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교육개혁을 위한 역사적 고찰

1 해방 이후 현대교육과 사회적 영향

칼럼! 하나님이디자인하신교회 담임목사 김창룡(국제문화예술 선교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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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방과 교육

해방 정국에서 치열한 이념대립을 벌였던 좌·우익은 교육에서만큼은 인식을 같이했다. 우익 계열의 한국 민주당은 대중 중심 민주적 교육제도와 교육기회의 균등을 강조했고, 좌익 계열인 조선공산당은 일본 제국주의 교육 청산을 주장하고, 모든 민중에게 균등한 교육기회 제공과 국가에 의한 9년 이상의 의무교육 그리고 학원의 자치, 연구 및 학생의 정치적 활동의 자유를 주장하고 있었다. 이처럼 양진영은 의무교육을 강조했고, 교육기회의 평등 실현과 성인교육 중시 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해방 정국의 사회상은 위와 같은 교육계획안들을 실천하기에는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교육기관의 부족과 열악한 교육재원은 물론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먹고사는 생존의 문제가 더욱 심각한 때문에 교육은 생각만큼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미군정기 대한민국의 국가 원형을 구축한 시기이자, 오늘날과 같은 교육의 모습을 다진 중요한 시기이다. 미군정이 내걸었던 교육정책의 목표는 "민주적인 독립 국가에 필요한 적합한 교육제도의 수립을 향한 한국인들의 노력을 돕는 것"이었다. 군정 당국은 한국 사회의 민주화와 교육의 민주화를 군정 정책의 목표로 내세우고 있었지만, 그 방법은 약소국에 대한 비민주적 지배라는 수단을 통해서였다. '민주주의'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미국식 교육이 우리 교육의 원형으로 자리잡는 계기가 된 것이다. 우리 교육제도는 미국에서 교육받은 경험이 있던 사람들과 미국인 전문가 요청과 유학생 파견 등 미국의 원조로 이루어졌다.

 

미군정 하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6-3-3-4제 학제가 도입되었고, 문교행정기구가 정비되었으며, 교육 자치제도에 대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미국의 교육제도를 따라가는 이러한 모습은 우리 교육이 서구 중심 교육 체제로 편입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한편 미군정 하에서는 새로운 지배계층이 출현하였다. 일제가 유학생 제도를 활용하여 친일 지식인과 지배층을 양성하여 조선에서의 지배력을 강화하였던 것처럼, 미군정 당국 또한 유학생 제도를 한국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위한 전략으로 채택하였다. 이 시기에는 미국 유학생과 미국식 사고와 습성에 친숙한 사람들이 신속하게 새로운 지배 계층으로 성장할 수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교육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국 전쟁은 통일 정부의 가능성을 무산시켰으며, 남북이 교육적으로도 확연히 구분되는 길을 걷게 하였다. 한국 전쟁은 전 국토는 물론이고 심성을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또한 한국 전쟁은 교육에도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2. 국가주도 교육의 전개

해방 이후 한국의 교육은 국가의 '과대 성장'과 시민사회의 '과소 성장'으로 철저하게 국가의 지배와 통제 아래 있었다. 국가에 의한 교육 통제는 크게 경제적 이유와 정치적 이유로 진행되었다. 군부 쿠데타를 통하여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정통성을 결여하고 있었지만 '잘 살아보세'로 대표되는 '경제 근대화'를 지배 전략으로 채택하여 일제 식민지와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경제적 빈곤에 허덕이던 국민들로부터 상당한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교육이 정권의 지배 구도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또한 교육은 국가발전을 위한 전위로서 동원되었으며, 시대에 따라 그 성격을 달리하는 경제계의 요청에 반응하였다. 이러한 교육의 모습은 교육의 도구화를 강화하는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였다. 포퍼는 공리주의는 '닫힌 사회'로 귀착될 가능성이 많다고 예견하였는데, 교육이 사회공학에 근거한 공리주의에 따라 도구적으로 사용될 경우에, 여성, 특정 지역, 특정 분야, 장애인 등에 대한 '차별'교육을 정당화할 수 있는 위험성이 내재되어 있었다. 실제로 교육은 근대화 과정에서 농촌과 농업, 그리고 서울을 제외한 지역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는 불균등 발전 속에 도시와 농촌, 서울과 지방이라는 두 유형의 불균등 성장을 이루었다.

 

한국 전쟁이후 점점 교육기회도 확대되었다. 교육기회가 확대된 것은 낮은 수준의 노동력 양성을 위한 경제적 의도와 통치 이념 교육을 위한 정치 사회화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반적인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인한 교육비 부담 능력의 확대와 사회적 성공의 수단으로 교육을 인식하게 된 것이 주된 이유였다. 교육기회가 확대되었다는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만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기형적' 학력주의를 키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학교교육이 출세의 지름길로 인식되었으며, 학교와 전공에 따라 차별적인 교육효과를 가진다고 생각하였다. 그 결과 이제는 더욱 좋은 학교와 학과에 진학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로 대두되었고 일류와 이류 구분과 같은 학교의 위계적 서열화가 사회적으로 확산되었다. 교육기회와 학력주의는 이처럼 확대 재생산 된 것이다. 한편 교육 자격은 일종의 직업자격이 되었는데, 당시 고등 공무원 임용시험에서 학력 제한 규정을 둔 것에서 교육자격의 직업자격화가 강화되었다.

 

이러한 학력 제한 요건은 교육 자격을 직업자격의 필요조건으로 간주함으로써 적어도 공직에 나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교육기관에 참여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가지도록 하였다. 고학력을 추구하는 사회 풍토를 시정하기위해 1972년 공무원 임용에서 학력 제한 조건이 사라졌지만 상징적 의미 이상을 가지지 못하였다. 시험 수준이 일정한 학력 정도를 요구하는 것이었으며, 국민들 사이에도 상당한 정도의 학력 경쟁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지 시대부터 계속된 억압과 폐쇄적 사회는 교육을 그러한 사회의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동원하였고, 교육을 통하여 유순한 인간상이 강조되고, 길러졌으며, 그것이 가장 중요한 교육목적으로 간주되었다. '길들여진 심성'(domesticated minds)은 우리 교육의 목표 중의 하나였다. 민중들은 늘 교육적으로 어리석은 존재로 간주되어 계몽의 대상이었다. 5·16 군사 정부는 교육을 통한 '인간개조운동'을 선언하였는데, 20년이 넘는 기간동안 교육활동의 지침으로 활용된 국민교육헌장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제도교육의 대표주자인 학교는 저항의 공간이기도 하였다.1960년대 중반 이후 대학은 사회적으로 유일한 정권 도전 세력이었는데, 한일회담 반대 데모를 기점으로 학생 운동은 그 이슈가 학내 중심에서 반정부 운동으로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교육기회의 확대로 인하여 성장한 학생 집단과 교수를 중심으로 하는 지식인 집단은 정권의 부도덕성과 야만에 저항하는 세력들이었다. 이는 권위주의 국가가 예기치 못한 교육 성장의 효과 였다. 19604 ·19혁명, 1970년대의 유신체제 반대운동,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의 중심에는 언제나 대학생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교수요목기의 교육과정 (광복 후 - 1954)

일본 강점시대가 끝나고 해방이 된 대한민국에는 미군이 주둔하여 군정을 하게 되었다. 당시 대한민국의 교육을 담당한 군정청 학무국에서는 일제시대의 교육과정을 사용하지 말 것을 지시한 채로 새 교육과정과 교과서를 내놓지는 못하고 '교수요목 제정위원회'를 조직하여 교수요목을 제정하고 교과서를 만드는 일에 착수한다.

 

교수요목기에는 교과의 지도 내용을 상세히 표시하고, 기초 능력을 배양하는 데에 힘을 실었으며 분과주의를 채택하여 체계적인 지도와 지력(知力)의 배양에 중점을 두었다. 또한 홍익인간의 정신에 입각하여 애국 애족의 교육을 강조했으며, 일제시대의 잔재를 정신, 생활면에서 제거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당시의 교수요목은 이를 제정하는 데 시간적 여유가 없어 각 교과별로 가르칠 주제를 단순히 열거하는 데 불과하였고, 내용과 수준이 학생들의 지적능력에 비해 너무 높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또한 교과목별 수업시간을 보면 교수요목에 준하고 있으나 교육과정 운영은 학교장에게 융통성을 발휘하게 하였으므로, 운영의 실제에 있어서는 학교마다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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