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의 미래를 중매쟁이에 맡길 순 없다. 한반도 문제 는 한민족 주도로 해결을”

 중동에 전운이 감돌던 1978년 9월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가 워싱턴 근교의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데이비드 산장에서 만났다. 4차례의 전쟁으로 구원(舊怨)이 쌓일 대로 쌓인 두 나라 지도자를 당시 지미 카터 미 대통령이 초청한 회동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한 치의 양보 없이 결렬만을 앞둔 것 같던 비밀협상은 11일간의 시한을 하루 남긴 마지막 날 밤, 어르고 위협하다시피 한 카터의 중재로 극적 타결됐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립이라는 역사적 중동평화협정은 그렇게 탄생했다.

한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 남북한이다. 이런 한반도에 올 들어 변화의 격랑이 일고 있다. 체제 불안과 경제난으로 궁지에 몰린 북한이 전방위적인 평화공세에 나섰기 때문이다. 엊그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왕자루이 중국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을 만나 6자회담 재개문제를 논의했다.

지난해 김대중 전 대통령 조문단부터 시작된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대해서도 북한은 적극적이다. 서해 도발 과 보복성전 협박 등 체제안보 측면에서는 강경책을 쓰며 ‘투 트랙 전략’을 고수하지만 금강산관광 당국자 간 회담도 1년여 만에 재개됐다.

이 시점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반 총장의 친서를 휴대한 린 파스코 대북특사 일행이 어제 방북, 유엔과 북한 간 고위급 대화가 5년 만에 복원됐다.

유엔과 반기문 총장의 역할도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사무총장의 주요 권한은 국제 평화와 안전 유지를 위한 조정과 중재다. 분쟁 지역에 특사를 파견하거나 중재자로 나서 이해 당사자들의 합의를 이끌어내기도 한다. 역대 사무총장은 강대국의 이익과 직접 연관이 없고, 국제사회에서 발언권이 약한 나라 출신이 대다수였지만 반 총장은 그들과 다르다. 미국과 중국 등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맞물린 분쟁 국가이면서 OECD 가입국 출신이다.

반 총장은 북한 입장에서도 상대하기가 편하다. 그는 노무현 정부에서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내 북한과의 코드 맞추기가 쉬울 수 있다. 온화한 성품에 김정일과 연배도 비슷하다. 그동안 북한과 여러 강대국들의 관계 조율에도 뛰어난 외교 솜씨를 보여 왔다. 올 들어서 아이티 강진 참사에 안보리가 3500명을 신속히 추가파병토록 한 것도 반 총장의 공이다.

미국 외교정책 웹사이트 ‘포린 폴리시 인 포커스’는 작년 10월 반 총장에 대해 ‘굿 문 라이징(Good moon rising·떠오르는 환한 달)’이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지난달 유엔 총회에서 반 총장은 끈기있게 전 세계 지도자들로부터 주요 어젠다에 대한 약속을 받아내는 외교적 성과를 이뤄냈다”고 높이 평가했다.

반 총장은 ‘세계의 대통령’에 걸맞은 반열에 올라섰다. 지난날 카터 대통령이 받았던 ‘중재자’ 호칭에 비견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결혼 당사자가 스스로 중매할 수 없듯이 60년을 갈라선 남북이 중재자 없이 평화공존과 통일이라는 결혼에 골인하는 것은 어렵다. 게다가 중매쟁이 격인 미국과 중국은 이해관계가 너무 다르다.

이런 이해타산에서 반 총장은 자유롭다. 유엔사무총장은 사심 없이 한반도 상황을 중재하기에 더 없이 좋은 위치이며 지금의 국제 분위기도 무르익을 대로 익었다. 한국전쟁은 유엔이 국지전에 군사적 지원을 한 첫 케이스인 만큼 평화통일에도 유엔이 앞장설 만하다.

G20, 세계 10위권 경제국가의 미래를 중매쟁이들의 계산에 전적으로 맡길 수는 없다. 한반도 문제는 한국인 주도로 해결돼야 한다. 쾰러 독일 대통령은 그제 “통일이 빨리 올 수 있으므로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반 총장이 방북해 김정일을 만나고, 남북정상회담이 성공할 때 남북이 진정한 평화와 통일로 가는 해법이 나올 수가 있다. 이런 중차대한 시기에 유엔 사무총장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한반도에 천운일지 모른다. 남북한 모두 민족의 미래를 위해 ‘굿 문 라이징’을 중재자로 활용하자.

 

이형용 수석(사진) 논설위원 hy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