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 영성구원 서정의 5단계3

살아있는 신앙, 영성이란 무엇인가?

JTNTV 주필 송택규 박사 지음

 

jtntv-01.JPG

역사적으로 영성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을 잃어버리고, 죽음이라는 파멸에 이르게 되었다. 그들은 에덴동산을 떠나야만 했고, 하나님의 영도 떠나가셔서 결국 하나님의 말씀대로 인간은 죽고 껍데기인 혼적 인간이 되고 말았다. 사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그들 속에 마귀의 속성을 넣어 주었고, 이후 그들의 후손인 인간은 마귀의 속성을 가지고 살게 되었다. 마귀의 악한 속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바라던 천국이 아니라, 지옥으로 떨어지도록 유도한다. 그래서 성경은 ʻ근신

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ʼ(벧전 5:8)라고 경고하고 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천국에 들어갈 없으므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땅에 보내 주시고, 죄를 대속케 함으로써 마귀의 속성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을 구원하셨다. 그리고 복음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 바로 구원의 종교, 기독교이다. 기독교는 인간들을 하나님의 영성으로 회복시켜 구원시키는, 에덴동산 회복의 종교이다. 사도행전 2 1-4절에서 나오는 마가 다락방에서 일어난 성령강림 사건은 잃어버린 영성을 회복시키러 오신 성령님의 공식적인 행사였다.

 

성령께서 오신 목적은 하나님의 품성을 잃어버렸던 인간들을 구원해서 타락하기 전처럼 다시 하나님과 함께 살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만 믿으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혜사 성령님을 만나 하나님의 품성을 갖게 , 하나님과 동행하며 승리하는 행복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함이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실존이 덧입혀진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입어 성령이 충만하여 천국생활을 누리며 살게 되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기독교인들은 고통스러운 삶을 피하여 변절하거나, 사막이나 동굴, 또는 사람들이 없는 오지로 숨어들어 가게 되었다. 후에 이것은 세상을 등지고 사는 수도원을 탄생케 계기가 되었다.

 

jtv-01.jpg

 

 

5세기경에 이르러 가톨릭 성직자와 수도사들에 의해 ʻ영성ʼ이란 단어가 처음 사용되었는데 이때 이미 영성의 의미가 변질되어 있었다. 영성이란 ʻ하나님의 성품ʼ으로,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 주시는 선물임에도 불구하고, 영적 선물을 사람이 노력하여 얻는 것으로 착각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고행을 마다하지 않는 수도생활을 하게 되었다.

 

가톨릭 수도원의 영성운동은 오늘날까지 꾸준히 ʻ관상ʼ ʻ기도의 ʼ ʻ고행ʼ 통하여 이어져왔다. 가톨릭에서 말하는 영성의 정의는 ʻ자아 초월적인 능력 있는 ʼ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자신을 학대하며 고행 속에서 경건(Piety), 헌신(Devotion), 거룩(Holiness) 영성에 도달하고자 노력했다.

 

15세기말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계몽주의 사상이 일어나 18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전성기를 이루기까지 기독교는 말씀 중심과 영성의 실존적 하나님이라는 핵심적 사상을 내어버리고, 학술적이고 합리적인 인본주의적 사고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계몽주의 문화혁명은 봉건주의 사상을 깨뜨리는 역할을 담당했으나 전통적 기독사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결과로 지정의를 가진 살아계신 인격적인 하나님은 점점 멀어져 가고, 지성주의 사상이 들어와 인본주의가 판을 치면서 영성이 배제되고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되었다.

 

이때부터 기독교는 살아 역사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판단 기준을 지성에 두고 이론적 하나님, 세상과 상관없이 세상 너머에 홀로 계시는 하나님으로만 믿게 되었다. 과정에서 중세에는 신비의 영역에 갇힌 영성운동이 일어났고, 17세기에 들어서 개신교에서는 지성과 교리 중심의 말씀운동에 치우쳐서, 영성 없는 기독교가 되고 말았다. 19세기에 들어서서는 자유주의 신학이 태동하게 되었고, 슐라이에르마흐에 이르면 신학이 보편적 종교성에 기초한 자연적이고 합리적인 영성을 추구하는 학문이 되었으며, 이후에는 심리학과 심령과학을 접목시켜 기독교를 변질시키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20세기 초에 나타난 오순절 운동은 초자연적 은사를 강조하여 비실제적인 신비적 영성을 추구하게 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교회들까지 세속화 되어 기복주의, 물질 지상주의, 성공주의를 하나님의 축복이요, 삶의 목적으로 생각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다. 오순절 교회들에게서 많이 있는 소위 메가쳐치(Mega-Church)라고 불리는 초대형교회는 새로 복음을 접한 사람들이 넘쳐나서 공룡처럼 커진 결코 아니다. 중소기업들을 멸망시키며 문어발식 확장을 거듭하고 있는 재벌기업처럼, 몇몇 초대형교회들은 주위의 소형교회들을 외면하고 오히려, 그곳에 다니던 교인들의 수평 이동을 유도, 불리기밖에는 관심이 없다.

 

교인들은 시설과 인적 자원이 열악한 작은 교회보다는 온갖 현대적인 시설과 교육적 자원이 풍성한 초대형교회를 찾아가게 됨으로, 작은 교회들은 결코 생존 자체가 어려운 구조가 되어버렸다. 몇몇 대형교회들만 살아남는, ʻ부익부 빈익빈ʼ식의 이런 비즈니스적인 마인드가 교회에 들어와 있는데, 이는 기독교의 건전한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 하나로, 크고 작은 수많은 문제들을 끝없이 양산해 내고 있다.

 

ʻ영성이 없는ʼ 말씀만을 강조해 오던 기독교가 점점 무기력증에 빠져 이제는 종이 호랑이요, 무기력한 허상에 불과해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롱까지 받게 되었다. 목회자들도 실존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므로 영권이 없어졌다. 그러니 교회의 권위가 있을 없다. 말씀은 풍성하여 머리는 커졌는데 신경이 끊어졌으니 식물인간처럼 되어 교회들은 공룡처럼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기독교는 살아남기 위하여 발버둥을 치면서 수많은 성경공부와 갖가지 명목의 프로그램으로 조직화를 시도하였으나, 한계에 이르게 되고 급기야는 종교 다원주의운동으로 번져가게 되었다.

 

그래서 타종교와 연합하여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영성이라도 받아들이기를 주저하지 않아 명상, 긍정적 사고, 요가, 최면술, 선불교의 영성 영적 간음이 판을 치는 시대가 것이다.

 

 성막영성 송택규 목사 저.JPG

 

 

영성운동의 필요성

우리와 함께 사시려고 말씀( 1:1) 함께 찾아오신 실존하시는 하나님을 교회들과 성도들이 실질적으로 영접하지 못하고 말씀만 외치다 보니,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권능이 떠나 세상으로부터 조롱거리가 되었고 성도들은 능력을 잃고 힘없는 자들이 되었다. 영성운동은 실존으로 오신 성령 하나님을 다시 모심으로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마음인 ʻ영성ʼ 회복하고(돌아온 탕자, 15:11-27), 우리의 속에서 하나님의 간섭을 받으며 함께 사는 실제적인 신앙생활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믿음 안에서 성령으로 오신 주님의 모습을 영안으로 바라보며( 11:1, 27, 5:37-38, 12:8) 주님의 실체를 체휼하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과 대화하며 동행하는 말씀의 인격자로 세워지는 것을 말한다( 2:25-26, 1:1).

 

성령님과 동행( 41:10) 여러 가지 은사와 영적인 파워(Power) 나가게 된다. 교회와 하나님의 자녀들은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마음(19:10) 영성을 회복하게 되고,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의 역사( 16:17-18) 따르게 되어 사도행전적 삶을 살게 된다. 그러므로 영성운동은 마지막 때에 주님이 오셔서 추수하실 있도록 알곡을 만드는 운동이고, 구원( 3:1-10) 이르게 하는 운동이다.

 

또한 말씀과 함께 살아 역사하시는 실존의 하나님을 만나 온전한 믿음에 이르게 하는 2 종교개혁운동( 9:10)으로, 타락한 세대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마지막 시대의 요청이라고 있다.

 

영성운동의 근거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한 이후 당신의 자녀들을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세우셨다. 그리고 계획대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열국을 주시기 위한 작업으로 후손 야곱의 열두 아들을 애굽으로 인도하셨다. 그리고 약속대로 430 만에 야곱의 열두 아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형성케 하여 민족을 이루게 하신 다음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하는 백성들을 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나, 쾌적하고 비옥한 환경으로 인도하신 것이 아니라, 아무도 살아갈 없는 황량한 광야 사막으로 인도하셨다.

 

이는 광야를 통한 영성훈련이 그의 백성들에게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인간들로 하여금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영성(하나님의 성품) 되찾게 하고,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성막(하늘 성소의 그림자) 짓게 하시고, 성막을 중심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하며 살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성막 구조물의 단계를 통하여 타락한 인간이 구원에 이르는 과정을 예표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이후 교회의 그림자가 되게 하셨다.

 

이는 타락하여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말로 표현할 없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은총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가시적으로 보여주셨던 성막의 단계의 영적인 의미는 없어졌고 그저 형식주의와 이론으로 포장된 예배의식과 성경공부와 심리학적인 교육 프로그램 내지 교회성장만을 추구하는 기형적인 방향으로 치달아 왔다.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영성운동의 근거는 그동안 간과되었던 성막을 통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재발견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제시하신 방법대로 교육하고 훈련함으로써 하나님이 원하셨던 (영성 회복을 통한 하나님과의 동행) 이루어 드리고자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