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교회의 신앙적인 열정이 이스라엘민족이 흩어져 나그네가 된 디아스포라(Diaspora)를 찾아 선교를 하면서 그 선교사역의 영역이 중동지방과 인도와 중앙아시아지역에 까지 확장되었다.

그리고 조상 때부터 유랑민족의 성품을 지니고 상술에 능한 유대인들이 솔로몬 왕 시대에 전 세계 바다를 누비며 무역하여 세계 최고의 부귀영화를 누렸고, 후에는 실크 로드(Silk Road)를 개척하여 광대한 아시아의 동부지역을 차지하였던 아시아를 사실상 지배하였고 모든 무역의 중심지였던 중국과의 교류도 하게 되었다.

유대인들이 중앙아시아의 사막지대를 낙타의 대상(隊商, Caravan)무역을 발달시켜서 실크 로드를 개척하여 지중해연안에서 사막지대를 걸쳐 중국평원에 이르고, 극동지역에서 해로나 육로로 중국평원에 이르러 세계문명이 융합되는 곳이 하나의 대제국으로 통일되었다는 것은 그 세력이 막강한 힘을 통해 주위로 뻗을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BC221년에 통일제국을 이룩한 진시황제의 조상들이 중앙아시아의 박토리아(Bactoria)의 유대인 계통이라고 한다면 이들은 아브라함의 후처인 구드라가 낳은 6명의 아들들에게 재물을 주어 이삭을 떠나 동방 곧 동국으로 가게 한 자녀들(창25:1-6)의 후손인지 또는 앗수르가 BC722년에 북 이스라엘을 강점하고 주민들을 포로로 끌어갔던 사람들의 후손인지, 바벨론이 BC586년에 남 유대를 정복하고 예루살렘 주민들을 포로로 잡아 갔다가 그 나라들이 멸망한 후에 그곳에 남아있었던 사람들의 자손들일 가능성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독특한 종교문화를 세계 어느 곳에 가서도 고집스럽게 지키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의 문화를 전해주거나 다른 문화와 상충되어서 문제들을 야기 시키는 일들도 많이 볼 수가 있다. 이런 유대인들의 문화양식이 세계 여러 곳에서 새로운 문화 창출의 공로도 있었지만 다른 문화와의 상충으로 증오의 대상이 되어 있었던 일들도 있었다.

중국에 기독교선교가 공식적으로 시작된 것은 AD635년에 당제국의 태종황제 이세민(太宗皇帝, 李世民)이 공식적으로 아시아교회의 선교본부인 아르메니아 수도 에뎃사에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여 아로펜(阿羅本, Alopen) 주교(主敎)가 인솔하는 21명의 선교단이 처음으로 당제국의 수도인 장안에 들어 온 때부터 시작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선교사들이나 상인들에 의한 선교사역이 시작되었고, 또 당제국의 수도 장안(長安)의 서시(西市)에서의 국제무역을 통한 대상(隊商)들에 의한 직 ? 간접의 선교와 기독교문화의 전달로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하여 3세기말에 로마의 작가 아루노는 “예수의 복음이 인도, 중국, 페르샤, 아랍 등 해가 뜨고 지는 모든 곳에 전해졌다.”고 기술하였다.

우리는 중국에 처음으로 기독교가 들어온 년대를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실크로드를 통하여 출입하는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으로 들어오는 사람들 중에서의 가능성과 서역주변의 중앙아시아지역이 기독교화된 것으로 보아 그들과의 교류 등을 통한 복음과 기독교문화가 유입되어서 이미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라는 종교에 대하여 알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소수의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사도 도마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와서 선교했다는 믿기 어려운 기록들을 믿고 있는데, 과연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선교에 오기 전에 그곳에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는 증거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1623년에 예수회 선교사에 의하여 극적으로 발견된 네스토리안 그리스도인들에 관한 비석이 옛 당나라의 수도였던 장안(長安)인 서안부(西安府)에서 발굴되었다. 이 검은 석회석 비석은 높이는 9척이고 넓이는 3.3척이 되는 비석으로 그 윗부분에는 십자가와 연꽃이 그려져 있고 그 아래에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라고 새겨져 있다.

이 비석은 당의 덕종황제(德宗皇帝) 통치 때였던 781년에 세워졌는데 네스토리안 선교사들이 당의 2대 황재인 태종(太宗) 이세민의 통치시대였던 635년에 중국의 수도에 도착하였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이렇게 분명히 네스토리안 그리스도인들의 선교를 시작하였던 635년부터 비석을 세웠던 781년까지의 역사적인 기록을 남겼는데도 이런 아시아교회의 역사를 전혀 알지 못하였던 서방세계의 지성인들인 라 크로즈(La Croze), 볼태어(Voltaire, 1694-1778)와 다른 사람들은 그 비석은 믿을 수 없는 위조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어쨌든 서방세계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하였던 중국에서의 기독교선교가 자기들의 믿음의 조상들이 이단으로 정죄하였던 아시아교회의 네스토리안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중국선교가 이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을 이 경교의 비석으로 확실하게 증거된 것이다.

경교비문에 아로펜(Alopen)이“청운의 꿈을 품고, 성경을 지고, 좋은 것을 바라보고 험난한 길을 다녀와서 정관9년(貞觀九年, AD635년)에 장안에 도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장안에 들어온 선교단 일행은 황실의 도서실에서 성경을 한문으로 번역하게 했다. 그리고 황제는 그의 숙소에서 성경공부를 했다. 태종황제는 선교단이 가져온 종교의 청렴함과 진리로 깊은 감동을 받게 되어 황제는 그 종교를 선교할 수 있도록 특별명령을 내렸다. 아로펜주교가 인도하였던 선교단이 서기 635년에 당시 장안에 들어와서 3년동안의 성경번역과 공부를 하였던 결과로 638년 7월에 선교를 허락하는 칙령을 내렸다.

황제의 칙서에서의 아시아교회에 대한 평가는: 바른 진리들은 불변의 이름을 갖고 있지 않으며, 성자는 불변의 장소에 머무르지 않는다. 가르침을 지역에 따라 백성들의 유익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시작하였다.

시리아왕국의 대주교인 아로펜은 먼 곳에서 성경과 성상(聖像)들을 가져와서 그것들을 수도 장안에 봉헌하였다. 우리는 그 종교의 교리들을 연구한 결과, 거기에서 순수하게 훌륭함과 자연스러움을 찾았다.

우리는 그 근원적인 자료를 연구함으로 소중한 진리의 확립에서 나온 것을 알았다. 이 의식은 어려운 표현에서 자유스러웠으며, 그 원리들은 그 체계를 잃어버릴 때에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모든 피조물들에 유익한 것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유리할 것이다. (西安市東新社拜堂, 景敎碑畵集 p 16)

이렇게 당태종의 칙령으로 아시아교회로서 네스토리안교회인 경교(景敎)는 당의 국가적으로 공인된 종교가 되었고 장안의 황국의 서쪽의 서시(西市)에 가까운 의년방(義寧坊)에 국비로 대진사(大秦寺)라는 교회당을 세웠고, 경교의 21명의 선교사들에게는 국법으로 보장된 승려(僧侶)의 신분을 얻게 되었다.

위에 기술한 비석의 발굴로 아시아 기독교의 역사와 신앙의 내용을 알게 되었고, 당 나라를 중심으로 하여 아시아 전역에 미쳤던 기독교문화의 영향이 오늘까지 지속되어 있는 놀라운 현실까지 알 수 있게 하여 과연 하나님은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사54:5) 분이심을 증거하게 되었다.

 



                                                           백석신학 조 영 길 교수
                                                           본지 기획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