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강력한 통일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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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년전 6.25! 새벽잠에서 깨어나기전에 북한 공산군의 남침은 순식간에 서울을 점령했다. 우리군은 손쓸 여유도 없이 후퇴했다. 경무대는 즉시 충남도청 건물로 옮기면서 당시의 이승만 대통령은 각군에 지시하여 철저한 전투에 임하도록 명령했다.

 

국방에 약한 우리군은 계속 밀려 최종 낙동강 전투까지 사수한 것이다. 국민 모두는 피난길에 올라 많은 고생을 했다. 피난길에 양식이 없어 배고픔으로 아이들은 아무것이나 먹고 배탈이 나서 울면 포격에 끊어진 전선을 주어다가 전기선속에 있는 구리를 쇠줄로 갈아 구리가루를 먹이는 비참한 상황이었다.

 

인민군들은 시골 마을 모두를 점령하고 저녁마다 인민군 노래를 가르치며 동네의 머슴 일꾼들을 모아 붉은 완장을 채워주고 대창을 깍아 보초를 세워 우리의 우익인사 공직자들을 체포하도록 하여 당시의 모든 지식인들은 피난길에 올라 자취를 감추고 살았다.

 

마을 농민들은 그들의 지시에 따라 도로자갈을 만들어 도로변에 모아 놓고 신작로 자갈도로관리에 매일 노역토록했다. 강변교량에는 인민군들이 좌우 2명씩 따발총을 가지고 철저한 검문검색을 하였다.

 

당시의 검문은 도민증 주민증을 검문 하지 않고 손과 발을 검문하였다. 손과 발이 농군의 손발이면 통과시키고 손발이 일한 흔적이 없으면 즉각 체포해 형무소에 가두었다.

 

인민군들은 7 중순에서 8 한달 사이에 우리의 우익인사들을 형무소에 이송하여 무참한 대학살을 자행했다. 국내 지역적으로 가장 악랄한 학살 현장은 대전 형무소이다.

 

형무소내에 3개의 대형우물이 있었는데 1개의 우물에 100여명씩 수장시켰다. 팬티만 입게 하고 양손을 뒷결박하여 일렬로 줄을 세워 한명씩 앞으로 나오게 하여 각목으로 머리 후두부를 때려 실신케 우물속에 거꾸로 쳐넣어 우물 아궁이까지 시체가 차면 두꺼운 판자로 덮고 대형돌을 올려 놓아 사람을 짱아치 수장시킨 것이다.

 

3개의 우물에 300여명을 수장시킨후 나머지 1000여명은 형무소 마당에 1미터 길이의 줄호를 파게 하고 포승으로 뒷결박하여 일렬로 줄줄이 서게 따발총으로 전원 사살시킨 것이다.

 

6.25전쟁은 우리 민족 모두의 슬픔이었다. 오늘의 젊은 세대들은 북한 공산주의 참상을 절대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아아! 잊으라 어찌 울이 이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날을, 맨주먹 붉은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 했던 날을!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물리쳐, 이제야 빛내리, 이나라 이겨레!

 

오늘 우리는 6.25 노래를 잊어버리고 있다. 젊은 청소년 학생들에게 가르쳐 부르게 해야 한다. 사상은 죽음보다 강한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국가정책적으로 계속적이고 반복적인 자유민주주의사상교육을 시켜야 한다.

 

국내에 산재해 있는 종북좌파가 있다는 자체가 정책부재현상이라 생각한다. 지난날의 아픔과 죽음과 고통을 생각한다면 다시는 이땅에 공산주의가 있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통일정책은 북한과의 대화로는 이루어 없는 것이다. 그간 많은 물자지원과 역대 대통령들의 북한 방문은 아무런 의미 없는 것이 되었으며 오히려 그들에게 미사일을 만들도록 재원을 지원해 격이 되었다.

 

통일 조성을 위한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고 오히려 북한에 머리 숙이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대통령의 통일대박론을 심도있게 연구하여 강력한 국방력을 완전히 가추어 대화보다는 힘으로 제압시켜야 것이다.

 

전쟁의 주기는 50년이라 했는데 6.25전쟁 65주년을 맞는 해에 미국에 의존 하지 않는 우리의 힘으로 북한의 요새지를 미사일로 장치화 하여 유사시에는 북한을 순간적으로 완전 초토화 시킨다는 강력한 통일정책이 있어야 것이다.

퓨리탄장로교회 목사(본보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