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기독교의 구원관 비교(4)
              불교의 근본적 세계관은 물질적 정신적 요소의 모든 것을 고()라고 본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모든 문제를 죄()로 보듯이, 불교에서의 최고의 문제는 고(). 살아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고통이라고 생각해서 나온 교리가 일체개고(一切皆苦) : 모든 것이 전부 고통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궁극적 이상은 나라고 하는 존재가 완전히 없어져서 절대 무()로 돌아가는 것이며, 이것을 불교에서는 해탈(解脫)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 해탈인가? 나의 업보에 따라 끝없이 6(천상 인간 수라 아귀 지옥 축생)의 세계를 윤회하는 생사윤회의 세계로부터 해탈이다.

즉 더 이상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상태, 기쁨도 슬픔도 즐거움도 고통도 번뇌도 아무 느낌도 없는 그래서 나라고 하는 존재가 완전히 사라지는 경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궁극적 이상이며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다. 이 해탈을 다른 말로 열반(涅槃)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인도 고어 산스크리트어로 니르바나 (불이 꺼져버린 상태)에서 왔다.

사성제 / 이렇게 생사윤회로부터 해탈하는 것을 궁극적 이상으로 삼고 있는 불교의 교리중에 꼭 알아야할 것이 사성제(四聖諦:4가지 거룩한 깨달음)이다 사성제는 불교교리의 정수라고 할수 있는 아주 중요한 교리다.

1) 고성제(苦聖諦)

사성제중의 고성제(苦聖諦)는 인생의 삶에는 필연적으로 고통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고통에는 사고(死苦)와 팔고(八苦)가 있다. 사고는 생노병사의 4가지 고통 -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 자체가 고통이라는 것이다. 팔고는 사고에다가 애별이고(愛別離苦: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것), 원증회고(怨憎會苦: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야하는 고통), 구부득고(求不得苦:소유하고 싶어도 소유하지 못하는 고통), 오음성고(五陰盛苦: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5가지 요소의 복합체 자체가 고통)를 더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처럼 인간 존재자체가 고통인 것을 인식하고 깨달을 때 해탈의 길을 갈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2) 집성제(集聖諦)

집성제는 고통이 발생하는 원인을 밝히는 것을 말한다, 왜 인생이 이렇게 괴로운가? 인생의 모든 비극은 집착에서 온다는 것이다. 인간이 끊임없이 무언가를 욕구하는 욕망 때문에 고통이 온 것이고, 이 욕망이 계속되는 한 사후에 또 다른 고통의 존재로 태어나서 생사윤회의 과정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3)멸성제(滅聖諦)

멸성제는 인생의 고통을 고치는 방법에 관한 것인데,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는 인간의 욕망을 멸해야하며, 이렇게 고통이 완전히 멸한 상태가 불교의 이상세계인 열반이라고 부른다.

4)도성제(滅道聖諦)

도성제란 고통을 없애는 열반의 세계에 어떻게 갈수 있는가? 그 열반으로 가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 것으로 도성제의 내용이 바로 불교의 팔정도(八正道).

팔정도는 정견(正見),정사(正思), 정어(正語), 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 정정(正定)이다. 이 팔정도를 통하여 생사윤회를 끊고 열반의 세계 즉 완전히 무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이 불교에서 추구하는 구원과 기독교에서 추구하는 구원의 개념이 완전히 다르다. 기독교에서는 인간 세상에 고통과 저주가 온 것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범죄 함으로서, 영적으로 완전히 죽어버렸기 때문인 것으로 본다.

에베소서 2장말씀대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상태에서 마귀의 종이 되어 온갖 죄를 지으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저주와 슬픔 가운데 살다가 죽고 난 뒤에는 심판받아 지옥으로 가야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영적으로 죽어버렸기 때문에 불교의 팔정도의 가르침대로 아무리 불도를 닦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마치 죽은 시체에 연지 찍고 분바르는 격이다. 그런다고 죽은 시체가 살아나는가? 그런데 불교에서는 팔정도를 통하여 부처가 되기 위하여 평생을 노력하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죄로 물든 죄의 장아찌인데, 어떻게 팔정도의 가르침대로 바로 볼 수 있으며(정견), 바로 생각할 수 있으며(정사), 바로 말할수 있는가(정어)? 팔정도를 평생에 걸쳐 닦아도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다

불교계에서 가장 존경받던 성철스님은 불도를 닦아 부처가 되기 위하여 팔년 동안 장좌 불와 했던 분이다. 그러나 그가 죽기 전에 했던 열반 송은 가히 충격적이다

生平欺狂 男女群(생평기광 남녀군) 한평생 남녀 무리를 속여 미치게 했으니, 彌天罪業 過修彌(미천죄업 과수미) 그 죄업이 하늘에 미치고 수미산을 지난다. 活焰阿鼻 恨萬端(활염아비 한만단) 활활 불타는 아비지옥으로 떨어지니 한이 만 갈래다.
一輪吐紅 掛碧山(일륜토홍 괘벽산) 한 덩이 붉은 해가 서산에 걸렸구나' 부처가 되기 위하여 한평생 용맹정진 했던 그가 죽기직전에 영의 눈이 열려서 보니까 자기가 평생 수많은 사람들을 거짓진리로 속인 죄가 얼마나 큰지 수미산(불교의 세계관에서 가장 크다고 생각하는 상상의 산)만큼이나 크다. 그래서 나는 지옥중에 제일 무서운 아비지옥에 떨어지나 이제 후회하고 탄식해도 해가 서산에 떨어지는 것처럼 더 이상 손쓸 방법이 없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구원의 마지막 종착지다.

불교에는 결론적으로 구원이 없는 종교이다. 영적으로 죽어버린 인간이 자기 힘과 노력으로 아무리 철야정진하며 불도를 닦더라도 마지막종착역은 지옥이라는 것을 성철스님이 죽기 전에 고백한 것이다. 설사 불교교리 말대로 도를 닦아 부처가 된다고 한들, 나라고 하는 존재가 완전히 무로 돌아가는 것이니 얼마나 허무하기 짝이 없는 구원인가?

그러나 기독교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다

우리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하여 내 힘으로는 나를 죄와 저주와 슬픔과 고통과 죽음가운데서 건질 수가 없기 때문에, 사랑의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피흘려죽으신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피로 회개하고 그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생명의 주님으로 믿고 영접하면 모든 죄가 용서함 받고, 더 놀라운 것은 믿는 자안에 성령님이 들어오셔서 죽었던 영을 살리신다. 그래서 다시 살아난 나의 영과 성령님의 사랑의 교통을 통해서 우리에게 죄를 이길 수 있는 권능을 주시고 세상과 구별되어 거룩하게 살 수 있는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이다.

이제 믿는 자는 로마서 14:17말씀대로 성령님이 주시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통하여 이 땅에서도 천국의 축복을 누리며 살다가, 죽은 후에는 불교에서처럼 완전히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과 사랑과 평강과 행복으로 충만한 천국에서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구원과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의 개념자체가 하늘과 땅처럼 다른데도, 종교다원주의자들은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불교를 제대로 연구해보면 그런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할 수가 없다. 구원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안에만 있다. 이 놀라운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드린다

                                                             신용주 목사(한밀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