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은 참으로 좋은 곳이다. 누구나 인정하고 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지금 당장 가라고 하면 어떨까? “감사합니다”고 말하며 즉시 갈까? 당장은 아니고 나중에? 그러나 알고 보면 빨리 아니 즉시 가야할 곳이 천국이다.

바리새인들이 묻는다. “하나님 나라가 어느 때 임하나이까?” 시기를 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때가 아니었다. 장소도 아니었다.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지 않는다. 여기 저기 또는 언제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사람들은 천국이 어디엔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뉴스위크가 지구상의 천국 같은 곳 10곳을 소개했다. 기후 좋고 경치 좋은 곳이다. 대개가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의 섬들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곳도 내가 괴로우면 천국이 되지 못한다. 여기 천국 같은 곳에 사는 사람들이 행복할까? 지하 단칸방에 사는 사람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행복하고, 결심하고 노력하면 얼마든지 더 나은 곳으로 갈 수 있다.

천국은 내 안에 있다

칼 융이 말했다. “사람은 자기 마음속에 갇혀있다.” 우리가 보고 경험하는 세상이 실제로는 우리 생각일 뿐이다. 물론 돈이 많고 적고 통증이 있고 없고 기분 나쁜 소리 괴롭히는 사람이 있고 없고 하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결과는 내가 만들어낸다. 그리고 내 마음 상태에 따라 현재의 삶도 천차만별로 경험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그러면 지옥은 어디 있을까? 미국의 심리학자요 철학자인 윌리엄 제임스의 말이다. “신학적인 지옥도 이 세상에서 습관적으로 마음을 잘못 써서 만드는 지옥보다 더 괴로운 곳은 아니다.” 진짜 지옥이 있지만 스스로 만들어 들어가 있는 지옥이 더 무섭다는 말이다.

천국과 지옥이라 불리는 이 두 나라가 모두 내 속에 있다면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행복하고 신나는 천국을 선택하려는가? 아니면 불행과 아픔의 지옥을 선택하려는가? “누가 지옥을 선택하겠어요? 내가 실패를 선택했나요? 공포와 병과 신경쇠약을 선택했어요?” 그러나 인정하건 안 하건 원인 제공한 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겪는 고통스러운 일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 원인을 선택해서 무의식 속에 들어가게 했기 때문이다. 이 캄캄한 영역에 거절당한 기억들, 수치스러운 경험들이 가득 저장되어 있다. 그것이 쓴 뿌리가 되어서 모든 쓴 열매들이 나오게 한다. 무서운 폭군으로 행세하며 삶 전체에서 그 열매를 맛보게 한다.

회개의 헬라어 의미는 “뉘우치고 다른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마음속 나라로 과감히 들어가서 잘못된 것을 고친다면 바람직한 나라를 세울 수 있다. 누구도 쓸모없는 인간, 병자, 슬픈 사람 되는 걸 원치 않는다. 하지만 마음의 세계 지배하는 방을 몰라서 늘상 지옥을 선택한다.

사람들이 왜 변하지 못하나? 교회 나오면서도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자신에 대해 살펴보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보물이 있을 수 있는데도 속을 파헤쳐 들여다보기를 무서워한다. 멋진 모습만 보려하고 어두운 구석은 무시한다. 자기기만이다.

내 속의 모습이 아무리 역겨워도 볼 것은 보아야 한다. 사람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모두 기억한다. 실수하고 못난 짓 한 것을 감추려고 한다. 왜 그럴까? 남들로부터 비난 받을까 두려워한다. 스스로 자존심이 상하는 것도 싫다. 그래서 불미스러운 것은 감춘다. 그러나 이것들이 병이 되고 실패가 된다.

무서운 비평, 미움, 공포! 이런 것들로부터 나온 죄의식이 병을 주고 신경쇠약을 준다. 실패를 준다. 모든 원치 않는 감정이 외부에서 오는 게 아니다. 감정은 내가 만든다. 내 속에서 나온다. 자신에 대해서 정직하라. 내 속에 있는 게 무엇인지 똑바로 보라. 삶의 변화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의식의 세계이다.

네 가지 귀신을 몰아내라

심리학에서는 무의식 속에 네 가지 문제가 있다고 인정한다. 두려움, 죄의식, 열등감, 미움이다. 누구나 사람에겐 이 네 귀신이 있다. 미움이나 앙심 그리고 두려움 등이 병을 만든다. 기도하며 마음을 들여다보라. 왜 그러한 귀신들에게 시달림을 받아야 하는가.

한 남자가 궤양으로 고생한다. 어린 시절 부모가 늘 일 하느라 바빴다. 그러기에 그는 사랑도 관심도 못 받았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열등감을 갖는다. 털어버리지 않고 앙심을 갖고 수치감도 갖는다. 그런 식으로 살아오다보니 지금의 가족에게도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일어난다.

상담을 통해 자신을 바로 본 뒤에 고백한다. “지금까지 나는 내 잘못을 감싸고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잘못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증오감은 남들의 악한 행위에서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고통과 두려움에서 나옴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 귀신이 들어오면 모든 귀신이 다 들어옵니다. 내게 가장 강한 귀신은 증오감이었습니다.”

두려움은 내분비선에 악영향을 주어 몸의 모든 조직의 기능을 방해한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원치 않는 것은 안 보려고 한다. 그러나 원치 않는 것은 어디나 다 있다. 그래서 두려움이 일어난다. 그리고 두려움은 과장된다. 어린 시절 맞은 심한 매, 남편이나 아내로부터 당한 심한 모욕을 과장해서 기억한다. 그래서 더욱 두렵다.

누구나 어떤 죄의식을 가지고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비정상적인 죄의식이다. 파괴적이다. 어린 시절 동생을 때려서 귀가 먹게 되었다고 죄의식을 가지면 때린 오른팔이 마비될 수 있다. 자식이 잘 안 된 것이 나 때문이라 믿는 부모도 많다. 영적으로 영향을 준다.

우월감이 넘치는 사람에게는 열등감도 분명히 있다. 어린 시절의 실망과 욕구불만이 열등감을 준다. 어려서 매사가 미숙할 때 비웃음, 창피, 멸시를 당한다. 열등감은 개인이 힘을 다해서 어떤 일을 하지만 해내지 못하는 무능함이다.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실패와 비웃음에 대한 두려움을 준다.

미움 또한 모든 사람에게 다 있다. 남에 대한 우리의 느낌은 셋 중 하나이다. 사랑, 증오 또는 무관심이다. 심리학적으로 증오는 방향이 잘못된 사랑이다.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 다 자신을 미워한다. 손해 준 사람을 미워한다. 심지어 하나님도 미워한다. 이러한 미움이 내 속에서 병을 일으킨다.

증오심, 두려움, 죄의식, 열등감, 넷 중 하나만 있어도 나머지가 다 있게 된다. 이 귀신들이 지배하는 동안 천국은 없다. 그들은 숨어서 일한다. 우울한 마음을 주고 병을 주고 낙심을 준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건 지옥에 있게 만든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일곱 족속을 몰아내지 못해 약해질 때마다 그들에게 지배당하는 것과 같다.

사랑의 하나님을 받으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두려움을 비롯한 죄의식, 미움을 가진 사람은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했다. 사랑은 치료의 힘이다. 미움뿐 아니라 죄의식 두려움을 없애고 모두를 변하게 한다.

온전한 사랑은 하나님에게만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대로이다. 나의 모든 실수, 죄악, 못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를 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안 믿는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받아들일 때 두려움은 사라진다. 열등감도 사라진다. 그가 나를 사랑해 주신 것을 받아들일 때 신기하게 능력자가 된다.

어느 부인의 남편은 월남전 참전용사였고 성공한 슈퍼마켓 소유주였다. 급성 암에 걸려 앞으로 일 년밖에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받는다. 그와 같은 암에 걸려 살아남은 사람은 없었다. 그는 슈퍼마켓을 팔고 마지막 해를 뜻 깊은 봉사의 기간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용사답게 침착함으로 죽음을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두 어린 자녀의 어머니인 아내는 함께 있는 시간이 줄어듦에 따라서 절망도 커진다. 전보다 더 많이 기도했지만 차디찬 위안만을 경험한다. 기도 내용도 두서가 없었다. 먼 곳에 있는 어느 낯선 하나님에게 뭔가를 외치는 사람에 불과했다.

 

김기홍 kimkh@ame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