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잃어버린 국시(國是)

“젊은이들에게 닫혀 진 땅굴을 다시 견학시키자.
확고한 국가관과 민주주의 우월성을 갖도록 하자.
자유는 국력과 국방이 튼튼해야 한다.”

서영웅 목사.jpg 스마트폰은 젊은이들의 전용물인가? 폰 속에 날짜, 시간, 인터넷, 영상, 사진 등 모든 것을 볼 수 있기에 시간가는 줄 모르게 어느 장소를 물론하고 그들은 폰을 두드리고 있다.

  기성세대들은 스마트폰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하며 작동할 줄도 잘 모른다. 시대는 급속히 변화하고 있다. 변화 속에 새로운 발전이 있는 것이다. 기성세대들이 14세기의 고전을 읽고, 소나타곡을 들으며, 르네상스의 작품을 감사하는 것은 오늘의 젊은 세대와는 동떨어져 있는 것인가?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21세기 장을 여는 것이라 생각된다.

 길을 걷는 중 개미떼와 지렁이와의 싸움을 지켜보게 되었다. 수많은 작은 개미들이 산책 나온 지렁이를 발견하고 일시에 공격하는 모습니다. 지렁이는 있는 힘을 다해 몸을 움직여 개미들에게 부상을 입힌다. 부상을 당한 개미는 물러나고 개미들은 다시 일제히 몸을 올라타는 등 생명을 걸고 지렁이를 공격하여, 힘이 빠진 지렁이는 수많은 개미들에게 물리어 개미굴로 끌려 들어가는 장면이었다.

 삶은 투쟁이며 경쟁이다. 힘이 있다하여 자만하고 태만하면 순간적인 공격으로 삶을 마감할 수 있는 것이다. 큰 기업은 작은 기업을 돌보고 작은 기업은 큰 기업을 위해 일한다면 양자 모두 사는 길이다. 우리의 옛 구호에 “뭉치면 살고 헤치면 죽는다.”라는 구호가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있었던 것 같다.

 작은 개미에게 힘을 자랑하고 꿈틀거렸던 지렁이가 종래에는 개미의 먹이 사슬이 되어 개미굴로 끌려들어 갔다. 힘이 있다하여 자만한다면 원치 않은 일들이 자행될 수 있는 것이다. 나도, 국가도 힘을 자랑하고 있다면 자성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약30년 전에 청소년 학생들에게 정신교육의 일환으로 전방 땅굴견학을 시킨 적이 있었다. 중ㆍ고증학교의 보이스카우트, 걸스카우트 학생들에게 북한이 파 들어온 제2땅굴, 제3땅굴을 견학시켰다. 당시의 학생들은 지금 40대 중반의 중년이 되어 국가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견학을 마치고 돌아오는 학생들은 버스 안에서 우리나라의 국시인 반공을 외치면서,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6ㆍ25노래를 소리 높여 불렀다. 우리의 국시는 반공이었다.

 가정에는 가훈이 있다. 학교에는 교훈이 있고, 회사에는 사훈이 있는데, 오늘 국가는 국시를 외치지 못함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가 그렇게 외치던 국시가 왜 사라졌는지, 더듬어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속담에 꿀 먹은 벙어리라 했던가! 개인주의는 파멸과 파산을 불러오는 것이다. 확고한 국가관과 새로운 국민정신이 없어진다면, 국력도 자유도 쇠퇴해져, 흑암의 먹이사슬로 끌려들어 갈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옛부터 설명절과 추석명절을 지키고 있다. 있는 자나 없는 자나 모두가 들뜬 마음으로 명절을 준비하며 고향을 찾아 가고 있다. 금년 추석명절은 휴일이 가장 길다고 한다.

 추석명절에 필요한 서너 가지 물건을 사러 중앙시장에 갔었다. 시장 가운데 서서 아내가 사오는 물건을 들고 물결치듯 밀려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이리저리 길을 비켜 주면서 바라보았다. 물건을 파는 사람들의 외침과 사는 사람들의 물건 고르기, 움직이는 자전거와 리어커 위에 쌓아 놓은 과일 등, 시장의 풍성함을 바라보면서 삶은 진정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풍성함이 언제나 계속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자유는 삶의 약동이며 희망이다. 이러한 자유를 유지하는 것은 국민 단합이며 힘인 것이다. 오늘의 젊은이들은 지혜와 명철이 있으며 희망이 있다. 젊은이들에게 국가의 위상과 자부심을 갖도록 해야 한다. 민족의 절기인 중추절처럼 생동감 있는 삶의 아름다움을 오래도록 지니도록 했으면 좋겠다.

 

퓨리탄장로교회 목사
서영웅(본지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