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낭소리〉라는 독립영화가 화제다. 2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았고, 해외동포사회에서도 이 영화를 보기 위해 전용극장에서 한 달 동안 특별 상영을 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장안에서도 사람들 사이에 〈워낭소리〉를 화두로 이야기가 시작될 만큼 인기를 끌고 있다.

사람들은 왜 수백억 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서 만든 불록버스트 작품도 아닌, 불과 제작비가 1억원도 채 들지 않은 작품에 반응하고 있는 것일까? 각본도 없고, 특별한 내레이션도 없는, 걸출한 배우도 없는 다큐멘터리영화일 뿐인데 말이다.
〈워낭소리〉는 어느 산골에 살고 있는 노부부와 한 마리의 늙은 소를 주제로 한 3년 동안의 기록영화인데, 사람들의 반향이 예사롭지 않다. 달리 배우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특별한 장비도 필요하지 않았던 영화다. 그렇다고 목소리가 좋은 성우가 더빙을 한 내레이션조차 없는 영화, 그럼에도 장안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입을 모아 〈워낭소리〉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오늘도 극장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왜일까? 그 이유는 극장에서 영화가 끝날 즈음에 가서야 알 수 있게 된다. 영화를 보면서 사람들은 집에서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것처럼 서로가 웅성웅성 이야기를 하면서 편안하게 본다. 특별한 긴장감이나, 다음의 상황을 궁금해 하는 기대감과 박진감 같은 것은 전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관객들은 장면 장면에 함께 동화돼 간다.

그리고 영화가 끝났어도 금방 일어서지 않고 앉아서 여운을 느끼고 있다. 마치 재방송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상황이다. 관객들은 여전히 일행과 함께 수군거리고 앉아있다. 각각의 말을 하고 있지만, 거의 같은 주제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관람객들이 중장년층의 사람들이라는 것이 그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그들은 정신없이 살아온 사람들이다. 해방 후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사회적 격변기를 살면서 살아남아야 했던 지난날들 속에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조차 가지지 못했던 이들이다. 〈워낭소리〉는 바로 그들의 잊었던 지난 시간을 깨우는 소리가 아닐까.

감독의 의도가 어떤 것이었는지, 그것을 작품에서 읽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보는 사람들의 입장에 따라서는 많은 평가의 차이가 있을 수 있는 작품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딱히 이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다만 영화는 우리가 잊고 있던 과거를 돌아보게 했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닐까. 결코 특별한 사람들이 연기한 작품이 아닌, 우리 자신의 모습이고, 또 부모님들의 모습이다. 촬영을 위해서 연출을 하거나 의상이나 무대, 혹은 소품 따위는 아무런 필요가 없었다. 그저 일상의 삶에서 노부부가 살아가는 모습이기에 사람들은 그 공간에서 전해지는 메시지를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

그동안 잊고 살았던 ‘관계’, 즉 인간과 한 마리의 늙은 소,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소의 관계에서 공존을 위한 서로의 필요를 채우고 확인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삶의 의미를 확인하게 하는 것이다. 감독은 인간의 내면을 자연스러운 관계를 통해서 공감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오직 하나의 주제의식을 갖게 하기 보다는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면도 없지 않다.

어찌됐든 사람들은 한 편의 작은 영화를 통해서 잊고 있었던 자신들의 모습과 관계에 있어서 섬김의 도리를 다시 확인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물질적인 풍요와 도시화된 삶의 현장에서 열심히 살고 있지만, 자신의 내면에는 여전히 갈급한 그 무엇이 있음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그래서 잊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반향 하는 것 아닐까. 미물의 짐승과의 관계든, 자연환경과의 관계든 신뢰와 진실함으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은 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전해주고 있다.

신앙의 삶도 결코 다르지 않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기독교 신앙의 구현은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이든,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과의 관계든, 나아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든, 그 관계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것이 신앙으로 사는 이들의 참모습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그 관계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잊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