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말씀 100살 넘게 지켜온 고성옥 권사” 
 


 삼양교회 명예권사 106세 고성옥씨 신앙과 삶

새로운 선교 100년을 시작하며 제주교회와 성도들에게 사도행전적 삶의 도전을 던지고자 제주기독신문이 기획한 ‘제주교회 100년의 열매들을 발굴한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고성옥씨(삼양교회 명예권사)다.

고 권사의 삶이 단순한 평신도의 신앙생활쯤으로 여겨지겠지만 고 권사 한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한 가족 구성원이 4대째 신앙잇기를 해가고 있는 일은 결코 작은 일이라 할 수 없다. 고 권사를 통해 많은 후손들이 교회 중직을 맡고 있다. 그리고 고 권사의 이웃봉사 활동과 그 집에 세 들어 살았던 사람들이 전도되어 지금은 교회 중직자로 세워지고 있다.

고 권사는 올해로 106세라 이제껏 지켜온 신앙생활의 저력(?)을 드라마틱하게 끄집어 낼수는 없었지만 취재기자에게 단편적으로 건네 주는 ‘기억’은 많은 것들을 함축하고 있었다. 고 권사의 한마디 한마디는 그 자체로 제주교회의 역사이며, 제주교회 초기 평신도들의 신앙생활 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하겠다.

고성옥 권사는 13세 때인 1915년에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제주기독교 100년 역사에 필적하는 94년이란 긴 시간동안 변함없는 신앙을 지켜왔다. 고 권사는 13살 때 조천 개낭개 교회(1909년 창립)에서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고 권사가 처음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고 권사의 어머니 때문이었다. 고 권사의 모친은 오랫동안 몸이 아파 마음까지 고생하던 중 친척으로부터 ‘예수 믿으면 낫는다’는 얘기를 듣고 그토록 터부시 해온 교회 문턱을 넘었다는 것.

고 권사는 1918년 어머니의 치료를 위해 함께 삼양으로 가야했던 일이 있었다. 치료를 받으며 차도가 있을 때까지 삼양에 잠시 머물어 있어야 했다. 당시 침을 놓고 뜸을 뜨는 한방치료사 오주병 장로(당시는 교우)를 만나게 됐다. 오 장로가 처방해준 약을 먹으면서 기도하면 좋아진다는 얘기와 권유를 듣고 삼양에서 3년여를 지냈다고 한다.

고 권사의 모친은 고 권사가 18세가 되던 1920년 초에 고향인 신촌으로 귀가했지만 그해 2월 54세 나이로 돌아가셨다. 고 권사는 같은 해 3월에 학습을 받고 10월 김창국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를 계기로 삼양으로 시집을 오게 되면서 삼양교회에서의 본격적인 신앙생활이 시작됐다.

초기 신앙인들에게 많은 핍박이 있었다.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등 수많은 국난은 고 권사의 신앙을 더욱 영글게 했다. 고 권사는 일제시대의 아픔이 너무 커서인지 조천만세운동 사건을 떠 올리며 일제 강점기 기독교인들의 수난을 소개하려 했다.

“일본 놈들이 한국을 빼앗아 갈 때 청년회에서 만세운동을 했지. 청년들이 나서서 만세 부르면 일본 사람들이 그 청년들 모두 잡아다가 죽이고, 끓는 물에 담그고, 코나 주둥이로 물을 넣고…. 사람이 어디 살아나겠나? 그런 사실들을 모두 지켜봤어”

“당시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을 보면 예수쟁이라고 비아냥거렸지. 제사도 안하고, 자기 부모와 조상의 제사·명절도 못하게 한다며 서양교를 믿지 말라고 했어. 주일날 예배드리러 갔다오면 가족과 친인척들에게 머리채를 잡히거나 여러 방법으로 핍박 당하기가 일쑤였어. 그리고 ‘저 예수쟁이, 예수 믿는 사람’들은 결혼도 안하려고 한다고 비난하면서 이상한 사람 취급을 했지”106세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고 권사는 이기풍 목사로부터 들은 설교나 이야기를 부분적으로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이기풍 목사는 ‘세상이 하나님을 안 믿는다. 이렇게 하다가 세상이 불로 멸망을 당하고 만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다가는 이 세상이 불로 심판을 받는다’고 늘 말씀하셨다고 한다.

고 권사는 글을 배우지 못했기에 목회자의 말을 기억하기로 했다며 이기풍 목사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100살이 넘도록 지켜왔다고 했다. 그것만이 어려운 시기를 이길 수 있는 ‘복음의 능력’이었던 것이다.

또한 이기풍 목사님은 ‘무슨 일이든지 순종하고, 복종하고, 나라든 어디든 복종하고 순종할 것과 하나님을 공경하고 업신 여기지 말라, 세상의 모든 사신우상은 하나님 법에 어긋난다고 가르치셨다’고 했다.

이 목사의 설교내용을 하나님 말씀으로 알고 평생 살아왔다고 거듭 강조하는 고 권사는 “하나님 말씀대로 이렇게 살다가 하나님 오라시면 복종하며 갈수 있어야지. 하나님 앞에 나가서 ‘하나님 나는 이렇게 살았습니다’라고 할 수 있지. 100년이 넘도록 사신우상도 안 섬기고 살았다”며 1만8천 우상이 깃든 제주 땅에서 믿음을 지켜낼수 있었던 능력(?)을 소개했다.

30년 이상 삼양교회를 섬겨오면서 고 권사를 지켜 본 한관용 원로목사는 “창립 초기부터 매사에 헌신적으로 교회를 섬겨 오신 분이다. 오랜 세월 동안 교회에 필요한 여러 가지 일들에 헌신해 오셨고, 기도생활도 열심히 하셨다. 자녀들도 신앙으로 잘 양육했다. 권사님 뿐 만 아니라 그 자녀들까지도 교회에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있다.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몸소 실천하는 분이며 모든 교인들에게 본이 되는 믿음을 가지셨다”고 말했다.

또한 삼양교회 송중용 장로에 따르면 고 권사의 자녀들 모두가 장로, 권사, 집사로 헌신하며 4대가 함께 큰 가정을 이루며 살기에 ‘천만인의 어머니, 리브가’라고 불리기도 한다고 했다. 또한 그 집에 세 들어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해 교회 장로, 권사로 교회를 섬기게 되는 데는 이들에게 믿음의 복을 누릴 수 있도록 기도해 줬고, 생활의 본을 보이셨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고 권사의 집을 ‘삼양의 예루살렘’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고 권사의 아들인 김건의 장로(삼양교회 은퇴장로·73)는 “어머니는 예수를 잘 믿으라고 늘 강조했다. 특별한 교육은 없으셨다. 어릴 때부터 하나님께 순종하며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어머니의 신앙생활을 보며 그냥 따라 가기만 했다. 그러기에 지금도 집안 일 보다는 교회에서 봉사하는 일이 우선이다. 또 그런 모습을 자녀들도 자연스레 배워가고 있다”고 말한다.

며느리인 박정순 권사는 “지금도 우리가 새벽기도 가는 시간에 일어나서 기도하시고 주무시기 전에 꼭 저녁 기도를 하신다. 나라와 교회를 위해서 평생을 기도하고 있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 그리고 지금은 연세가 많아서 거동을 잘 못하지만 웬만하면 성전인 교회에 직접 가시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정말 배울 만한 신앙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고 권사는 신앙의 후배에게 해 줄 당부가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전도 많이 하고, 기도 많이 하고, 이웃 사랑 잘 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기도하는게 제일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저 내 욕심만 채우고 나만 잘 살면 제일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다.

남도 살고 나도 살고, 죽어가는 사람 살려도 주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사람이 잘 사느냐 못 사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관이다.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아느냐?”는 주문은 곧 한세기 가까이 삶을 살며 지켜낸 고 권사의 신앙고백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