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새해를 맞으며 ...추태화 (안양대 기독교문화학과 교수)

I. 2010년, 독일 통일 20주년

새로운 한 해 2010년을 맞는다. 시간과 역사의 주관자되시는 하나님께서 또 한 단위의 시간을 우리 인생들에게 허락하신 것이다. 새해를 알리는 여명이 동터오면서 우리는 나름대로 새해의 계획과 의미를 세워본다. 아무런 조건없이 주시는 이 시간의 선물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감사하고 대해야 할까.

올해 2010년도를 분단과 통일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벽두부터 부러움과 부끄러움이 교차한다. 부럽다는 표현은 올해 독일은 통일 20주년을 맞는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지난 2009년도는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을 맞아 여러 행사로 그 의미를 되새기며 “독일의 힘”을 세계에 알린 바 있는데, 올해 동?서독 통일이 벌써 20주년을 맞게되는 것이다. 부끄럽다는 말은 그러면 독일이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한 지가 20년이 되는데 우리는 분단극복과 통일을 위해 얼마나 애썼는가 하는 데서 나온다. 지난 20년 동안 우리가 걸어온 길은 통일을 향한 정도였는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북한 주민의 삶과 인권에 대한 문제를 도외시할 수 없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분단과 통일에 얼마나 정열과 심혈을 기울였는지 냉철하게 되짚어 봐야 한다. 강도만난 이웃을 돌보지 않으면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야기하며, 불의가 판치는 세상을 곁에 두고 어떻게 하나님의 공의를 말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더 이상 부끄러운 모습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 기독교인들은 새롭게 밝아오는 2010년, 독일 통일 20주년에 우리 자신을 다시 한번 성찰해야하리라 본다.


▲ 독일과 베를린의 상징 브란덴부르크 문, 그 앞에 기념사진을 위하여 아르바이트하는 위장군인들이 있다 ? 추태화

II. 역사가 기억하는 1989, 1990년

1990년은 독일 역사, 세계 역사의 큰 획을 긋는 의미깊은 해였다. 동, 서독으로 분단되었던 독일이 통일된 해이기 때문이다. 1990년 10월 3일이 그날이다. 2010년은 독일이 통일을 맞은 지 20주년이 되는 해이다. 전 서독 콜(Kohl)수상이 통일을 선포할 때 세계가 체험한 것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어떻게 이렇게 통일이 갑자기 이뤄질 수 있는가. 소련 대통령 고르바초프가 그 전에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 운동을 시작하여 사회주의 위성국가의 민주화가 이뤄지게 하였지만 독일 통일은 정치나 전략으로 불가능해보였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통일이 성취된 것이다. 불가사이했던 분단 문제가 해결되자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했다. 한편에서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며 역사의 섭리자되시는 하나님께 경외감을 나타내며 감사와 찬양을 돌리었다.

남북으로 분단된 우리에게 독일 통일은 가슴사무치게 부러운 거사였다. 그래서 그 날이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여기서 통일 그 자체보다 더 역사적이고 역동적인 사건이 있었다. 통일을 이룬 전야제 같은 거대한 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동독 국민들이 사회주의 정권에 대항하여 일으킨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1989년을 정점으로 열기를 더했고, 결국 소련의 위성국가였던 동독을 무너지게 했다. 그것을 동독 평화혁명(Die Friedliche Revolution)이라 명명한다. 이 역사적 거사를 전제하지 않고 통일을 논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1989년은 독일 역사에 큰 획을 긋는 대전환점이 된 해였다. 1990년 독일이 분단의 역사를 끝내고 통일할 수 있었던 것도 1989년 동독 평화혁명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만약 1989년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독일 통일은 어쩌면 이뤄지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서독 국민들은 통일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동서독 격차, 통일분담금, 그 외 절차 등이 만만치 않음을 잘 알고 있었고 자신들에게 직접적인 혜택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독일 주변의 유럽 강대국들도 통일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동독 국민들이 “우리는 무장하지 않았다” “폭력을 거두라” “우리는 한 민족이다”를 외치며 거리로 나왔던 것이다. 이런 상황 가운데 동독 전역에서 자유화 물결이 다시 응집되어갔다. 그러면 교회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III. 동독 교회: 탄압과 저항 사이에서

독일 교회는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가톨릭은 선교 시초가 8세기였으니 1300년 가까운 긴 역사를 간직하고 있고, 개신교는 루터의 종교개혁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니 2010년으로 493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종교개혁 당시 가톨릭이 일방적으로 개신교를 탄압한 사건도 있었고, 1618-1648년 사이에 일어난 30년 전쟁과 같이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갈등이 깊은 시대도 있었지만 독일 안에 수립된 정권으로부터 혹독한 핍박을 받은 것은 나치 시대와 동독의 공산정권 시대였다. 나치 시대(1933-1945)는 히틀러와 나치추종자들로부터 목숨을 걸고 교회를 지켜야했고, 공산정권 시대(1949-1989)는 역시 유물론적 종교비판에 의해 교회가 많은 탄압을 받아야했다. 나치나 공산주의는 교회를 굴복시키지 못했다. 동독 사회주의 정권은 정권 수립 후부터 몰락에 이르기까지 동독 내 교회를 해체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오히려 교회에 무릎을 꿇었다. 동독 정권의 기독교 탄압은 1989년 평화혁명으로 끝났다. 동독 교회는 분단 이전의 독일복음주의교회(EKD, 루터교)에 다시 귀속하게 되었다.

여기서 동독 사회주의 정권 아래서 교회가 지나온 행적을 몇 가지만 살펴본다.

독일은 나치가 일으킨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분단되었다. 민주 진영은 서독 지역에 영국, 미국, 프랑스 연합군이 주축이 된 군정(軍政)을 설치하였고, 공산 진영은 소련이 동독 지역에 역시 군정을 설치하였다. 1945년 5월 종전과 함께 군정이 활동을 개시하여 1949년 서독은 서독연방 헌법을, 동독도 동독연방 헌법을 선포하므로 두 개의 나라가 등장하였고, 이는 곧 분단을 의미했다.

1949년 가을 동독은 DDR(독일민주주의공화국)라는 국가명으로 출범하면서 자체 헌법을 공포하였는데 교회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즉 동독 교회는 당시 독일복음주의교회 산하에 있었다. 베를린 주교 O.디벨리우스(O.Dibelius)가 소련 정권하의 생활이 나치 때보다 더 부자유하다고 저항하였다. 1951년 디벨리우스 주교는 소련 권력이 동독에서 사법권을 남용하고 있다고 스탈린을 비판하였다.

1954년 독일복음주의 교회의 날에 “소망 안에서 기뻐하라”는 주제로 동독 국민을 격려하였다. 동독 정권이 기독교 청소년의 입교식을 청소년단 입단식으로 대체하려는 의도에 강력히 반발하였다.

1961년 동독 정부가 베를린 장벽을 설치하기 시작하였다(이 베를린 장벽은 1989년 11월에 무너졌다). 그동안 베를린에서 왕래가 수월했던 교계지도자들은 이 시기부터 자유롭게 대화와 만남을 가질 수 없었다.

1969년 6월 10일 동독 사회주의 정권은 끝내 동독 교회를 독일복음주의교회로부터 분리할 것을 지시하였다. 독일 교회도 동?서독 교회로 분리된 것이다. 서독 교회가 예전의 이름 EKD로 존속하는데 반하여, 동독 교회는 BEK(Bund Evangelischer Kirchen in der DDR, 독일민주주의공화국 복음주의교회연맹)라는 이름으로 분리하였다.

1982년 대도시에 소재한 교회를 중심으로 월요촛불기도회가 시작되었다.

1989년 10월 9일 베를린,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등 동독 대도시를 중심으로 월요기도회의 인파가 물밀듯 밀려들었다. 교회에 들어갈 수 없는 시민들이 거리에 모여들었다. 라이프치히에서만도 니콜라이 교회를 위시하여 토마스 교회, 미하엘스 교회, 개혁교회가 평화기도회를 위해 교회를 개방하였다. 니콜라이 교회는 오후 2시에 이미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이로서 평화혁명의 열기가 고조되고 라이프치히 시내만도 약 15만 명의 인파가 운집하였다. 베를린에서는 50만 명 이상을 추정하는 인파가 교회와 거리로 몰려들었다. 평화시위에 경찰이 대거 동원되었으나 발포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오히려 동독 정부는 총사퇴하였고 사회주의 정권은 붕괴되었다.

1989년 10월 16일 동독 전역에서 평화기도회와 가두 시위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과 베를린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 문이 개방되었다. 베를린 국경 동독 경찰은 무장해제하고, 동?서독 시민들이 장벽을 지나 부둥켜안고 감격해 하는 장면을 바라봐야했다.

1989년 12월 18일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가 월요기도회를 종결지었다. (그 뒤 니콜라이 교회는 다른 주제로 월요기도회를 계속 갖고있다.)

1990년 10월 3일, 동?서독이 통일을 공포하였다.

IV. 통일의 전야제, 평화혁명

1989년 평화혁명은 통일을 가능케 한 전야제와 같은 사건이었다.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역사의 여러 사건들을 움직여 교회가 중심에서 그 일을 이루게 하셨다. 동독 교회가 평화혁명의 과정에서 중심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했던 주변요인들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정리해 보면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의 변화이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취임하면서 두 가지 정책을 약속했다. 페레스트로이카(개혁), 글라스노스트(개방)가 그것이었다. 소련의 체제 변화와 함께 폴랜드의 졸리다리노시치(연합) 운동은 동독 시민의식에 지대한 영향과 자각을 불러왔다. 그들은 소련, 폴랜드, 체코를 모델로 변화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둘째, 소련의 위성국가로 존재하던 이웃 사회주의 국가들의 변화가 동반되었다. 폴랜드와 헝가리가 경제, 정치에서 개혁하였다. 감시와 감독이 배제된 자유선거를 실시하므로 사회주의 정권의 색채가 서서히 바뀌었으며 시민들은 그만큼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셋째, 1975년도 헬싱키 국제회의에서 동독 정부는 유럽 국가의 평화와 협력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조약에 서명한 바 있었다. 동독 시민들은 그 때부터 개방정책과 민주화를 크게 기대하고 있었다.

넷째, 1987년 서독 사민당과 동독 사회주의 정당이 상호 협조를 협약하였다. 동독은 이로서 서독의 정치체제를 수용하는 자세를 취하였으며, 서독은 당 서기장인 호네커를 공식 초청하여 상호 협력을 약속하였다.

다섯째, 국제적으로 미국과 소련이 군비축소에 서명하였으며 그 결과 독일 국경에서 중거리탄도미사일 등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호네커는 동독 군인 만 명을 감축하며 6백대의 탱크에 들어가는 비용을 시민 복지를 위하여 활용하겠다고 발표하여 화해분위기에 부응하였다.

여섯째, 서방과 서독에서 들어오는 미디어가 동독 시민의식을 깨웠다. 다양한 루트와 방법으로 포장된 미디어는 시민들에게 동독과 서방 세계를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계속 제공하였다. 이 미디어들은 나아가 재야단체와 교회를 통해 동독 내에 확산되었다.

일곱째, 1989년 5월 7일에 있었던 동독 지방 선거에서 부정선거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시민들 뿐 아니라 당원, 공무원 등 사회주의 정권과 직접 관계있는 이들에게까지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개혁에 대한 열망은 이렇게 고조되어가고 있었다.

V. 평화혁명과 교회의 역할

동독이 소련 위성국가가 되어 사회주의 정부를 세워 독재할 때 교회는 어디 있었는가?

교회는 국민들 가운데 함께 있었다. 동독 정부는 교회를 해체하고, 국민들의 삶과 가치관에서 교회를 배제시키려고 온갖 전략을 다썼다. 하지만 그들은 신앙의 뿌리를 없애지 못했다. 그만큼 사회주의 정권은 종교에 대해 무지했고, 기독교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한쪽에서는 교회가 그렇게 정치화 해도 되는가? 라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교회의 정치화”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비판받을 일이다. 하지만 이 경우 교회가 정치화 된 사례라고 말할 수 없다. 정당방어라고 해야할 것이다. 나아가 교구에 속해있는 교인들을 위한 대리자 역할이었다. 교인 개인들은 자신들의 의사를 표출하기 불가능했다. 단체로서 교회가 이 의견을 집결시키고 표현의 길을 열어준 것이다.

교회는 자신의 양떼를 보호할 의무가 있었다. 사회주의 독재가 국민들을 억압하고 있는데 교회가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다. 그것은 교회의 본질에 속하는 사안이었다. 정권이 온갖 거짓과 위선적인 구호로 국민을 속이고 있는데 교회가 침묵해야 하는가. 나치 정권이나 사회주의 정권은 로마서 13장 1절을 내세우며 국가의 권위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였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사회주의 정권이 하나의 권세인 것만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정말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어떻게 하나님과 교회와 신앙을 부인하는데 혈안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이 어떤 권세에서 나온 것인지 분명하다면 교회는 저항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동독 안에 있었던 교회는 국민의 존재의 기반을 보호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동독 국민들은 오랜세월 동안 사회주의 족쇄 아래에서 비인간적인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교회는 동독 안에 있었고, 사회주의 속에 있었고, 역사적 현장 가운데 있었고, 국민들의 삶 속에 있었다. 니콜라이 교회의 휘러(C.Fuehrer) 목사를 위시한 교계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자주 인용하였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동독 국민들이 바로 그런 이들이었다. 교회는 그런 이들에게 열려있으며 그것이 부인할 수 없는 교회의 본질 중 하나이다.

동독 국민들이 평화혁명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교회가 한 역할은 다음과 같이 살펴볼 수 있겠다.

첫째, 교회는 피난처가 되었다. 사회주의 정권으로 탄압을 받으며 자유를 통제당하는 가운데 국민들의 심령은 지쳐갔다. 동독 정부는 끊임없이 교회를 유린하며 기독교 신앙을 모욕하였다. 청소년들은 학교교육을 통하여 무신론에 길들여졌으며 사회주의 정권은 국민들이 신앙생활을 할 수 없도록 방해하였다. 그 결과 동독 기독교인 수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통계에 의하면 1960년도 동독 기독교인은 천4백만 명이 넘었는데, 1989년도에 5백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어느 교회는 1949년 당시 천 여명 교인이 있었는데 동독 붕괴시에는 다섯 명으로 줄어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 숫자에 목사, 음악전도사, 집사가 포함되었다니 40년 동안 얼마나 탄압이 심했는지 상상케 한다.

구약에서 도피성은 은총의 장소였다. 죄지은 사람이 죽음을 모면할 수 있는 은혜가 있는 곳이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이 가서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이 교회다. 교회는 도피성처럼 비밀경찰의 감시와 수색에 쫓기고, 사회주의 정권의 협박과 선전에 지친 국민들이 몸과 마음을 피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들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쉼을 얻고 소망을 얻고 믿음을 재충전하였다. 믿지 않는 자들도 교회 울타리를 통하여 교인들과 시민적 동지의식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교회는 비인간적 정권 아래서 시달리고 지친 국민들을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로 끌어안고 위로하는 영혼의 쉼터, 피난처가 되었다.

둘째, 교회는 대언자가 되었다. 사회주의 정권의 일방적인 선전은 국민들이 미래를 바로 설정하지 못하게했다. 위대한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말은 구호뿐이었지, 정치, 경제, 교육, 인권 어떤 면에서도 나아지는 것이 없었다. 동독 국민들은 서방 유럽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부러움과 절망 사이에서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경찰과 주변의 감시를 어떻게 피할 수 있는가. 비판하면 체포되기 일쑤였다. 사회주의 체제를 비판한 수많은 저항가들이 민족의 반역이란 이름으로 매장, 격리되거나 서방으로 추방당했다. 이 때 교회가 국민들의 입이 되어주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의 마음을 대변하였다.

동독 시절 교회가 여러 집회(예를 들면 교회의 날, 교계지도자 회의 성명 등)를 통하여 공식적으로 표명한 문구들을 보면 이렇다. “교회는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한 형제다” “소망 가운데 기뻐하라” “동 서독 안에 복음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복음과 동독에서의 기독교적 삶” “자유와 교회의 섬김에 관하여” “독일 모든 기독교인들의 공동체” “사회주의 사회 속에서 증인과 섬김의 공동체” “그리스도께서 자유케 하시니 - 교회도 다른 이들의 자유를 위하여” “교회는 배우는 자들의 공동체” “평화를 위한 교육”(적을 규정하지 말자) “무기없이 평화를 이루자” “무기없는 섬김은 확실한 (신앙의) 증거” “평화를 위해 구체적으로 행하자” “믿음을 실천하자” “평화 문제와 신앙고백” “경계를 허물라” “정의, 평화, 창조의 보전” “교회로서 살아가기” “기독교인과 교회, 이 시대의 질문들” “동독에서 보다 많은 정의를” “비폭력” “칼을 쳐서 보습을” 등등. 이런 용어들이 동독 시민들의 의식을 대변하거나 지탱하고 있었다.

셋째, 교회는 예언자가 되었다. 동독 정권의 탄압을 국민들은 역사의 후퇴로 볼 수 밖에 없었다. 프롤레타리아의 통치가 아니라 독재였다. 그것은 역사 발전에 역행하는 행위이며 퇴보를 의미했다. 교회는 기독교인 뿐 아니라 비기독교인들의 의견도 청취하고, 자유를 추구하는 저항단체들에게 동기 부여와 장소를 제공하고, 모임을 주선하였다. 교회는 이로서 동독 전역에 저항 네트워크를 조성하는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교회 스스로 정치적 발언은 삼갔지만 저항단체를 직 간접으로 후원하므로서 민주화를 도모하게 했다. 예를 들면 베를린 사마리아 교회 에펠만 목사는 교회로부터 멀어져가는 청소년들을 위해 파격적으로 젊은이 문화를 도입하여 예배에 활용하였다.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는 월요기도회를 통하여 시민들의 의사를 반영했다. 그런 교회가 하나 둘에 그치지 않았다.

넷째, 교회는 중보기도자가 되었다. 월요 평화기도회가 시작된 1982년 경부터(1978년이라는 주장도 있다) 기도회 순서에 동독 안의 정의, 평화, 인권, 환경보호를 위해 저항하다 체포된 이들의 명단을 불러주는 시간이 있었다. 또는 그들의 명단을 교회 벽에 걸어놓고 기도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자유를 빼앗긴 동료들과 그 가족을 위로하고 그들을 기억하며 기도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은 두려움과 불안을 극복하고 동지애를 확인하며 더욱 연대할 수 있었다.

다섯째, 교회는 시대의 양심이 되었다. 동독에서 사회주의 정권의 독재와 인권 탄압에 저항한 단체는 1988년에 160개 정도 추산되었다. 그 중에서 교회와 기독교인과 연관된 단체는 거의 대다수로 추정되었다. 이로서 기독교의 정의와 평화, 그리고 인권 사상이 동독 사회 안에 얼마나 깊게 뿌리를 두고 있었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여섯째, 서독 교회의 역할이었다. 서독 교회는 그동안 재정과 물자 지원, 신학과 교계 인적, 인프라 교류 등을 늦추지 않았다. 재정 지원의 경우 1957-1990년 사이에 서독 교회가 동독 교회에 지원한 액수는 상상을 초월한 천문학적이었다. 또는 동독에서 정치범으로 수감된 이들을 보석금을 주고 서독으로 데려오는 활동도 하였다. 서독 교회는 동독 기독교인들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연대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동?서독 기독교인들은 교회를 통해 지속적으로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된 지체의식이 이데올로기와 국경을 극복한 것이다.

VI. 그러면 한국 교회는 어떻게?

개인적으로 독일의 통일을 바라볼 때 부럽기 그지없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어떻게 사랑하시길래 저렇게 거대한 역사적 대사를 일으키게 하신 것일까. 인간의 지혜와 노력으로 이루기 힘든 통일이라는 대업이, 그것도 국제 정세의 복잡한 관계 속에 불투명해보인 거사가 어떻게 일시에 가능하게 되었을까. 20년 전에 동?서독 국경은 이미 사라져 지금은 흔적도 없다. 베를린 장벽은 망치로 쪼개어 관광상품으로 팔리고 있다. 동?서베를린 국경이던 찰리포인트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동독 지역에서 더 이상 트라비라는 고물자동차를 볼 수 없다. 그곳에도 벤츠가 달리고 BMW가 달리고 있다. 자원과 돈이 부족하던 동독 시절 낡은 건물들은 보수되거나 새로 지어지고 있다. 동독 시절의 물건들이 벼룩시장에서 헐값에 팔리거나 일부 호사가들의 소장품이 되었다. 아직 동?서독의 격차가 완전히 극복되지 않았지만 통일 독일은 유럽연합에서도 지도국으로 실력과 명분이 당당하다.

우리는 얼마나 통일을 위해 수고하고 헌신하여 왔는가. 서독이 동독을 대하듯, 남한은 북한을 대하고 있는가. 동독 교회가 평화교육을 기획하면서 적을 규정하지 말자고 했는데 이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다. 상대방을 원수로 규정하고 싸우는 것은 원수를 용서하는 것보다 쉬울 것이다. 동독 교회는 보다 신앙적인 길을 가르쳤다. 성경의 규범을 따른 것이다. 우리는 북한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북한에는 동독 교회와 같은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동?서독 교회의 교류와 같은 사역을 꿈꿀 수도 없다. 문제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집약해서 표현하자면 성숙해져야 한다. 성도도 교회도 성숙해져야 한다. 근시안적 접근으로는 통일이라는 거대한 역사를 이룰 수 없다. 말씀을 기억하자. 바울 사도는 “장성한”(고전 13:11, 14:20, 엡 4:13)이란 표현을 여러번 썼다. 장성하지 못한 결과 한국 교회는 통일 문제에 관해 큰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동독 교회는 천 4백만 교인이 5백만으로 줄어들어도 평화혁명을 이끌어내는 도구가 되었다. 우리는 어떠한가. 한국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영역에 관해서는 지대한 관심과 열정을 기울이지만 사회에 대해서는 담을 쌓고 있지는 않은가. 시대 문제에 침묵하는데 익숙하지 않은가. 교인들이 “당신들의 천국”안에서 “영악한 바보”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사회와 역사에 대해 보이지 않는 게토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뼈아픈 자기성찰을 해야할 때이다.

초라해보인 동독 교회, 40여 년을 사회주의 통제 아래서 시름시름 왜소해진 동독 교인들, 그러나 그들이 복음에 의지하고 믿음으로 일어났을 때 그들은 1989년 평화혁명을 이루는데 귀하게 사용되었다고 본다. 평화혁명으로 가기까지 교회가 있었고 그 혁명 뒤에 통일이 온 것이다.

나치의 극우파 이데올로기에 찬동했던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동독 지역 크리스찬들이 많았다. 그들의 판단 착오와 무분별한 행동은 나치가 권력을 장악하는데 적잖이 기여했다. 그들이 종교개혁 정신을 제대로 실행했더라면 나치가 그렇게 쉽게 권력을 잡지 못했을 것이다. 나치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소련 공산군이 연합군의 이름으로 독일 땅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한 역사가는 독일의 기독교인들이 제대로 신앙을 지켰다면 유대인들이 6백만 명이나 목숨을 잃지 않았을 것이며, 대량학살이 훨씬 적은 수에서 멈췄을 것이라고 개탄한 바 있다. 나치에 부역하고, 나치로부터 잔혹한 핍박을 받은 기독교 지역 동독, 그리고 또다시 공산 치하에서 40년 가까이 핍박받고 있을 때 하나님은 연약해진 그들에게 다시 힘을 주셨다. 약할 때 강함되시는 역설적이며 신비한 하나님의 역사가 드러난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교회를 중심으로 복음의 힘을 얻어 다시 일어났다. 평화혁명, 예수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그 결과 공산주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와 자유를 다시 얻게 되었다. 그렇다면 독일 통일은 어떻게 찾아온 것인가. 믿음의 선조들이 갔던 길을 묵묵히 걸어간 교회와 교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은 아니었을까.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런 확신이 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2010년, 독일 통일 20주년의 해를 맞아 통일한국의 비전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겨본다.


 
추태화 박사(사진)는 단국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한 뒤 독일 뮌헨대학교에서 독일문예학/기독교문학, 철학, 사회학(M.A)을, 그리고 아우그스부르크 대학교에서 독일문예학과 신학(Dr. phil.)을 공부했다.

추태화 박사는문학과 문학 비평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일생의 사명으로 삼고 있는 우리 사회가 건강한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맑고 풍요로워지기를 꿈꾸는 기독교 문화운동가이다.

현재는 안양대학교 신학대학 기독교문화학과 교수로 있으며, (사)기독교윤리실천 문화소비자운동본부, 기독교학문연구소에서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 『영화, 그 의미에 길을 묻다』, 『상상력의 유혹』,『대중문화 시대와 기독교 문화학』,『기독교 영성에 비추어 문학 새롭게 읽기』,『21세기 기독교 인문학의 전망』,『광장에서 문화를 읽다』,『101가지 이야기 신학』『태초에 문화가 있었느니라 』, 『문화의 미로에서 길을 찾다』, 등이 있다.