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韓民國 未來를 위한 敎育의 改革을 위한 硏究 (13)

(韓國近代敎育의 始作과 發達의 歷史的 考察)(1884-1945)


상임이사 김창룡 목사(언부협 실무총재).jpg 칼럼리스트 김창룡 목사(하나님이디자인하신교회/본지 상임이사)

지난번 이어

총 위원은 28명인데 일본인25명 한국인3명은 친일파 이완용 외 2명이다. 애초부터 한국인들의 교육적 의미는 담아낼 의지가 없는 모임이며 저들의 식민화 정책을 위하여 만들어진 위원회이다. 1922.2월 신 교육령이 발표된다. 가장 중요한 사항을 열거한다.

 

) 유치원, 맹아학교, 기타보통학교와 비슷한 각종학교는 보통학교에 부설 할 수 있다. ) 조선어 및 한문을 나누어 조선어를 정 과목으로 하고 한문을 선택과목으로 하였다. ) 역사와 지리를 정 과목으로 한다. )수업료는 도지사의 허가를 얻어 1개월 이내로 받게 한다.

 

조선어를 가르치고 쓰는 것을 허락한 것은 참으로 다행인 것 같으나 그 뒤에는 조선인들과 선교사들의 환심을 사려는 의도가 있다. 역사는 조선의 찬란한 역사와 민족의 우수성을 알려주기보다, 잘못된 역사관을 심어주며 백성은 가난한데 탐관오리들의 착취와 당파 싸움으로 분열되고 힘없는 나라가 되어 강대국의 속국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그런 조선을 자기들이 거둬주고 있다는 식의 역사다.

 

그리고 지금 강대국이 된 일본의 우월성을 가르치는 역사다. “사이토”의 문화정책은 고도의 계산된 문하와 역사의 왜곡을 통한 조선국민의 정체성을 식민화 하는 것이다. 3.1운동의 영향으로 일본의 정책이 바뀌는데 어려서부터 일본의 노예로 살아가게 만드는 교육을 실시하고 출세하려거든 일본사람에게 개가 되는 법을 가르치는 것 이었다.

 

4) 일제의 탄압에 직면하는 사립초등학교와 학생들의 항일 운동

3.1운동이후 동맹 휴학이 잇달아 일어났다. 일본정부는 긴장한다. 3.1운동으로 고양된 학생운동에 대한 의식이 학생들에게 다시금 일제에 저항하는 에너지를 만들어냈다. 특히 주목할일은 중등학생으로 구성한 애국단 이었다. 단장에 휘문 고보4학년 박봉선(20),부단장겸 통신 출판부장 기독청년학교 이종상(19), 서무부장 이화여고보 임효정(18),교제부장삼일학교교사 차인재(22), 재무부장 이화여고보 최문순(17), 구제부장 경성 여고보이경선(18)이었다.

 

이들은 주로 상해 임시정부의 김보란과 영결하여 상해에서 발행하는 독립신문, 대한민보, 애국가, 경고문 등을 가져다 비밀리에 배포 하는일 이었다. 그들이 발각되어 붙들리므로 조직이 드러나게 되었다. 3.1운동은 어린 학생들에게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고 교사들은 그들에게 애국애족을 가르치고 지도했다.

 

1926 조선총독부에 새로운 총독 “야마나시”가부임한다. 당시는 세계적인 경제 공황으로 우리나라도 아주 힘든 상황에 접어든다. 극심한 경제적인 압박, 농촌의 피폐, 상급학교에 진학할 여건이 되지않아 학생들이 점점 줄어든다. 이 시대 전 세계적으로 사회주의가 급속히 파고든다 특히 지식인사회에 급속히 퍼져갔다. 공산주의가 급속히 발흥하자 일제는 이를 소멸한다. 공산주의자들의 연합전선은 전략적인 차원이고궁극적인 목적은 공산 혁명이다. 이들이 학원에 침투하여 학생들을 동맹 휴학을 일으키자 일제는 긴장하여 야마나시 총독은 조선인들의 생활이 궁핍하여 학생들의 사상이 자유주위 민족주의로 나가는 것을 염려하였다.

 

그래서 조선인들에게 생활을 개선해준다는 명목으로 실용주의를 강력하게 추진하고 학생들의 사상 단속에 힘을 모았다. 그러기위해 임시교육심의위원회를 열어 배포했다. 조선인의 안영을 기하고 다수민중의 자질을 높이며 산업을 개발하고 문화의 진전을 촉성하는데 있다며 아직도 면에 초등학교가 없는 곳 이 있다며 전국에 초등학교를 개설하여 초등교육을 든든히 해야 한다며 면마다 공립학교를 개설했다. 이 정책은 어려서부터 일본인을 만들고 사상교육을 시키겠다는 정책이다.

 

그러나 한국의 부모들과 학생들은 일본이 세운 학교에서 일본화 교육을 받는 것에 대한 적개심을 갖고 있었다. 어쩔 수없이 일제가 세운 학교에 다니지만 일본교사와 일본학생들의 태도에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다. 이것이 분출된 것이 광주학생운동이다. 전남 광주의 공립학교에서 한국학생이 일본학생에게 맞아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돌자 각하교가 동맹휴학을 하여 전국적으로 194개 학교가 참여하였다. 이주에 초등학교도54개교가 포함되어있다 .특히 이 사건은 공립학교학생들이 앞장섰다는 것이다. 일본인교사와 일본학생들이 있는 곳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우리학생들과 부모 국민들의 마음에 민족정신이 여실히 드러난 사건이다.

 

5)일제 말 초등교육의 정책

1931년 부임한 “우가끼”총독은 “교육은 곳 생활이다”.라는 표어를 앞세워 한국인들의 생활을 개선하고 이를 뒷받침 해주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가난한 한국농촌을 살린다는 취지는 다소 그럴듯한 표어지만 그들은 식민지 경영을 통한 자국의 경제난관을 풀어가려는 속셈이었다. 우가끼는 세계적으로 고립되어 가는 자국의 경제를 살리려고 한국의 식민경제를 부흥시키고 소비시장을 확장하려했다. 일본 기업들을 한국에 진출케 하였다 그러나 일본 기업인들은 한국노동력이 질이 낮고 의사소통이 잘 안된다고 진출이 어려움을 토로하자. 우가끼는 이를 위해 조선의보통교육수준의 노동력을 다수 확보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따라서 교육정책을 바꾸어 추진하는데 각 초등학교부터 일본어를 교육시키고 국민의 수준을 위한교육이아니라 일본가업의 노동력을 위한 교육정책이다. 또 중요한 것은 점점 고립되어가는 일본의 군사력동원에 한국인을 동원하려는 계획이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일본인을 만들어 의무교육, 의무병역을 치루 게 할 계획이 있었다. 직업교육의 갈화 각각의 특성에 맞는 기술교육을 시행 면마다 설립한 공립학교에서 농사 양잠 축산 수산 지역마다 특성화된 기술을 가르쳤다.

 

1936 11학교 가 개설되었으나 취학율 이 25%밖에 되지못했다. 1928년 영국이 인도에 세운 학교는 적령 입학률이27%, 1931년 필리핀 54% 국제적 추세에도 못 미치는 수준 이었다 총독부눈 1936 입학지원자 전원을 취학시키기로 하고 10년 동안 계획을 세워 취학적령60%를 목포로 하였다. 이런 목표로 해마다 7만명 정도를 예정하고 763,000명을 더 수용 하도록 했다. 이를 위해 면에 2개교를 하고 이미 하고 있는 학교는 증설하는 계획을 세운다. 문제는 학교와 학생이 늘어나니 교사가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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