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구병/아주대교수, 서양사-남미>

 대지진 참사가 발생한 아이티는 카리브 해의 그리 크지 않은 섬 한쪽에 있는 나라입니다. 인구 900만 명을 지닌 세계 최빈국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18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사정은 크게 달라집니다. 18세기 초부터 왕위계승전쟁에서 이미 몇 차례 맞붙은 영국과 프랑스가 또 다시 7년 전쟁(1756-1763)을 벌인 끝에 패전국 프랑스는 카리브 해의 식민지 생도맹그(오늘날의 아이티)를 유지하는 대신 퀘벡을 영국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어찌된 영문이었을까요? 오늘날 몬트리올을 포함한 퀘벡은 캐나다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입니다. 당시 오늘날의 기준과는 판이한 선택이 이루어진 까닭은 아이티가 사탕수수 농업의 중심지로서 프랑스 왕실의 금고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이티는 프랑스에게 포기할 수 없는 경제적 요충지였던 것입니다.

 프랑스의 식민 통치는 그 뒤 얼마 가지 않아 아이티 인들의 저항에 부딪혔고 1791년부터 전개된 아이티의 “흑인혁명”은 1804년 새로운 독립국을 탄생시켰습니다. 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아이티 인들은 대체로 검은 피부를 지닌 아프리카계의 후손입니다. 15세기 말부터 카리브 해의 섬 지역에 유럽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했을 때, 그곳의 원주민들은 학살당하거나 천연두와 같은 질병에 시달린 채 급격하게 줄어들었습니다. 대신 대규모 농장의 운영에 필요한 노동력은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로 충원되었습니다.

 아이티 인들의 독립투쟁은 미국에 이어 아메리카에서 두 번째 독립국가의 탄생을 가져왔지만 아이티는 사실상 아메리카에서 버림받게 되었습니다. 프랑스는 1825년, 영국은 1833년, 미국은 1862년에야 아이티의 독립을 승인했으며, 브라질이 1865년 승인할 때까지 라틴아메리카의 어떤 나라도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웃 국가들은 아이티 인들의 독립투쟁을 그저 과격한 흑인폭동으로 치부한 채 철저히 무시한 것입니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쿠바와 더불어 ‘미국의 뒷마당’이 된 아이티에서는 특히 냉전 시대 동안 이른바 ‘파파 독(Papa Doc)’과 ‘베이비 독(Baby Doc)’으로 불린 뒤발리에(Duvalier) 부자의 세습통치(1957-1986)가 이어졌습니다. 그동안 미국은 억압적이고 부정부패가 끊이질 않았던 악명 높은 아이티의 독재 정부를 공산주의에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오히려 후원하기까지 했습니다.

 대지진이나 홍수 같은 자연재해의 경우 피해가 왜 가난한 나라의 빈곤층에게 집중되는 것일까요? 지금까지 발생한 많은 재해는 인간으로서 어찌할 수 없는 천재지변일 뿐만 아니라 사회구조적 문제와 깊이 관련된 인재이기도 합니다.

 아이티는 한 때 남부럽지 않은 농산물 생산지와 천연자원의 보고는 예외 없이 인간의 탐욕에 따른 정복과 지배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독립을 얻은 뒤에도 옛 식민지의 주민들은 독재와 정치사회적 혼란에 신음해왔습니다.

 이번에 참사를 겪은 아이티의 슬픈 역사를 짧게나마 돌아보면서 세계 여러 곳의 가난한 이들과 사회적 약자의 형편을 더 폭넓게 이해하고 마음에 품는 일은 이 시대 깨어 있는 신자들의 참된 기도일 것입니다. 인류가 겪는 어려움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이 세상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