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잊혀져 가는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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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 잊으랴 어찌울이 이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울분했던 날을,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도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물리쳐, 이제야 빛나리 이나라 이겨레!!

얼마나 오래전에 불렀던 노래인가! 6·25를 기해 우리 모두 합창을 해 보았으면 좋겠다. 해 돋는 아침의 나라, 삼면이 바다로 둘러있는 동방예의지국, 동해에서 떠오르는 찬란한 태양, 시계도 라디오도 귀하던 조용한 촌락마을!

전쟁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순박한 우리의 선조들은, 가난하지만 이웃끼리 서로 나누며 살아 왔다. 보릿고개를 넘기고 모심기가 거의 끝날 무렵, 북한 공산당이 처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가 피난 보따리를 싸가지고 머리에 이고 어깨에 메고 정처 없는 피난길을 떠났다.

북한 김일성은 1950. 6. 25 새벽 남침하여 순식간에 강원 서울 경기도를 점령 하면서 남한 전체를 공산화 시키려 한 것이다. 점령당한 지역에서는 북한 인민군 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저녁마다 주민전체를 모아 놓고 공산당을 찬양하는 노래를 가르쳤으며 우리의 우익 인사들을 신고하라고 계속적인 정신 교육을 시켰다.

당시 마을에서 일꾼(머슴) 무학자들을 앞장세워 왼팔에 붉은 완장을 채워주고 대나무 창을 주어 거리마다 보초를 세워 우익인사 체포에 혈안이 되었다. 그들이 우익인사(공무원·경찰 등)를 체포해 오면 저녁에 부락민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공로 명패를 가슴에 달아 주면서 공산당 만세를 부르게 하고 사기를 진작 시켜 주었다.

피난길에 오른 우익인사들은 산속에 들어가 칡넝쿨 등 소나무 진액으로 배를 채우며 손으로 풀을 뜯고 나무를 하는 등 하여 손과 발을 농민처럼 만들어야 했다. 길을 가다 완장을 찬 보초에 걸리면 손을 보여 농민 이라는 표시를 보여 주어야 통과 할 수 있다. 만일 손발이 깨끗하면 즉시 체포해 유치장에 가두었다.

당시 인민군들은 경찰서를 차지하고 자위대와 인민위원회가 공동 사용했다. 면단위 지역은 자위대원들이 면사무소를 차지하고, 우익인사를 체포해 오면 옷을 완전히 벗겨 전기선으로 뒷결박하고 무릎을 꿇려 무릎과 엉덩이 사이에 나무토막을 넣어, 움직일 수 없는 고통 중에 참나무 몽둥이로 머리에서부터 전신을 때려죽이는 악랄한 살인을 저질렀다.

어느 지역 자위대장은 우익인사 여섯 명을 같은 수법으로 한자리에서 때려죽이는 처참한 악랄한 살인을 했다. 그 자위 대장은 같은 동내 사람으로 인민군으로부터 붉은 완장을 찬 사람이다. 그들은 피도 눈물도 혈족도 없는 것이다. 공산주의 사상이 물들면 죽음 앞에서도 저들은 사상개조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9·28수복으로 인민군들은 후퇴하면서 너무도 잔인한 살인 행위에 경악을 금치 못한 사건을 한 가지 더 말 할 수밖에 없다. 후퇴 명령을 받은 인민군 들은 대전교도소(당시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우익인사 천여 명을 하루 동안 일시에 살인한 내용이다.

당시 대전 형무소에는 대형 우물 3개가 있었다. 직경이 3m, 길이 50~70m우물로 수감된 인원 들이 사용했다. 인민군들이 선정 분류한 악질 인사 300여명은 옷을 벗기고 한 줄로 세워 우물 앞으로 가도록 하여 각목으로 머리 후두급소를 때려 실신한 상태에서 우물에 거꾸로 쳐 넣어 죽인 것이다. 한 개의 우물에 백여 명씩 우물에 쳐 넣어 일명 살인 장아찌를 담은 것은 것이다. 세 개의 우물에 약 삼백 명이 죽은 것이다.

우물에 시체가 차면 20cm이상 되는 나무토막 우물 덮개를 덮고 두세 사람이 들을 수 있는 큰 돌을 눌러 모두 질식사 시킨 것이다. 나머지 칠백여명은 형무소 마당에 약 1미터 정도의 호를 줄지어 파게하고 뒷결박 상태로 줄 세워 따발총으로 동시에 총살 시킨 것이다. 공산당이 너무도 자인한 살인 행위에 울분을 토해도 시원치 않은 것이다. 이러한 악랄한 살인 행위는 세계에서도 없던 일이다.

이러한 6·25의 참상을 우리 곁에 두고 일부정치 좌파세력들은 6·25가 남침이 아닌 북침이라는 역사를 자라나는 세대에게 교육시킨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 할 수 없는 것이다. 교육부는 철저히 차단시켜 확실한 역사 교육으로 자라는 세대들에게 확고한 국가관을 시켜주어야 한다.

정부는 다시 6·25행사를 시행해야 한다. 6·25의 노래가 무엇인가도 모르는 국민이라면 정책이 잘못되고 있는 것이다. 교육부는 좌파진영의 얼굴을 의식치 말고 철저한 반공교육으로 국토를 우리 손으로 지키겠다는 학생들의 강인한 의지를 키워야 할 것이다.

6·25의 참상은 우리민족사의 가장 아픈 역사이다. 6·25남침 전쟁 63주년을 맞으면서 비참한 고통과 죽음으로 순직한 선조들의 아픔을 되새기면서, 오늘 살아 있는 국민 모두가 두주 먹을 불끈 쥐고 공산주의와는 대화도 타협도 없다는 것을 다시금 상기해야 할 것이다.

퓨리탄장로교회 목사 서 영웅(본지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