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워지는 바나바
작성일[2008/12/18 17:06:28]    
행4:32-37

2008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의 인물 중 누구를 가장 좋아 하십니까? 저는 많은 인물 중에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를 가장 좋아합니다. 마리아를 생각할 때마다 아름답고 향기롭고 충격적으로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마리아의 계산을 초월한 사랑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사울왕의 아들 요나단을 알고 계십니까? 그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 아닌데도 이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의 마음이 뭉클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다윗이 죽으면 왕권에 대한 라이벌이 제거되는 셈이고 그렇다면 자기가 쉽게 왕이 될 수 있었지만 그에게는 왕보다 한 인물이 중요했기에 왕좌를 버리고 친구를 택했습니다. 그는 업적이나 감투보다 인간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보여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또한 예수님에 의하여 높이 평가된 사람이 누구인줄 알고 계십니까? 바로 세례 요한, 그의 외침 앞에 사람들은 누구나 나와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새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그는 분명히 그 시대의 영웅이었고 정신적인 지주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등단하자마자 요한을 따르던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말로 쉽게 바꾸면 “선생님 이래도 되는 겁니까? 선생님의 제자들까지 예수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 말을 뒤집어 말 하면 “선생님은 질투도 안 나십니까? 라는 뜻일 것입니다. 이때 세례 요한은 그 유명한 ”그는 흥하여야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라는 고백을 합니다. 주인공은 바로 저분이시오 자기는 들러리일 뿐 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요한의 대답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목 베임을 당하여 죽은 많은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의 신앙 모범이 되고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인간의 야심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에 둔 신앙 때문인 줄 믿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계산을 초월한 마리아의 헌신, 인간을 소중히 여기는 요나단의 휴머니즘,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요한의 신앙심, 이모든 가치를 한몸에 지니고 있었던 한 사람을 아십니까? 바로 바나바를 말입니다. 오늘 이 사람을 소개하려 합니다. 저는 요즘 자꾸 이 사람이 그리워 집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제목을 “그리워지는 바나바” 라고 정해 보았습니다. 왜 이사람이 그리워 집니까?

1.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너무나 타산적이요 계산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대에 계산을 초월하고 살았던. 그리고 더 높은 가치를 위해서 헌신 할 줄 알았던 바나바가 그리워 집니다. 본문은 바나바에 대한 첫 번째 에피소드입니다. 36-7절에 보면 성도들이 교회 사역을 위해 자신의 밭을 팔아 헌납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나 이때나 부동산처럼 확실한 재산이 없었나 봅니다. 이 사람 바나바도 자기의 밭을 팔아 하나님께 헌납했다고 기록 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초대교회가 가난했으면서도 가난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도들은 가난했지만 풍성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풍성은 바나바가 붐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그의 이름은 원래 요셉이었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바나바”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36절) 이는 “격려의 아들” “권고하고 위로 하는 자” 라는 뜻입니다. 바나바로 인하여 권고 받고 위로 받고 도움 받은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별명을 붙여 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붐 속에서 관심있는 현상은 바나바의 헌신으로 바나바가 존경 받고 칭송 받는 것을 보고 “나도 바나바처럼 존경을 받아 보았으면 ···” 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다음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밭을 팔았습니다. 그런데 팔고 보니 너무나 아깝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을 뚝 떼어서 감추어 두고 사도들에게는 전체인 것인 양 갖다 바쳤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기들도 “바나바와 같이 존경을 받겠지?”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온 결과는 존경과 명예가 아니라 비극적인 종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헌신의 동기가 주님 앞에 드리고 싶어서가 아니라 바나바의 인기가 탐나서 드린 것입니다. 그들의 헌신에는 분명히 불순한 동기가 포함 되어 있었습니다. 시기로 말미암은 헌신이요, 과장 된 헌신이요, 거짓된 헌신이었습니다. 바나바의 헌신과 얼마나 큰 차이가 있습니까? 바나바의 헌신은 남이 알아주기를 원하는 헌신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이만큼 드렸으니 내가 교회 안에서 이 만큼의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는 의식조차 없었던 사람입니다. 요즘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문제와 같은 것들이 아니겠습니까? 바나바는 자기가 드린 것에 대하여는 일체 왈가왈부 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저 사도들 발 앞에 두었다고만 했지 “이것은 어디 어디에 써야 합니다.”라고 주장은 흔적은 전혀 없습니다. “어느 교회는 자기가 드린 헌금에 대하여 이렇게 쓰여져야 합니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드리는 것이 아니라 투자 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바친 것과 그것에 대한 권리 주장이 전혀 별개의 것이 될 때 비로소 드린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뜻을 위해 쓰여 질 때 나의 뜻대로 씌여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거기에 족할 줄 아는 헌신이 참된 헌신인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제물들을 기억 하십시오, 주님 앞에 드려진 제물들은 피가 다 빠진 완전히 죽은 제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날뛰며 살아 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드린 것은 모두 자아가 죽은 상태에서 드려져야 온전한 제물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살아 계셨으면서도 죽은 제물과 같이 순순히 쓴 잔을 마셨습니까? 하나님의 어린양 제물이기 때문입니다.

바나바의 헌신은 철저히 이렇게 드리는 헌신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소위 헌신, 봉사, 헌금, 직분... 들이 자기 과시를 위한 동기로 사용되어 지는 경우가 많은데, 모두가 다 자기자신이 인정받으려는 동기, 체면의 동기... 이러한 동기가 난무하는 상황 속에서 바나바의 헌신은 우리에게 숙연한 교훈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마치 옥합을 깨뜨린 여인처럼, 초월적인 헌신을 하고 드려진 것으로 만족했던 바나바가 얼마나 그리워지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이 바나바가 그립지 않으십니까?

2. 바나바가 그리워지는 이유는 이 세상 모든 것보다 인간의 소중함을 알았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사회는 경쟁사회 이기에 성취를 최고의 목표로 삼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때문에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경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입시경쟁, 취업경쟁, 생존경쟁, 수출 경쟁... 등 이미 우리는 경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말로 심각한 것은 목표만을 추구하다 보니 인간성은 짓밟히고 인간을 단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 되어버리고 마는 인간성 상실에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서 사도행전 9장에 나오는 바나바의 또 다른 이야기는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을 던져 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의 첫머리는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잡으려고 살기 등등하여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을 합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변한 후 제자들과 사귀고자 제자들을 찾아가나 제자들은 그를 경계하여 믿어주지 않습니다. 이때 바나바가 등장하여 사울의 신원을 보증합니다.(27절) “내가 이 사람을 보증하겠습니다. 이 사람은 참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이 사람은 장차 주님의 큰 일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내가 이 사람을 보장 할테니까 믿어 주십시오.” 그의 보증과 변호 덕분에 바울은 비로소 사도로서 첫걸음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때 그가 바울을 변호해 주지 않았다면 과연 오늘의 바울이 있었겠습니까? 바나바의 사울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비단 바울의 경우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 대해서도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날 인간성은 대단히 변해가고 있습니다. 인간은 목표를 성취하는 수단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 까지 서로를 헐뜯고 비난하고 조롱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얼마나 바나바가 그리운 시대입니까?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여러분들은 바나바와 같이 살지 않으시렵니까? 한 사람에 대한 가능성을 보고 그 가능성을 키워주는 사람, 비록 그의 과거가 우리를 실망시켰어도 그가 가진 한 가지 장점이 주님께 붙잡히는 그날, 그가 큰 인물이 될 것을 믿고서 바나바와 같이 외치지 않으시겠습니까? 비판하기보다, 버리기보다, 포기하기보다... 그 사람을 믿어주며 병들고 약하고 쓰러져있는 형제의 손을 붙잡고 함께 가자고 소리치는 바나바... 요나단 같은 이 사람이 부럽지 않습니까?

3. 마지막으로 바나바가 그리워지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신앙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1장에는 바나바의 또 다른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에 목회자로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바나바가 부임한 그날부터 안디옥 교회는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바야흐로 바나바의 인기는 최고였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일을 바나바가 혼자 하기 감당하기가 어렵게 되자 그는 바울을 초청하여 함께 동역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바나바가 옹졸한 목회자였다면 바울을 데리고 오는 것을 꺼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인기나 명예, 성취욕보다는 하나님의 일이 더욱 중요한 관심사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불렀고 그가 오자마자 교회는 더욱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나바의 판단은 신중했습니다. 바나바의 천거로 사울은 바울이 되었고 바울은 바울 되기 위한 일터의 현장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있었기에 비로소 안디옥 교회는 세계 선교의 센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사도행전 11장에서 바나바와 바울의 표기가 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1장 이전에는 바나바와 사울이라고 기록되었지만 이 일 이후에는 바울과 바나바로 바뀌고 있습니다. 세계 선교의 주체가 바나바에서 바울로 옮겨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바나바의 불평이나 원망은 전혀 볼 수 없습니다. 그는 침묵으로 기쁘게 서서히 사라지고 있습니다, 바울이 자기의 뒤를 이어서 해 나가는 사역을 계속 감당하는 이것이 전혀 섭섭하지 않았던 이 사람, 그는 철저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인기, 체면, 목표보다는 주님의 사역이 더욱 활발하기를 원 했던 바나바, 여러분들은 이 사람이 그립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수 있다면, 주의 교회가 좀 더 부흥될 수 있다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주를 섬기리라”고 살았던 사람 바나바, 자기의 체면이 세워지는 것, 그것은 그의 일차적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 받고 존경받는 것, 역시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로지 주의 일이 부흥되기 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승리하기를 원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원했던 사람,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했던 사람, 그리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성숙하기를 원했던 사람이 바로 바나바 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라면 자기는 조용히 사라져도 좋다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사람이 그립지 않으십니까? 어쩌면 오늘의 한국 교회가 더욱 필요로 하고 있는 인물이 있다면 바울보다는 아마도 바나바일지 모릅니다. 모두가 지도자만 되려하는 이 사회에서 바나바와 같이 섬기는 자가 얼마나 필요합니까? 어떠한 자리가 위대한 자리입니까? 국회에 가서 큰 소리 쳐야만 위대한 자리입니까? 장 자가 붙는 회전의자에 앉아야만 위대한 자리입니까? 청와대에 가야만 위대한 자리입니까? 진정으로 위대한 자리는 그 자리가 큰 것이 위대한 자리가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고, 세우신 그 자리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그 일을 감당할 때 비로소 그 자리가 위대한 자리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자기는 바울이 될 수 없음을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발견하여 그를 세우는 것이 자기의 사명임을 알았던 이 사람 바나바, 그래서 바울을 자기 자리에 세우고 자기는 무대 뒤로 조용히 사라지면서 “그는 흥 해야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요한의 고백이 가능했던 바나바, 여러분들은 이 바나바가 그리워지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 다 바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세계를 세 차례나 걸쳐 여행 하면서 복음을 증거 하는 바울이 될 수 없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는 바나바는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넘어져 있는 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며, “성도님 일어나야 합니다.” “집사님 수고 하셨습니다.” 하는 이 한 마디를 통해서 바울같은 일꾼을 세우는 바나바가 될 수있습니다. 그가 인정 받고 높임 받는 사실보다 다른 사람이 더 높임 받기를 원했던 바나바, 사실 기독교 역사는 이 많은 바나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바울이 필요 합니다. 그러나 더 많은 바나바도 필요합니다. 이 바나바가 되기를 원치 않습니까?

 

중앙노회장  정일량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