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메시지(2)
                           나와 함께 깨어서 기도하자
                                             Keep watch and pray with me.

신문사 로고.jpg 누가복음22:39-46
 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40 그 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41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더라. 45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을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주님(the Lord)”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주님이라는 말의 뜻을 아십니까? 그리이스 말로큐리오스(Kurios)”라고 하는데, 적어도 10개 이상의 뜻이 있습니다.“큐리오스는 일반적으로 상대방에 대한 존경과 예의를 표시하는 말입니다. 영어의 Sir에 해당한다고 보겠습니다.

그밖의 중요한 뜻으로 소유주(owner)라는 뜻이 있고, 주인(Master)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최고의 권위를 가진 분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를 때 우리는 그분을 향해서 당신은 나의 생의 주인이시며, 소유자이시며, 나는 일생 동안 당신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나의 생애와 나의 사상에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분이십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2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믿음 생활에서도 주님이 되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믿음 생활에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계십니다. NIV 성경에는 이 말을 “the author and perfecter of our faith” 라고 했습니다. “author”라는 말이 책을 쓴 저자(著者)라는 뜻도 있고, 창시자(創始者)라는 뜻도 있습니다.

지금 한국에는 학원 교육의 열풍(熱風)이 불고 있습니다. 학교 교육은 마비상태이고 학원 교육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모들이 자녀들의 학원비 마련하느라고 허리가 부러질 지경이지요. 서울 강남의 어느 동네에 가면 학원들이 밀집해 있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학원들마다 명강사들을 유치하려고 치열한 전쟁을 벌인답니다. 학원마다 인기 있는 강의는 유명한 교재를 쓴 저자가 직접 강의를 하는 저자 직강(直講)” 이라고 합니다. 공부 좀 한다는 학생들은 그 책을 봐야 하는데, 그 책을 쓴 저자가 직접 강의를 한다니 이보다 더 좋은 강의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히브리서 말씀은 우리의 믿음에도 저자가 있다고 합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 생활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이런 질문들을 가장 정확하게 알려면 믿음의 저자의 말을 듣는 것이 제일 좋은 길인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여기 바라보자는 말은 눈을 그분에게 고정하자(fix our eyes on Jesus)는 말입니다. 다른데 한 눈 팔지 말고 믿음의 저자이신, 그리고 믿음을 완전하게 해 주실 그분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올바른 믿음생활을 위해서 이보다 더 중요한 말씀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에게 여러분의 눈을 고정하십시오. 그러면 믿음생활에 시험 받을 일도 없고, 상처 받을 일도 없이 건강한 믿음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하신 말씀에 마음을 집중해서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제가 어느 책을 읽다가 보니까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영어에는 말씀을 듣는다는 말과 말씀을 따른다는 말이 각각 listen이라는 말과 obey라는 말로 따로 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말에는 말씀을 듣는다는 말과 따른다는 말이 순종(順從)이라는 한 단어로 되어 있다.” 참 신기하게도 이렇게 좋은 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말씀을 듣는 일과 말씀을 따르는 일을 별개로 생각합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말씀을 들은 사람은 당연히 그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참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두가지를 한가지 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말씀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에게 눈을 고정하고 그분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겼으며, 어떻게 경건생활을 했는가 하는 것을 보고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경건생활의 핵심은 기도생활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3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Jesus went out as usual to the Mount of Olives, and his disciples followed him.)……이 말씀에서 주의 깊에 봐야 할 말씀은 습관을 좇아라는 말입니다. 영어로 하면 “as usual” 입니다. 직역하면 평상시에 늘 하던대로이런 말입니다. 예수님에게 기도생활은 늘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평상시에 안하던 특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습관은 내 삶의 자연스러운 한 부분입니다. 습관처럼 하는 일은 힘들지 않습니다. 당연히 해야하는 일입니다. 하루 3번 밥 먹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습관입니다. 먹으면서 아이구, 힘들어 못살겠네.”하는 사람 없습니다. 저에게 사람들이 매일 새벽 기도를 하면 힘들지 않아요?” 그렇게 물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목사님, 어떻게 매일 새벽 기도를 하세요? 힘드시겠어요.”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힘들지 않아요. 습관이 되어서 새벽 4:50이면 잠이 깹니다.

요즘에는 조금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4:30분에 일어납니다. 어떤 때는 불가피하게 늦게 자는 때가 있어서 12시에, 아니면 12시도 넘게 자야 하는 때도 있지만, 그 때도 제 시간에 일어나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습관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은 습관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습관도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한다면 그분의 모든 것을 따라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은 매일 기도하는 습관을 가졌을 뿐 아니라 또 하나의 습관이 있었는데, 예수님은 새벽 미명(未明, very early in the morning)에 일어나서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마가복음1:35). 이제 갓 목회를 시작한 젊은 목사가 새벽기도를 하긴 해야 하겠는데 너무 힘들어서 도대체 어떤 놈이 새벽 기도를 만들어 가지고 이 고생을 시키는거야?” 하고 짜증을 냈답니다. 새벽기도 누가 누가 먼저 하셨습니까? 예수님이 먼저 하셨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이 예수님의 좋은 습관을 본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건생활의 습관을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21:37-38예수께서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All the people came early in the morning to hear him at the temple.).”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른 아침에 성전에 계신 것을 알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른 아침에 성전으로 갔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듣는지 모르겠습니다.

저에게는 이 말씀이 신비롭고 경이(驚異)롭게 들립니다. “, 우리 주님도 바로 이 시간에 성전에서 기도하셨구나. 그리고 말씀을 가르치셨구나! 이른 새벽에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사람들이 성전에 몰려왔구나!” 경이롭지 않습니까? 이 말씀을 여러분의 삶에 적용 시켜 보십시오. “, 그렇다면 이른 새벽이야말로 우리 주님의 말씀을 듣기에 얼마나 좋은 시간인가? 주님, 오늘도 저에게 꼭 필요한 말씀을 주셔서 저를 가르쳐 주십시오.”

 

다시 본문 3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이제 이 말씀을 영적 지도자의 입장에서 보십시오. 영적 지도자이신 예수님이 습관처럼 기도를 하시니까 제자들이 그대로 따라갑니다. 우리 기독교의 리더쉽은 지도자가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시편 133편에 보면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라고 했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곳은 신앙 공동체 곧 교회를 말합니다. 그 신앙 공동체를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신앙 공동체가 어떤 공동체입니까?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을 타고 내려와서 옷깃을 적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들이 본을 보이는 신앙 공동체, 이 공동체를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는 것입니다.

지도자, 리더가 경건생활이 본을 보일 때 교회가 삽니다. 리더들이 기도해야 조원들이 살고, 교회가 사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를 하나님께서 축복하십니다. 이 말씀을 흘려듣지 마세요. 우리교회에 많은 리더들이 있습니다. 지난 공동회의에 참석했던 어떤 교우가 그래요. “목사님, 우리 교회에 이렇게 리더들이 많은지 몰랐어요.” 그래요. 우리교회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많은 리더들이 있습니다. 리더들이 기도합니까? 리더들이 경건생활에 힘씁니까? 그런 리더를 가지고 있는 조(), 그런 리더를 가지고 있는 구역, 그런 리더를 가지고 있는 선교부서들은 행복합니다.

그런 리더들이 많은 교회는 복이 있습니다. 반대로 경건생활에 힘쓰지 않는 리더가 있는 조는, 그런 구역은, 그런 모임, 그런 단체는 불행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의 생활에 대하여 필요성을 느끼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도하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없으니까. 기도하지 않아도 가정에 문제가 없고, 기도하지 않아도 내 생활에 문제가 없으니까. 그러나 정말 문제가 없습니까? 문제의 심각성을 몰라서 그렇지 정말 문제가 없습니까? 문제가 있어도 그 문제를 영적인 측면에서(from the spiritual side) 보지 않으니까 그렇지 정말 문제가 없습니까?

오늘 말씀 보세요. 왜 우리가 기도해야 합니까? 우리 주변 도처에 시험(試驗)이 있으니까 그 시험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을 들어 보세요.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Pray that you will not fall into temptation.).” 시험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여기 시험은 삶의 유혹(誘惑, temptation)입니다. 예수님께도 유혹이 있었습니다. 유혹이 누구에게서 옵니까? 사탄에게서 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유혹하지 않습니다. 유혹은 사탄에게서 옵니다.

젊은이들에게 사탄의 유혹이 있습니다. 바울이 제자 디모데에게 했던 충고의 말씀을 기억합니까?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Flee the evil desire of youth.)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디모데후서 2:22).” 청년 시절에 청년의 정욕을 이기지 못하면, 거기에 빠져서 인생을 낭비하게 됩니다. 청년 시절에 주어지는 evil desire는 다양합니다만 성적인 유혹이 제일 강합니다. 그리고 마약 같은 감각적(感覺的)이고 말초적(末梢的)인 유혹이 있습니다.

그리고 잘못된 종교, 잘못된 사상에 빠질 위험도 있습니다. 저는 쓸만한 청년들이 잘못된 종교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청년들도 많이 보았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런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유혹을 이길 최상의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조금 바꾸어서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번 사순절 기도 때에 느낀 것을 좀 얘기할까요? 많은 사람들이 새벽기도에 헌신하겠다고 싸인했습니다. 기도하고 조금 늦게 친교실에 내려와 보면 사람들의 얼굴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어요. 생기가 있고 활기가 있어요. 그리고 교회에서 주는 베이글을 구어 먹고 가방을 메고 친구들과 함께 나가는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는지요. 저는 그 뒷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 아이들을 축복해 주세요.” 가장 유혹이 많은 청년의 때에 하루를 말씀과 기도로 시작하게 하시고, 믿음의 친구들과 함께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는 생활, 말씀 그대로 얼마나 복된 생활입니까?

유혹이 청년들에게만 있습니까? 제자들에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도 있었습니다. 이제 곧 제자들에게 고난이 닥쳐 올 것입니다. 핍박이 올 것입니다. 이 때 사탄은 제자들에게 믿음을 버리도록, 예수님을 부인(否認)하도록 유혹할 것입니다. 이 유혹을 어떻게 이깁니까? 기도 밖에는 사탄의 유혹을 이길 길이 없습니다. 청년의 때에만 유혹이 있습니까? 아니예요.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들이 유혹의 순간들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환경들이 유혹의 환경들입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귀로 듣는 것이, 머리로 들어오는 것이 모두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입니다. 사탄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유혹에 빠져서 세상적으로 살도록 속삭입니다. 믿음을 버리고 적당히 타협(妥協, compromise)하면서 살도록 그리스도인들을 유혹합니다. 매일 우리가 그런 유혹에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컴퓨터에 바이러스(virus)가 들어오면 맛이 갔다고 합니다.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그리스도인들은 맛이 간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바이러스가 들어온 컴퓨터처럼 왜 그렇게 맛이 간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까?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무릎을 꿇고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이 잔이 무슨 잔입니까? 십자가의 고난,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둔 예수님을 사탄이 유혹합니다.

변장(變裝)의 명수인 사탄은(고린도후서 11:14) 먼저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의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예수님, 절대로 돌아가시면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다니요? 다시는 그런 말씀 마십시오.” 사탄은 제자 베드로의 음성으로 변장하고 예수님을 질책(rebuke)했습니다.

또 사탄은 예수님께 호감을 가지고 있는 어느 바리새인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지금 빨리 여기를 피하십시오. 당신을 잡으려고 하는 음모(陰謀)가 있습니다(누가복음 13:31).” 이제 사탄은 집요하게 예수님 내부(內部)에서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지금은 십자가를 질 때가 아니야. 아직도 할 일이 많아. 제자들을 봐. 그들을 어디 믿을 수가 있겠어? 그들은 내가 없으면 오합지졸이야. 아무 것도 못해.”

예수님이 이 유혹을 어떻게 이깁니까? 하나님께 간절히, 땀이 핏방울같이 땅에 떨어지도록, 기도함으로 이 유혹을 이겼습니다. 예수님은 목숨을 걸고 기도하셨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하셨습니다.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기도하셨습니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기도의 삶의 본(, example)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사탄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지 본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삶의 주가 되심을 믿습니까? 그분의 주되심(Loadship)”을 인정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이 보여 주신 기도의 본을 따르십시오. 그 본을 따라 실천하십시오. 그분의 본을 따르지 않으면서 어떻게 그분이 나의 주가 되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하지 않고 잠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46).” 마태복음 26:40-41에는 이 말씀이 더 절박하게 나와 있습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요? 왜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왜 그런 말씀을 하셔서 제자들이 기도하지 않는 빌미를 제공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기도하는 본을 예수님께서 보여줬다면, 기도하지 않는 본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보여줬습니다. 세번이나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깨어서 기도하자.” 이렇게 말씀하셔도 기도 안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이 제자들의 본을 잘 받는지 제가 육신이 약해서요.” 하면서 기도 안합니다.

오늘 우리 세대는 기도하지 않는 세대입니다. 그래서 능력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적습니다. 벙어리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마가복음 9:29).”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탄과의 영적인 싸움입니다. 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기도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많은 경건 서적을 낸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 3가지가 있다. 하나는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둘째는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이요, 셋째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이다. 이 세가지 중 첫째와 둘째를 유지하려면 반드시 아침 일찍이 일어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뭘합니까? 성경을 읽습니까? 기도를 합니까? 모두 옳은 말이지만 더 좋은 대답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도의 사람 죠지 뮬러(George Muller)도 아침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평생 이런 습관을 가질 수 있었던 데에 숨은 일화가 있습니다. 한번은 그가 어느 형제의 집에서 자게 되었습니다.

뮬러는 아침 6시에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집 주인은 뮬러보다 더 일찍이 일어났습니다. 뮬러가 하도 이상해서 주인에게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주인이 하는 말이 레위기 말씀을 보면 제단 위에 소와 양의 똥을 드릴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나도 똥 같은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에 충격을 받은 뮬러는 평생 5시에 일어났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나와 함께 깨어서 기도하자!”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여러분,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하루 중의 가장 귀한 시간을, 여러분의 인생 중의 가장 귀한 토막을 하나님께 기꺼이 드리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이 일을 내일부터라도 당장 실행한다면 웟치만 니(Watchman Nee)가 말한 것처럼 기쁨의 바람이 매일 불어오지 않을지라도 평강(平康)의 바람은 매일 불어 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