373 

10.5 

 불  교

10,321 

23.2 

10,726 

22.8 

405 

3.9 

 기독교(개신교)

8,760 

19.7 

8,616 

18.3 

-144 

-1.6 

 기독교(천주교)

2,951 

6.6 

5,146 

10.9 

2,195 

74.4 

 유  교

211 

0.5 

105 

0.2 

-106 

-50.4 

 원불교

87 

0.2 

130 

0.3 

43 

49.6 

 기  타

268 

0.6 

247 

0.5 

-21 

-7.7 

 종교 없음*

21,953 

49.3 

22,070 

46.9 

117 

0.5 


 

* 종교 없음에는 종교 미상 포함

위 표와 같이 21세기에도 대한민국의 3대 종단은 여전히 기독교(신교)와 불교, 기독교(천주교)이며 당분간은 변함이 없을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이 3대 종단의 비중은 불교가 22.8%, 개신교가 18.3%, 천주교가 10.9%를 차지하였습니다. 이같은 사실은 대한민국의 지배종교는 전통종교(23.8%, 불교나 유교나 원불교)가 아니라 기독교(29.2%, 신구교)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3개 종단 가운데 10년 전의 통계에 비하면 개신교만이 유일하게 줄어들었습니다. 불교는 40만 5,000명, 천주교는 219만 5,000명이 증가하였으나, 개신교는 14만 4,000명이 줄어들었습니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2005년 11월 1일을 기준으로 하여 10년 전인 1995년도에 개신교는 1995년 876만 명으로 인구 구성비에서 19.7%였으나, 2005년도에는 861만 1,000명으로 절대 인구에서 14만 4,000명이 줄어 1.6% 줄어든 것입니다. 그 결과 기독교는 현재 인구 구성비에서 18.3%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불교는 인구 구성비에서는 23.2%에서 22.8%로 0.5%로 감소하였으나, 절대 인구로는 1,072만 6,000명으로 40만 5,000명이 증가하였습니다. 그리고 천주교는 295만여 명에서 514만여 명으로 219만 5,000명이 증가하여 74.4%로 천주교에서조차 놀라운 일로 받아들이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로써 현재 천주교는 10년 전 인구 구성비 6.6%에서 10.9%로 급성장하였습니다.


3. 무엇이 개신교를 떠나게 하는가


3.1 문제의 주원인은 개신교 안에


개신교 감소의 주원인은 무엇입니까? 불교도들이 개신교들에게 포교하였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천주교인들이 개신교인들을 개종
(신구교는 서로간에 대체로 개종이라 생각)시켰기 때문일까요? 개신교 인구의 감소가 14만 4천이고, 천주교의 증가가 219만 5천 명이며, 불교인의 증가가 40만 5천 명이라고 하니 우리 개신교인들을 빼간(?) 숫자로는
다 채울 수 없으니, 분명 빼간 일이 이런 충격적인 결과의 주된 원인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개신교의 감소 주원인은 바로 우선 개신교 안에서 찾아야만 합니다. 물론 개신교를 통해서 기독교를 알게 되었지만 천주교회로 옮겨간 이들이 계속 발생하는 현상은 포착되고 있습니다
(“카톨릭이 부활하고 있다” 월간 중앙 2007. 2.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무총장 배영호 신부 진술 ).

하지만 우선 개신교가 줄어들었다는 사실에서 개신교인들이 자기 종교에 대하여 신뢰가 떨어진 이유가 무엇인지 파악해야 할 것이며, 또 한편으로 다른 종교가 증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교회 밖의 비종교인들의 종교적 욕구의 성격과 이들이 개신교를 바라보는 의식이 어떠한가를 파악해야 합니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 기관지인 <한국성결신문>이 지령 500호를 기념해서 전국의 목회자 289명과 장로 96명을 대상으로 총 385명에게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물었습니다. 그 결과 첫 번째가 세속화와 영성의 약화(41.9%) 두 번째가 지나친 양적 외형 성장주의(19%), 세 번째가 목회자의 자질 하락과 도덕성 문제(15.1%), 네 번째가 성도와 신앙과 삶, 언행의 불일치(9.6%) 순으로 조사되었습니다. 개신교 내부에서 세속화와 영성의 약화, 외형적 성장주의가 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 50%를 넘고 있습니다. 또 한편 이 지적된 문제의 원인이
서로 상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세속화와 영성의 약화라는 말이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이같은 사실은 외형적 성장주의와 직접적 관계를 지니고 있고, 이것은 곧 목회자의 자질과 도덕성, 그리고 교인들의 신앙과 삶의 불일치와 뗄 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점입니다.   

3.2 개신교 문제의 중심은 목회자 자신


예수는 죽이고 그 옷만 나누는 현대 교회야,
예수의 피도 버리고 살도 버리고
그 형식과 의식만 취하고 양양자득하는 현대 교회의 무리(여)……. 
-이용도,「일기」1930. 4. 5.


1907년의 대각성운동이 100주년을 맞는 지금
예수를 중심에 모시고 살다가 간 고난의 부흥사 이용도가 외치던 음성이
다시 들려옵니다.

2005년에는 ‘한국교회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이하 한미준, 대표 이동원 목사)과 갤럽이 합동조사하여 발표한 “한국교회 미래 리포트”가 있습니다. 이 리포트는 주체나 방법이 객관성을 부여할 만한 신뢰성이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개신교인 1,000명과 일반인 6,200명을 대상으로 1998년과 똑같은 설문으로 6년 만에 다시 그 조사하였기에 개신교에 대한 인식의 흐름을 살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리포트는 개신교인의 교회생활과 신앙의식, 교회에 대한 태도, 그리고 비개신교인이 바라보는 한국교회에 대한 시각 및 종교 전반에 걸친 의식조사였습니다. 이 보고서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비개신교인들과 비종교인들이 개신교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점입니다. 개신교에 대한 평가에서, 한국교회가 '양적 팽창'과 더불어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이다’(20.9%)가 1위를 차지하였습니다. 그리고 '목회자의 사리사욕이 문제'라는 대답이 13.6%나 되었습니다. 이 둘을 합치면 34.5%가 된다는 사실에서 선교의 대상이 되는 비종교인과 사회의 다수자로서 여론을 일으키는 비개신교인들이 “개신교는 물질주의적이고 이기적이다!”라고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교의 토양을 척박하게 하고 있는 주원인이라고 봅니다. 또한 주목할 점은 목회자가 사리사욕에 사로잡혀 있다는 생각이 ’98년에 4.1%에서 2004년에 이르러 6년 사이에 13.6%로서 세 배 이상 뛰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목회자에 대한 신뢰도가 급격히 나빠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 조사에 의하면 비종교인들이 가진 종교 지도자의 자질의 우수성에 대하여 묻는 질문에서 천주교(31.8%), 불교(21.2%), 개신교(12.0%) 순으로 나타나, 개신교 종교지도자가 최하위를 차지하였습니다. 종교에 대한 선호도는 다른 무엇보다 종교지도자들의 이미지가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2005년의 ‘인구주택총조사’의 결과 개신교만이 줄어들게 된 주원인을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고 봅니다. 

“한국교회 미래 리포트”를 발표하면서, 위와 같은 목회자 리더십과 자질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확산에 대하여 명성훈 목사(여의도 순복음교회 강남 성전)는 
"목회자 탈선에 대한 인터넷 등 언론보도의 영향 및 목회자의 생활수준이 불교나 천주교에 비해 상승해 상대적 박탈감을 주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분석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성결신문> 지령 500호를 기념해서 행한 설문을 통해서 보면 목회자의 사례비(연봉)는 30.7%가 1천만-2천만
원이며, 500만-1천만 원이라는 응답이 17.9%로 나타났습니다. 결국 개신교 성직자의 절반에 가까운 이들이 1년에 2천만 원 미만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조사에 의하면 한국교회의 84%가 경상비 5,000만 원 미만의 교회라는 점을 생각하면, 개신교회와 개신교 목회자들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확산시킨 일차적 책임이 대형교회와 그 담임자들에게 있음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간 10년 동안 언론에 집중 고발되거나 보도되어 오늘 한국 사회에서 이슈로 부각된 것은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대형교회의 세습문제(광림교회, 광성교회, 충현교회, 변칙 세습논란의 소망교회)와 대형교회 담임자들의 비리나 윤리적인 문제(여의도 순복음교회, 금란교회, 충현교회, 동대문교회)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대형교회의 물의를 일으키는 물량 공세와 공격적이며 배타적인 선교 방법도 비종교인들로부터 배척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즈음도 여전히 대교회주의 목회론을 따르는 이들은 전도상으로 실적에 따라 자전거 세탁기 냉장고 에어콘 성지순례 등을 시상한다든지, 성경 퀴즈 대회에서도 그랜드 피아노를 내거는 영성을 훼손시키는 물질주의적인 방식이 ‘생각을 지닌 교회 안팎의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를 떠나거나 멀리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교회 밖에 대도시 한복판에 현수막으로 내걸어 수많은 교회 밖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지금 한국의 대형교회들은 진정으로 현실을 직시하고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 회개하여야 합니다. 반드시 21세기에는 개신교의 대교회주의적 성장론을 근본 수정하고 새로운 선교방법과 목회 패러다임을 모색하지 않으면 더욱 침체의 길로 접어들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는 아직까지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며, 전도 정책의 수정도 찾아보기 힘이 듭니다. 오히려 가진 재력과 종교 권력을 통하여 자신을 정당화하고 자기 세력을 비호하는 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초대형교회를 이룸으로 위상을 강화하였다고 강변할 정도로 윤리적 영적 불감증에 걸려 있습니다. 선교에 얼마나 악영향을 주고 있는지는 역으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천주교회가 외적 초대형교회가 어디 하나라도 있어서 급성장하고 있는 것입니까? 또한 만일 명동성당의 본당 신부의 임명과정에서 인사비리가 발생하여 신문과 방송에 나왔다고 한다면, 김수환 추기경이 윤리적인 문제로 TV 사회 고발 프로그램인 “그것이 알고 싶다”에 나왔다고 한다면, 천주교회의 위상이 어떻게 되며, 10년 사이에 219만 5,000명씩 늘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3.3 개신교 안에서의 교인 확보 경쟁 가중
개신교 개 교회가 지닌 문제-담임자의 독선적인 교회 운영, 장로 선출 과정의 갈등, 헌금 사용의 불투명성 등-로 교인들이 개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개신교에 대한 선호도가 나빠짐으로 비신자들을 전도하는 일이 위축되고 있기에, 개신교는 비교인들을 전도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개신교 안에서의 교인 이동(수평이동)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한미준이 발표한 “한국교회 미래 리포트”를 보면 ‘이전에 다른 교회에 출석했던 경험’을 묻는 질문에는 57.9%가 있다고 말했고, 이중 옮긴 교회가 2-3개인 경우가 전체의 77.0%로 나타났습니다.
그 이유는 ‘이사 때문’인 것이 가장 큰 이유로 되어 있으나, 다수의 경우 ‘이사를 계기로’ 떠나고자 하였던 바를 실행하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전도 운동이 대형교회가 재력과 시설을 갖추지 못한 작은 교회의 교인 빼앗기 경쟁을 낳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진행된 모 교단의 300만 운동은 일부 지역에서는 초대형교회가 같은 교단 내의 작은 교회의 전도를 위축시키거나, 작은 교회의 교인들을 흡수하는 기현상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신교의 이러한 위기 상황은 자기 교회와 소속 교단을 단속하기 위하여 교파주의를 강화하고 경쟁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장로교 외에는 이단처럼 가르치거나, 순복음 외에는 은혜가 없다거나, 자기가 속한 교회 담임목사만을 목사로 여기게 만들며 우상시하는 등, 복음의 본질에 대한 이해와 확신보다는 개교회주의와 교파주의적 신념을 주입하는 일이 강화되고 있습니다. 이같은 현상은 앞으로 개신교의 이미지와 신앙과 선교의 본질을 지속적으로 더욱 훼손시킬 것으로 심히 우려됩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한신대 신학연구소가 “한국 개신교가 한국 근현대사의 사회 문화적 변동에 끼친 영향연구를 위한 기초자료 분석결과에 나타난 한국 개신교의 현황과 과제”라는 주제로 설문조사(
한국 학술진흥재단이 2002부터 시행 중인 기초학문 육성지원 인문사회분야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실시)를 벌인 결과에서도 확인 됩니다. 이 조사에 의하면 전체 조사대상자(1,000명)가 개신교 교회에 대하여 가지는 비판적 응답 중 가장 높은 네 가지는 개교회? 교파중심주의, 물량 성장중심적 경향성, 전도 행태? 활동 면에서 공공 윤리성 결여, 그리고 전통문화와의 마찰로 나타났습니다. “한국 개신교는 자기교파? 자기 교회 중심적인가”라는 설문에 전체 1,000명 중 80% 정도가 그렇다고 대답하고 있습니다.(5점 척도 3.87).
개신교의 전도형태가 다른 종교에 비하여 적극적이라고 생각하는 응답자는 74.8%였으며, 일부 개신교인들이 공공장소
(버스, 지하철 등)에서의 적극적 전도활동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비율이 72.1%로 부정적 인식이 지배적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에 오늘 우리 개신교의 외적 성장을 위한 배타적이며 공격적이고, 개교회 이기주의적인 선교와 목회 정책은 바뀌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일치를 해치는 죄된 일입니다.

3.4 종교 방송의 선교적 순기능과 역기능


현재 캐이블 TV 시청 가구는 1,221만 가구
(3년 내 1,600만 가구로 급성장할 것으로 봄, 이는 시청 가능한 전 인구가 가입하게 됨을 뜻함 )이며, 위성방송 가입자는 183만 가구에 이릅니다. 그리고 대다수의 많은 교회 밖의 대한민국의 인구가 이 채널들을 통하여 안방에서 불교와 천주교와 기독교를 접하고 비교하고 있습니다. 모니터 앞에 3개 종단이 노출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향으로 일부 선호도가 높은 출연자(설교, 강연)는 초교파 초종파적으로 굉장히 커다란 선교적 효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의 문제는 많은 이들이 3개 종파의 TV를 접하면서 개신교회의 목회자와 교회 분위기에 거부감이나 심지어 혐오감을 느낀다는 점입니다. 목회자들의 반말, 청중들을 무시하는 어투와 발언, 심지어 상소리를 하고, 상식 밖의 사회의식을 가진 강연과 설교, 거부감을 주는 표정과 쉰 목소리, 광적인 분위기, 확인된 과학적 사실에 대한 부인 등등......이러한 모습에 대하여 특별히 한국 사회의 여론을 주도하는 중산층과 지식인층들이 비판하고 있으며, 실망스런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개신교인들조차 심하게 비판하고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심각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방송이 일부 재력을 지닌 대형교회의 영향력 아래 있다는 것이 구조적인 면에서도 극복할 과제입니다.

반면, 천주교 평화방송의 주류를 이루는 성스럽고 조용하고 여유로운 분위기는 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교방송은 전통종교 자연종교로서의 이미지를 강화하여 전통과 자연을 그리워하며, 그곳에서 의미와 쉼을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 매력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 사회가 모니터에서 권력과 정보와 지식이 나오는 고도정보통신사회로 진입하였다는 점에서 개신교의 미래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줄 중요한 요인입니다. 이를 위해서 저는 이 자리를 빌어 객관적인 조사와 이에 대한 대책을 삼가 요청드립니다.  


4. 21세기 부흥을 위하여  


-21세기적 영성으로 목회와 선교 패러다임을 바꾸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마 16:2,3>

오늘 21세기! 이 시대의 징후를 읽지 못한 눈먼 우리들이
100년 전 이 민족을 죄와 죽음, 식민통치의 억압과 무지에서 구원한 개신교회를 잘못 인도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4.1 21세기적 징후에 둔감한 개신교


지난날 한국의 초대형교회가 탄생하던 시절은 소득 2,000달러 시대로부터 1만 달러 시대였습니다. 그 시대의 욕구는 배고픔을 이기고 성공하는 것이 삶의 전부였던 물질지향의 시대입니다. 산업화와 대도시화가 급속히 이루어지던 시기였기에, 정신적으로는 고향을 떠나 외로움과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시대로서 집단에 귀속되기를 희망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분단과 남북대결의 위기감과 군사정부 시절 사회적 불안감이 집단주의적인 안정감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소속감과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집단주의적 대형교회가 세워지는 사회적 조건이 제공되었습니다. 그리고 강남의 개발을 필두로 분당과 일산 신도시들이 등장함으로 이 지역을 선점한 개인적 카리스마와 재력을 지닌 교회가 초대형교회를 이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88올림픽 이후에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하는 주제의 책들이 베스트 셀러의 대열에 합류하였고, 동구가 몰락하고 소련이 해제된 이후 90년대 중반부터 “쉼과 여유”가 시대적 화두가 되었습니다. 이는 1만 달러 이후 사회적 풍토와 민주화가 촉진되고 북한의 위협이 현저히 줄어든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엔 세계가 자본주의화 지구화되면서 무한 경제전쟁을 속에서 지치고 피폐해진 영혼들이 쉴 곳을 찾고자 하는 시대적 요구(need)가 점층되고 있다는 점을 통념해야 합니다.


이제는 일이 아니라 쉼(안식), 충성이 아니라 평안입니다. 성공이 아니라 성취, 통성 기도만이 아니라 더 깊은 묵상입니다. 수직적 조직이 아니라 횡적인 영적 관계, 목회자와 교우가 주종 관계가 아니라 대화가 가능한 영적 교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도시만이 아니라 자연, 집단(주의)이나 광장(주의)이 아니라 개인(성)과 ‘내밀한 영성’으로 그 무게 중심이 옮아 간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개신교회에서는 너도나도 제자화라는 이름 아래 ‘훈련된 일꾼 만들기’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가 영혼의 안식처가 아니라 또 다른 일터가 됨으로써 교인들의 삶을 더욱 지치게 하고 교회를 떠나게 하고 있습니다. 물론 지난날에는 그 방법이 유효하였기에 공헌 바가 있었지만, 이제는 영적 욕구가 바뀌고 수준이 높아진 영성의 시대입니다. 지금 그 옛 제자화 방법을 중심으로 개척하여 효과를 거두고 있는 교회가 어디 있는지 객관적 평가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제자화를 실시한 교회에서 큰 성장이 있다면, 그것은 주된 이유가 제자화가 아니라 찬양과 같은 문화적 접근과 묵상 기도와 같은 영적인 접근이나 소구룹으로 영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작은 공동체가 형성됨으로 말미암은 것일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개신교는 시대의 패러다임과 욕구가 바뀌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어떤 교단에서는 21세기에 들어서도 “위대한 XX교단 건설”을 내걸고, 이어서 “300만 전도운동”을 교단의 목표로 내걸었습니다. 그 10년 간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21세기에 나타난 충격적 현실은 개신교인만의 감소라는 것입니다! 이는 그럴 것이 ‘위대한’이라는 개념은 종교적 개념이 아니라 본질상 정치적 구호이고, 그것도 서구에서는 1945년 나치즘이나 파시즘이 멸망한 후 없어진 개념입니다. 남은 곳은 오직 한 곳, 평양뿐이라는 점을 이제라도 뼈아프게 인식해야 합니다. 또한 21세기에는 대규모 집회의 장소인 광장이 사라졌습니다.
오늘날 붉은 광장이나 천안문 광장은 국가나 정치의 중심이 아니라 관광 명소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도 여의도에 있던 5.16 광장이 사라지고, 공원이 되었습니다. 광장은 그 효력을 다한 셈입니다. 여전히 광장이 국가적으로 유용한 곳은 한 군데, 평양의 김일성 광장뿐입니다. 그럼에도 오늘 한국교회는 5.16광장에서 국가차원의 후원을 받은 100만 명이 모였던 ‘73 빌리 그레이엄 대전도 대회, '74 엑스폴로, '77 민족 복음화 성회 등을 회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73, ‘74년 2개 대회만을 통하여 결신자가 35만 명이나 되었으니 말입니다. 이는 교회사에서 참으로 놀랍고 경이로운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후 '77 민족 복음화 성회에는 연인원 150만 명을 동원시켰다는 신기록만을 남긴 후 결신자의 수는 미미합니다. 1980년대에 들어서 '80 세계복음화대회, '84 선교 100주년 대성회, '88 복음화성회, '92 세계 성령화 대회’를 열었지만 분열된 교단간의 만남의 장으로서 의미가 특별하였을 뿐 크게 결신하는 부흥의 불길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부흥의 자리는 ‘광장’이 아니라 개인적 카리스마를 지닌 강남을 중심으로 한 개 ‘교회’로 옮아갔습니다. 그리고 21세기에 이르러서는 침체를 맞고 있습니다.

대안은 무엇입니까? 21세기 정보통신사회의 중심국가로 자리를 잡은 대한민국이 다시 대규모 광장 집회의 집단 형식으로 돌아가질 것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더욱이 퇴조하는 개신교의 힘으로 21세기의 시침을 되돌릴 수 있을 만큼, 오늘 앞서가는 이 시대인들이 호락호락하지도 않다는 것을 깨어서 직시하여야 합니다. 이젠 정보화 지식사회화된 문명지역에서는 그 어떤 정당이나 심지어 국가도 광장에 사람을 모으는 일은 하지 않고 있으며, 오직 개인의 양심에 따라 조직화가 아니라 네트워크를 구성
(각양의 개인적 블러그, NGO 사이트, 안티 기독교사이트 등)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여론을 형성하든지 이슈에 따라 모였다 사라지면서 시대를 이끄는 역동성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시애틀에서 있었던 세계무역기구 3차 각료회의 당시 네트워크를 통하여 그 누구에게도 경비를 대주지 않았지만, 전세계에서 5만 명의 NGO 맴버들이 몰려들어 미국 연방정부를 놀라게 하였던 그 위력은 이젠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시대에 모 교단에서는 올 여름 부산 아시아드 경기장에서 단 하루 7만 명을 전국에서 동원하여 3시간짜리 집회를 하고자 운송비와 식대만(스타디움 임대료 및 기타 집회 비용 제외) 최소 40억 원의 경비를 쏟아 붓는 일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모 교단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교회 전반에 만연된 광장시대의 집단주적 사고와 군사독제 시절 국가적 후원 아래 모였던 5.16 광장의 뜨거웠던 열기를 잊지 못하고 계속 대규모 대중집회를 추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이제는 다른 종파나 정치 세력과의 싸움에서 순교할 일이 아니라,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우리 자신-지난날의 양적 성장주의와 목사들의 권위주의와 그 피라미드 조직과 순교자적인 싸움을 해야 할 시기입니다.

21세기, 이젠 광장이 아니라 가슴입니다!
조직이 아니라 네트워크입니다. 
외치는 소리가 아니라 내면적 고요함입니다.
집단적 이념이 아니라 한 영혼의 영성입니다.
거기가 21세기 성령의 불이 붙는 아궁이입니다.


10년 사이 220만 대부흥의 소리 없는 불길 속에 있는 한 천주교인의 고백은 이러합니다.

나 역시 천주교 내의 종교적 엄숙함이 좋다.
개인적 취향차이일지 모르나 종교는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어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난 기독교의 소리 높여 외치는 집회보다
조용한 천주교의 묵상이 좋다.
그리고 이런 점이 별다른 포교활동도 없는
천주교 신자가 자꾸 증가하는 이유가 아닐까 본다.
기독교 자체가 잘못되거나 나쁜 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포교 방식은 수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전통 제사 등에 대한 무시, 지나친 타종교에 대한 배척.......
이런 것들이 자꾸만 기독교에 등을 돌리게 한다는 걸 알고 있을텐데....... 
제발 더 이상 길거리에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
이런 푯말은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국 가톨릭이 부활하고 있다”, 월간 중앙 2007.2.

시대는 성숙한 영성의 시대라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지 않고
자라나는 겨자나무와 누룩처럼 번질 때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눅 13장 18-21>


4.2 영성은 없고 영성이라는 말로 포장된 개신교의 교설들

예수를 요구하느냐,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찾으라.
사람의 예수, 너희가 만들어 세운 예수 말고!
예수를 갖다가 너희 마음에 맞게 할 것이 아니라,
너희를 갖다가 예수에게 맞게 하라.
-이용도,「일기」, 1930. 2. 20.

지금은 영성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는 곳이 없고 영성을 대안이라고 말하지 않는 곳이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교회에서나 신학교에서나 무엇이 영성인지 그 열매와 사건은 찾아보기 힘이 듭니다. 목회 현장인 교회에서는 지난날 ‘심령대부흥회’라는 현수막에 ‘심령’자를 “영성”이라고 글자만 수정하여 다시 내건 격이 아닌가 합니다. 너도 나도 영성목회라고 하면서, 여전히 여의도순복음교회와 사랑의 교회가 보여준 대교회 성장 패러다임을 벗어난 교회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실제로 지금 조용기 목사님이나 옥한흠 목사님께서 이 시대에 다시 개척을 하시되, 옛 그 방법으로 해서 다시 여의도순복음교회와 사랑의 교회를 이룩할 수 있을까 물음을 던져 봅니다. 문명이 전환된 21세기를 아는 이들이라면 정주영 회장이 다시 태어나 지금 가출하여  회사를 다시 차린다면 현대구룹을 다시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 역시도 마찬가지는 아닐까요?

개신교의 침체와 천주교의 부흥의 원인은 거시적으로 볼 때에 이 시대 문명의 패러다임이 21세기적으로 변화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미 이 세상 대한민국에서는 IMF 이후 정주영식 재벌 패러다임은 해체되어 전문화 집중화가 이루어지고, 권위적이며 문어발식 경영 원칙은 폐기처분되었습니다. 우리 개신교회도 시대에 맞는 목회 패러다임 곧 21세기 창조적 영성 목회 패러다임을 만들어 내어야 합니다. 참여 개방 공유(21세기 정보마인드, 이어령)의 창조적인 열린 의식 속에서 교인이 수단화 대상화 되지 않고 한 영혼이 전부가 되는 목회, 횡적인 영적 네트워크로 모든 이가 주인(서버이면서 클라이언트)이 되는 영성 공동체, 깊은 내적 침묵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뜨거운 사랑의 열기로 살아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을 탄생토록 할 영성 목회 패러다임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영성에 대한 개신교의 신학대학교는 어떠합니까? 영성은 논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고 사는 것임에도 영성에 대한 문헌적 연구와 책 쓰기와 영성 세미나에 열중하면서 그 주제를 선점하기 위한 경쟁은 치열한데, 학교를 박차고 나와 사막으로 갔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산속이나 거리의 노숙자들 속으로 나섰다는 신학자도 아직 만나보질 못하였습니다. 웨슬리의 영성을 말하면서도 웨슬리와 같은 경건과 헌신은 찾아보기 힘들고, 자기가 진짜 정통한 전공자라는 이야기만 무성하게 들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말하면서 성 프란치스코처럼 예수의 고난과 삶에 참여한 이들이 얼마나 더 기다려야 나오겠습니까? 마더 테레사는 신학지식은 한국의 어느 신학자만도 못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엔 한국교회 그 어느 목사만 하지 못하였으나, 국경과 인종과 종파를 넘어 미치는 그의 막강한 영향력은 어찌된 일입니까? 죽어서까지! 그것이 바로 예수 영성의 힘입니다.

우리는 지금이라도 주께서 이미 잠든 교회를 깨우며
죽은 교회를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주의 앞에 가서 엎드리자.
오늘 교회에 설교는 있었다만 주님은 안 계시었고, 노래 소리는 요란하였다만
주의 음성만은 씻은 듯이 고요하였도다.
청년회 운동자도 출입하고 주일학교 선생도 내왕하고,
농촌 사업자도 있었다만은 신앙이 없는 이상,
예수가 있지 않은 이상, 어찌 생명이 있을까 보냐,
먼저 그 의와 그 나라를 구할 것이다.
그 후에 이 모든 것으로 가미할 것이다.
먼저 예수를 소유하라.
그 생명에 접하여 영이 살고 보라.
-이용도,「일기」, 1932. 4. 10. 167. 

Again 1907!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서 10만이 모인 이후에
어떠한 변화가 오겠습니까?
상암으로 가지 말고 예수께로 가십시오.
광장으로 가지 말고 골방으로 가십시오.
집단 속으로 들어가지 말고 자기 가슴 속으로 들어가십시오.
하디가 당한 성령 부흥의 아궁이가 바로 거기였습니다.

한국 개신교회는 더 이상 신학(지식)이 부족하지 않습니다.
교회 건물이나 가진 것이 부족하지도 않습니다.
목사나 선교사의 수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개신교인 수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것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 부족한 것
그것은 예수입니다. <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