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가 성적 탈선하는 원인
                     '성'과 '영성'을 분리하여 이해하는 것이 문제

 1980년대 미국에서는 지미 스워거트(Jimmy Swaggert),짐 베커(Jim Bakker),고든 맥도널드(Gordon McDonald) 등 우리에게 친숙했던 텔레반젤리스트의 불륜이 잇따라 언론에 공개됐다. 유명 목회자들의 성적 탈선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알려졌다. 1990년대 이후로는 북미와 유럽의 천주교 신부들의 성적 탈선이 언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2002년 초에는 미국 가톨릭교회 사제들의 성적 추문 주장이 제기됐고, 250명이 사제직에서 축출됐다. 이중 일부는 수감되었으며 자살을 한 때도 있었다.

 한국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1990년대 이후 급격한 교회 성장기가 지나면서 목회자의 성적 탈선 문제는 교회 내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일반 사회에서 성적 문제를 자유롭게 다루는 것과는 달리, 교회 내에서는 이 문제를 금기시해 온 측면이 있다. 특히 목회자의 성적 탈선 문제는 지역 교회의 근간을 뒤흔들 수 있는 민감한 사항이기도 하고 교회에 덕이 안 된다는 이유 때문에 공개적으로 다루어지기보다는 장로를 중심으로 한 교회 내의 몇몇 주요 인사에 의해서만 비밀리에 다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문제는 최근으로 올수록 목회자의 성적 탈선이 더 심각한 양상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교회가 급성장하던 시기에는 목회자가 사역에 전념했기 때문에 소위 곁눈질할 여유가 없었지만, 교회가 성장한 후 안정기에 들어서면서 어느 정도 긴장이 풀어지자 성적 탈선의 유혹에 더 쉽게 빠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다윗이 사울 왕의 추격을 받아 목숨의 위협을 받을 때에는 믿음의 선택으로 일관했지만,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안락한 시절을 보낼 때 자신의 충성스런 신하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취했던 사실은 오늘날 교회의 성장과 안정을 이룬 목회자들이 유의해야 할 부분으로 여겨진다.

 
 목회자의 성적 탈선은 근본적으로 목회자의 성에 대한 이해와 상당한 관련이 있다. 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선행될 때, 목회자는 성적 탈선으로 쉽게 빠지지 않고 성적 에너지를 생활 가운데서 건강하게 창조적인 힘으로 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기독교 역사에서 성은 주로 부정적으로 기술되어 왔다. 에덴동산의 이야기는 성적인 죄에 대한 언급으로 해석되었고, 레위기의 율법은 게이와 레즈비언을 비난하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해석도 있다. 신약에서도 성은 위험하고 혼란스럽고 반(反) 영적인 힘으로 기술되었으며, 초대 기독교인들은 희랍 전통의 반(反) 성적인 요소들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성서 시대 이후에도 기독교는 성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견지했다. 어거스틴은 성적 쾌락을 영적 생활의 적으로 여기는 경향으로 심화시켰는데, 그는 <신의 도성>에서 모든 성관계에 따르는 수치심에 대해 기록하고 있으며, 결혼 생활에서조차도 아이를 갖기 위한 목적이 아닌 성적 접촉을 죄로 보았다. 어거스틴의 성에 대한 부정적 이해는 회심 이전에 성적으로 방탕했던 자신의 삶에 대한 반작용의 영향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성과 영성의 분리
그러나 영성 신학자 리차드 포스터는 기독교 역사상 참으로 비극적인 현상 가운데 하나는 성과 영성이 분리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성과 영성이 서로 무관하거나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은 인간의 성을 축복으로 보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창세기 2장 25절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는 구절을 통해서, 두 사람의 성이 완전히 통합된 아름다운 상태를 타락이 에로스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타락이 에로스를 왜곡시켰음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또한 레벅(Karen Lebacqz)과 바톤(Ronald G. Barton)은 성이 창조적 에너지이자 인간됨의 일부라고 보았고, 만일 영성이 전인격이 되는 것과 관계가 있다면 성은 영성의 통합적 부분이며 그래서 영성과 성은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헤롤드 엘렌스(J. Harold Ellens)는 내적 생명의 힘이 '몸'을 통해 타인을 향해 뻗어 나가는 것을 '성'이라 하고, 같은 내적 생명의 힘이 '영혼'을 통해 초월적 실재를 향해 뻗어 나가는 것을 '영성'이라고 정의 내리면서, 영성과 성의 상호 관련성을 지적하고 있다.

그럼에도 현대 사회에서 영성과 성의 분리는 계속되고 있다. 성은 동의하는 성인 사이에 교환되는 하나의 상품으로 여겨짐으로써, 영성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채 이해된다. 한국교회 역시 영성과 성이 서로 분리되며 심지어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영성의 추구와 성의 추구는 서로 대조된다는 도식이 한국교회 내에서도 지배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영성과 성의 분리 경향은 현대 사회에서 더 파괴적인 양태로 드러나고 있다. 엘렌스는 "성관계하기"(having sex)와 "사랑 만들기"(making love)의 차이를 지적하면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교제와 연합은 성관계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의미가 있음을 언급한다. 그것은 우리 인격의 관능적, 정서적, 사회적, 심리적, 영적 차원에서 두 사람이 서로를 매우 소중히 여기는 '연결'이다. 엘렌스는 특별히 사랑 만들기를 삶의 한 방식으로 이해하며, 사랑의 말과 행동 모두를 포함하는 하루의 삶 전체를 전희의 삶으로 본다. 이러한 전희의 삶이 부재할 때, 성적 사랑은 단순히 성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쉬이 축소되고 타락한다고 말한다. 또한 리차드 포스터는 이러한 성의 타락이 죄로 말미암았다고 지적하면서, 왜곡된 성은 외설(pornography), 음욕(lust), 가학성 변태성욕(sadism), 피학대음란증(masochism), 남녀차별(sexism) 등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음을 지적한다.

오늘날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단순히 성을 영성과 반대되는 극단에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편협한 이해라 아니할 수 없다. 목회자가 성적 타락을 경고하는 것을 넘어서 성 자체를 부정적인 것으로 언급 하는 것은, 벼룩 몇 마리 잡기 위해 초가삼간을 태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처럼 영성과 반대되는 개념의 성 이해는 성서적 교훈을 왜곡시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더 심각한 성적 타락을 일으키는 원인으로도 작용할 수 있다.

영성을 추구하는 자로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특별한 때에 성에 대한 금욕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성은 때로 영성적 추구를 방해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에 대한 극단적인 금욕주의적 태도 자체가 마치 자동으로 영성에 이르는 길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도를 넘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을 성적 특성이 있는 존재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 의도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목회자의 성적 탈선은 근본적으로 성을 영성과 분리된 것으로 여기는 이해에서 비롯되었다고 진단할 수 있다. 성에 대한 이런 왜곡된 이해 위에서 목회자가 영성을 추구하면 할수록, 그는 쉽게 성적인 소외와 일탈로 빠질 수 있다. 오늘날 깊은 영성을 추구한다고 알려진 목회자 중에서 성적 탈선에 빠지는 경우들이 이를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성과 영성에 대한 통합적인 이해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우리 주님의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의 표현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성적 에너지를 일상생활 가운데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성도와 이웃을 위한 사랑으로 표현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 우리의 성적 에너지는 더 이상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창조의 사역, 즉 거룩한 영성의 표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김승호 / 교수·영남신대 기독교윤리학

이 글은 <신학과 목회> 2010, 제 33집에 실린 저자의 논문 일부를 요약 정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