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모두가‘일리一理’뿐인 세상, 다시 6월에

 
 신록이 무성한 푸르른 6월이다.

 우리에게 6월은 가슴 벅찬 희망의 감상보다는 아픈 역사의 기억을 되새기게 하는 계절이다. 인류역사상 민족적인 경사를 기념하는 민족은 많으나 민족의 수치와 아픔을 기념하는 민족은 이스라엘뿐이다. 
 
 이스라엘에게 유월절은 지난날‘
우리의 조상들이 이집트 파라오의 노예였을 때, 그들의 울부짖음과 고통을 굽어보시고 불쌍히 여겨 모세를 통해 구출해 주셨다’는 아픈 고백이 숨어있다. 그래서 그들은 그날을 기념하여 즐기는 것이 아니라, 딱딱하게 굳은 빵과 쓴 나물을 먹으며 절치부심 결단을 다짐하는 것이다. 그런 아프고 수치스런 역사를 다시는 반복해선 안 된다는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다.
 
 우리민족은 어떤가? 해방된 8,15 광복절은 축하하고 즐기면서, 100년 전 이 나라가 일본에게 강제로 합병당한 8,29 국치일과 동족상잔의 피바다를 이루고 천만 이산가족을 쏟아낸 6,25는 얼마나 뼈아프게 되새기며 기념 하고 있는가? 아픔과 수치를 쉽게 망각하는 개인이나 민족은 미래가 없다. 똑같은 비극의 역사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천안 함 사건에다 6월 초 지방선거를 치루며 혼란스런 한두 달을 보내고 있다. 정치 지도자들이나, 국방을 책임지고 있는 군의 총수들이나, 지방선거에 출마한 수많은 이 민족을 책임질 리-더 들, 그리고 언론들이 쏟아내는 쓰레기 같은 말, 말, 말들을 들으며 국민들은 과연 무엇을 믿고,
길표road mark를 삼아 따라갈 것인가?

 사람의 말과 논리는 사물과 세계를 바라보는 눈으로부터 나온다. 육안으로, 있는 사실faction을 그대로 바라보는 눈을 라 하고, 마음과 생각의 눈으로 사물을 볼 때 , 의견, 견해라 하고, 철학과 신념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볼 때 , 세계관, 인생관이라는 논리가 나온다. 2천 년 전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12제자들이 마리아의 옥합 사건을 경험한다. 오라비 나사로를 살리신 생명의 은인, 예수님의 방문에 너무 감격한 나머지, 마리아는 어머니가 딸 둘의 결혼 자금으로 남겨놓은, 향유< 현 시가, 3천만 원 상당>병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칼로 씻어드린다. 하나의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서로 다르다.
 
 
가롯 유다는, 3,000만원 상당의 값비싼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편이 낫지, 쓸데없이 더러운 발 씻는 데 허비한 바보 같은 여자로 바라보고, 나머지 11명도 유다의 논리에 암묵적 동의를 보내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위를 보고 참으로 좋은 일beautiful things to me, 영원히 기념될 만한 ‘위대한 낭비’를 했다고 칭찬 한다. 왜 이렇게 한 사건을 놓고, 보는 시각이 다를까? 유다의 논리는 일리一理가 있다. 일리一理는, 수많은 이치理致 가운데 하나가 맞을 때, 일리一理 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11명의 제자가 이
일리一理에 동의 할 때, 합리合理가 된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다수가결의 원칙을 합리주의라 말한다. 그런데 이 사건에 예수님만 여기에 반대논리를 펴신다. ‘마리아를 괴롭게 하지 말라. 영원히 기념될 만한위대한 낭비를 했다.‘ 그래서 예수님의 논리는 진리眞理인 것이다. 진리는 다수多數 합리合理에 좌우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쓰레기처럼 쏟아내는
일리一理뿐, 진정한 합리合理진리眞理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신록이 무성한 푸르른 6월인데, 혼란스럽고 목이 마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