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메시지(4)
                         이런 때 기도하라(2)
                                                               The time when you ought to pray

마가복음 14:32-42

제가 사복음서 안에 기도라는 말을 찾아보았더니 68번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라는 명령어로 찾아 보았더니 10번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신약성경 전체에서는 기도하라는 말이 16, “기도라는 말은 무려 170번 이상 나왔습니다.

기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의 대상(對象)을 분명하게 아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기도의 대상이 예수님인 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정확하게 말한다면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아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혼미(昏迷)한 상태에서도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예배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예배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하고 수가(Sychar)의 우물 가에서 말씀하시는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요한복음4:22).”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자료(source)는 성경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습니다. 왜곡된 성경을 가지고서는 왜곡된 지식을 얻을 수 밖에 없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모세 오경(五經, the Pentateuch) 외의 성경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자연히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매우 제한된, 그리고 편협한 지식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인들은 대대로 우상숭배에 젖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샤마니즘화된 그들의 신앙생활을 경고하신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 신앙 풍토 속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호세아가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 자기 백성들에게 안타깝게 호소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Let us acknowledge the LORD; let us press on to acknowledge him.).” 하는 말씀 아니었습니까? 우리 말 성경에는 힘써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press on”이라는 말이 그 일을 위해서 모든 힘을 다 쏟는다는 뜻 아닙니까? 호세아 당시에 이스라엘은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바로 사마리아인들이 사는 지역이었습니다. 호세아의 메시지는 분명했습니다. 지금 이 나라가 이렇게 혼란하고 위태한 것은 다른데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왕국 유다의 위협 때문도 아니고, 외교(外交)를 잘못하기 때문도 아니고, 국제 정세가 좋지 않기 때문도 아니고, 이 나라가 우상숭배에 빠져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빈곤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민족이 사는 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기르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니까 사람들이 물질의 풍요로움만 추구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니까 사람들이 변방(邊方)으로 가지 않고 중앙으로만 모여들고, 중앙으로 모여들어서 정치계, 경제계의 요직(要職)을 차지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니까 세상을 바꿀 힘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다른 말씀을 하나 볼까요?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안 후에 그의 가치관이 어떻게 달라졌느냐 하는 것을 보여 주는 말씀이 있지요? 바로 빌립보서 3장 말씀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3:7-14).”

너무 많이 들은 말씀이어서 별로 감동이 없지요? 감동이 없는 분들이라도 두 가지 말씀에 주목해 주십시오. 하나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Knowing Christ Jesus my Lord, 8)”좇아가노라(press on, 12, 14)”는 말씀입니다. J. I. Packer가 쓴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이라는 책 제목을 생각나게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해서 그의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이 말씀을 읽는 사람들이 늘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꼭 그렇게 다 버려야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얻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동의(同意)하든 동의하지 않든 바울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高尙)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전에는 몰랐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보니까 그분을 아는 지식이야말로 나에게 있어서는 가장 귀한 것입니다. 나는 그분을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 지식을 얻는 일에 나의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무엇을 목표로 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은 지금 자기가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 그에게 있어서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아닙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이 세상 무엇보다도 귀하다고 선언했던 바울이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그는 중앙으로 가지 않고 아무도 가지 않는 변방으로 갔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중앙은 예루살렘입니다. 출세하려면 예루살렘으로 가야 합니다. 거기서 요직에 앉는 것이 출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를 버리고 변방으로 가서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소아시아(Asia minor)의 선교사로 20년 이상을 보낸 것입니다. 그리고 유럽으로 건너갔습니다. 토인비(Arnold Toynbee, 1889~1975)가 한 말을 아십니까? “그 때 바울을 태우고 마게도니아로 갔던 그 배는 유럽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배였다.”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 바울이 했던 이 말은 그로부터 1940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배우는 일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배우는 일에, 여러분의 모든 것을 거십시오. 이 지식이 세상을 바꾸고, 이 지식이 세상을 구원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기도하십시오. 기도의 본을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서 기도하십시오.

오늘 말씀은 기도에 대한 가장 고전적인(classic) 말씀입니다. 기도가 무엇인가 하는 기도에 대한 정의(定義, definition)를 이 말씀에서 배울 수 있고, 힘써 간절히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 기도를 하셨을 때 예수님께서 어떤 환경(situation)에 계셨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말끝마다 죽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오늘 말씀에서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34).” 예수님은 지금 자기의 심정이 너무 고민이 커서 죽을 지경이라고 하셨습니다. 33절에도 예수님께서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다(He began to be deeply distressed and troubled.).”고 했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란 말을 KJV 성경에는 “My soul is exceeding sorrowful.” 이라고 했고, NIV 성경에는 “My soul is overwhelmed with sorrow.” 라고 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영어 사전에the Man of Sorrows라는 말이 있는데, 직역하면 슬픔의 그 사람혹은고민의 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전에 이 말이 예수를 가리킨다고 나와 있습니다.

마음에 큰 고민이 있을 때, 마음에 번민(煩悶)이 있을 때, 좀 더 넓게 적용한다면 마음에 갈등(葛藤, conflict)이 있을 때, 마음에 걱정이 있을 때, 마음에 슬픔이 있을 때, 마음에 괴로움이 있을 때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찬송가 487죄 짐 맡은 우리 구주가사가 생각납니다.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시험 걱정 무거운 짐 없는 사람 누군가 부질 없이 낙심말고 기도드려 아뢰세.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 진 자 누군가 피난처는 우리 예수 주께 기도드리세.” 그렇습니다. 고민거리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갈등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슬픔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마음에 괴로움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걱정입니다. 갈등입니다. 괴로움입니다. 이런 것들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인간의 실존적(實存的)인 문제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인간의 실존적인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물을 것입니다. “기도하면 그런 문제들이 모두 해결됩니까?” 저는 단순히 그렇다고 말하지 않곘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저도 여전히 그런 문제들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우리가 이런 문제들에 직면했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최선의 일은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그것을 친히 본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보다 걱정거리 하나를 더 가지고 있다고 보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하고 내 뜻이 달라서 마음에 갈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런 갈등이 없습니다. 그런데 다행하게도 성경은 이런 문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린도후서7:10-11).” NIV 성경에 “godly sorrow”“worldly sorrow”라는 말로 대조적으로 잘 표현했습니다. godly sorrow는 우리에게 유익하다고 합니다. 우리를 회개하고 하고 우리에게 구원을 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godly sorrow는 우리의 삶을 변화 시킨다고 합니다. 우리가 열심을 내게 만들고(what earnestness), 우리를 분명하게 만들고(what eagerness to clear yourselves), 거룩한 분노를 품게하고(what indignation), 경고를 깨닫게 하고(what alarm), 사모하게 하고( what longing), 관심을 갖게하고(what concern), 정의가 행해지는 것을 보게 한다(what readiness to see justice done)고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 때문에 고민하고 갈등하는 그 자체가 여러분에게는 축복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 고민 한번 해 볼 기회도 없이 인생을 마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고 고민하는 것 자체만 해도 축복이라면,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우리의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였을 때 우리에게 오는 은혜와 축복은 얼마나 큰 것이겠습니까? 예수님의 본을 따르십시오. 예수님은 그 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여러분도 예수님의 기도를 그대로 따라서 하십시오.

기도를 마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41-42).” “때가 왔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께 더 이상 고민이 없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은 내가 죽을지경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대신 이제 내 마음이 결정되었다고……내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나니 이렇게 내 마음이 평안하다고, 이렇게 내 마음이 기쁘다고……이제 일어나 나와 함께 가서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말씀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영적 싸움을 위한 능력을 얻기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여러분, 마가복음 9장에 유명한 변화산상(The Transfiguration on the Mountain)” 의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 산에서 내려 오셨을 때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달려와서 간청했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에게 벙어리 귀신들린 제 아이를 고쳐 달라고 했지만 고치지 못했습니다. 제 아이를 고쳐 주십시오(9:17-18).” 예수님은 이 말씀을 들으시고 한탄하셨습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예수님께서 자기 세대를 믿음이 없는 세대(unbelieving generation)”라고, “불신의 세대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얼마나 더 너희에게 믿음이 있기를 기다려야 하겠느냐고 한탄하셨습니다.

왜 그런지 저에게는 이 불신의 세대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기도하지 않는 세대라는 말로 들립니다. 제가 잘못 들은 것입니까? 제가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한 것입니까? 제자들이 그 아이를 고치려고 애썼던 장면을 생각하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고쳐 보려고 별 시도(試圖) 다 해 봤을 것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하셨던 방법들을 다 해 봤을 것입니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이렇게 물어도 봤을 것이고, “네가 믿느냐?” 이렇게 물어도 봤을 것이고, 그 아이에에 손을 얹고 안수도 해 봤을 것입니다. 좀 더 상상력을 동원해 보면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벙어리 귀신아 물러가라.” 이렇게 외쳐도 봤을 것입니다. 어떤 제자는 예슈의 이름으로 명하노니……이렇게도 해 봤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나중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 kind)가 나갈 수 없느니라(29).” 귀신을 내 쫓는 일은 영적 싸움입니다. 치열한 영적 싸움에서 이겨야 이런 유를 쫓아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 한가지는 예수님의 이 능력이 기도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예수님과 기도하지 않는 제자들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과 기도하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바로 이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영적 싸움에서 이길 힘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영적 싸움에서 이길 힘이 없습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열심히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라도 예수님처럼 그렇게 척척 귀신을 쫓아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라도 예수님처럼 그렇게 척척 병을 고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렇게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싸우는 영적 싸움에는 귀신을 쫓아내는 일 뿐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자체가 크고 작은 영적 싸움입니다. 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는 자체가 영적 싸움이고, 이 세상에서 말씀을 실천하는 일 자체가 영적 싸움이고, 믿지 않는 사람을 전도하는 일 자체가 영적 싸웁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사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체가 영적 싸움입니다.

1999년에 우리교회에서 처음으로 중미(中美)에 있는 코스타리카에 단기선교를 갔을 때 저는 그 사실을 피부로 느꼈습니다. 대원들을 데리고 노방 전도를 했습니다. 한번은 멋모르고 했습니다. 그러나 두번째 집들을 방문해서 전도를 하려고 하는데, “목사님, 못하겠어요. 힘이 쫙 빠지는데요.” 여기저기서 그래요. 제 자신도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니 제가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래. 알았다. 오늘은 그만하고 철수하자.” 그랬겠습니까? 아니요. “무슨 소리야. 힘내서 다시 돌자.” 대원들이 잘 이겨냈습니다. 전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그 기쁨은 말할 수 없었습니다. 영적 싸움에서 이긴 승리의 기쁨입니다.

KJV에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이런 유는 기도와 금식으로 밖에 쫓아내지 못한다(This kind can come forth by nothing, but by prayer and fasting.).”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광야에서 40일 간 기도와 금식으로 마귀와 영적 싸움을 싸우셨습니다.

날마다 여러분의 삶이 영적 싸움인 것을 인정하십니까? 그 싸움에서 승리할 능력이 내게 없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그렇다면 기도하십시오. 영적 싸움에서 이길 힘을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사순절에 금식을 하시는 분 계십니까? 이왕에 결심하고 시작하신 일이면 중단하지 말고 끝까지 하십시오. 그분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영적인 힘을 공급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